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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임 주라" 외친 페인트공은 어떻게 됐나요?

[그림책일기 30] '으아아아' 소리가 어디에서, 왜 나는지 귀기울이기

등록 2020.10.08 15:07수정 2020.10.0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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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 이게 뭐지?'

도서관에서 제목이 비명 소리인 그림책을 만났다. 표지에 있는 사람들이 시끄러운 소리에 귀를 막고 있고 '으아아아' 글자가 어지럽게 여러 번 찍혀 있는 책이 궁금해서 펼쳐보았다. 이야기는 이렇다.
 

"임금 주라" 외친 페인트공의 절규와 그림책 '으아아아' ⓒ 국민서관

 
으아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가 전 세계를 발칵 뒤집었다. 요란한 소리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무너지고, 북극이 갈라져 새로운 대륙이 생긴다. 세상에서 가장 큰 호랑이는 줄무늬까지 벗겨졌다. 갑자기 지나가던 자동차가 뒤집히기도 하고, 할아버지는 보청기를 빼도 으아아아 소리가 들린다. 도대체 이 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외계인이 쳐들어온 거 아닐까 싶어 우주로 나가보지만 소리는 지구에서 들리고 있다. 별똥별이 트롬본 공장에 불시착한 걸까도 생각해보고, 초대형 슈퍼컴퓨터로 분석해 봐도 알아내지 못한 소음의 정체. 끔찍한 비명소리 때문에 가게, 학교, 사무실이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나선다.

전 세계 사람들이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왔더니 어느 집 6층에서 나는 소리. 그 집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렸다. 모두를 놀라게 한 비명소리는 아이가 무릎에 상처가 나서 지르는 소리였다.


아이들이 엄살쟁이가 된 이유

'으아아아' 괴성이 어디에서 나는 것인지 책이 끝나갈 때까지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마지막에 보여주는 이미지가 대반전이다.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웃었다. 코로나로 오랜만에 개관한 도서관은 대출만 할 수 있어서 다른 때보다도 조용했는데, 주위를 둘러보며 얼른 입을 막았다.

올해 8살이 되었는데도 동글이는 엄살쟁이다. 어디에 조금만 부딪쳐도 금방 울상을 짓고 운다. '호'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날은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가 주저앉아 울고 있다. 왜 우는지 물어보니 나무 사다리를 건너다 다리가 중간에 빠졌다고 한다.


"못 걷겠어."
"여긴 아이들 기구라 엄마가 올라갈 수 없어. 동글이가 내려와야 해."
"으아앙~ 안돼안돼. 못 걷겠단 말야."
"그렇구나. 내려오면 엄마가 호 해줄게.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까?"


아이가 일어서더니 내려온다. 못 걷겠다는 이야기는 잊었는지 아이스크림 대신 망고주스를 사달라고 한다. 이놈의 엄살은 고무줄 엄살이다. 엄살쟁이에게 시달린 나를 위로하려고 이 책이 눈에 띈 걸까? <으아아아>를 보고 바로 대출했다.

콜라주 형식으로 만든 그림이 독특하기도 하고, '으아아아' 소리 정체를 찾아가는 과정도 재미있는 이 책은 동글이도 좋아했다.

"엄마, 이거 봐. 북극에서 낚시하던 사람 뒤에 북극곰이 있었는데 비명 때문에 빙하가 떨어져 나가서 곰한테 안 잡혀 먹었어."
"웃기지? 호랑이 가죽 벗겨지는 것 봐."
"인공위성으로 이런 소리도 추적할 수 있어? 슈퍼 컴퓨터는 뭐야?"


이것저것 질문하면서 재미있게 보던 아이에게 비명 소리가 어디서 왜 나는 거 같냐고 물었다. 잘 모르겠다면서 뭔지 궁금하단다. 그러더니 마지막에 아이가 다쳐서 내는 비명인 걸 보고는 웃는다.

"재밌어? 엄마는 이거 보니까 동글이 생각나던데."
"뭐 좀 그러네."


아이도 본인이 이렇게 소리 지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퇴근 한 아빠에게도 보여주고 우리 가족은 <으아아아> 책 한 권으로 하나가 되었다. 셋이서 책을 보며 소리내어 웃는데 동글이가 말했다.

"난 얘가 왜 이렇게 크게 소리 지르는지 알아."
"왜?"
"아픈 걸 표현하고 싶은 거야. 엄마, 아빠한테 위로 받고 싶어서. 그러면 좀 덜 아프거든."


아이의 엄살이 웃기다고만 생각했는데 동글이는 책을 보며 주인공 마음에 공감하고 있었다. 아이의 엄살에 '또 저러나' 했었는데 아픔의 표현이자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 아이의 비명이 다르게 다가왔다.

"노임 주라" 외친 페인트공의 절규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9월 29일, 사천시 선구동 한 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에서 페인트공 A(남·50대)씨가 임금체불에 항의하며 오후 2시3분부터 2시간 동안 고공농성을 벌였다. (사진=시민 제공) ⓒ 뉴스사천

 
그림책 <으아아아>는 아이의 비명 소리로 재미있게 끝나지만, 추석 연휴 하루 전 50대 어른의 절박한 절규가 잊히지 않는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9월 29일 아파트 신축 공사 현장에서 페인트공 A씨는 고공농성을 벌였다. 맨 몸으로 아파트 벽에 매달려 붉은 색 페인트로 '사기꾼 시공업자, 시행사는 더욱 사기꾼. 노임 주라. 개자식'이란 글을 써내려간 A씨.

아파트 시공사 하청업체에 근무하며 외벽 도장 등의 일을 했지만 하청업체가 부도나자 임금을 받을 수 없었던 A씨는 원청업체를 상대로 체불임금 청산을 촉구하며 지상 수십미터 높이의 아파트 외벽에 매달렸다.

자신이 칠한 하얀 벽을 자신의 손으로 망쳐가며 임금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절규는 2시간 만에 그쳤다. 경찰 설득에 농성을 중단하고 내려온 그는 재물손괴 혐의로 입건된 것으로 알려졌다. 

아파트 외벽에 매달려 농성을 하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데 그는 살기 위해 매달렸다. 경찰에 입건된 A씨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기사를 찾아보았지만 사천뉴스라는 지방 인터넷 신문과 오마이뉴스에 농성을 했다는 같은 내용 기사가 실렸을 뿐 어디에도 그의 이야기가 없었다. 그는 과연 체불 임금을 받을 수 있을까? 재물손괴 혐의로 벌금을 많이 내야 할까?

강주룡은 일제시대 때 평양 을밀대에 올라가 농성한 우리나라 최초 고공농성 노동자다. 임금삭감에 항의하며 을밀대에 올라간 그녀 이후 하늘로 올라간 노동자들이 많다. 한진 중공업 김진숙 위원장, 쌍용자동차 노동자, 영남대의료원 해고노동자, 삼성해고노동자... 노동자들이 땅에 발을 붙일 수 없게, 하늘로 올라가게 한 사람은 누굴까? 임금을 주지 않거나 해고한 사장들일까?

아파트 벽에 붉은 페인트로 '노임 주라'라고 쓸 수밖에 없었던 페인트공의 외침. 우리 사회가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노동자들이 하늘 위로 올라가는 일이 반복된다. 강주룡은 "돈을 못받아 굶어 죽으나 파업하다 죽으나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페인트공 A씨도 아파트 벽에 글씨를 쓰다 죽으나 체불임금을 못 받아 죽으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림책 <으아아아>에서 아이는 자신의 울음에 많은 사람들이 뛰어 왔다는 것에 놀라 앞으로 비명 소리를 내며 우는 일을 자제할 것이다. 울음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어떨까. 고공에서 절규하는 노동자들이 왜 '으아아아' 소리 치는지 우리 사회가 귀를 기울이고, 비명의 원인을 찾는다면 더 이상 노동자들이 허공으로 내몰리지 않을 것이다.

A씨의 비명은 동글이처럼 위로받고 싶고 아프다는 표현일텐데 왜 재물손괴로 입건되야만 했는지... 우리 사회는 노동자들의 '으아아아' 비명 소리에 왜 이리 냉담한지 씁쓸하다.

으아아아

길례르미 카르스텐 (지은이), 김영선 (옮긴이),
국민서관, 2020


#그림책 #페인트공 #임금체불 #고공농성 #으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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