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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공대, 둘째는 농대... 박정희가 경북 상주에 미친 영향

[어느 도시인의 고향 탐구] 농촌의 후손들은 왜 전부 다 농촌을 떠났나

등록 2020.10.04 17:45수정 2020.10.0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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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살던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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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상주시 경천대 부근에서 찍은 낙동강의 모습. ⓒ 이희훈


우리 가족은 추석이면 부모님 묘소가 있는 경북 상주에 다녀오곤 했다. 우리 가족뿐 아니라 상주를 뿌리로 둔 친척들도 그랬다. 서울과 수도권에서는 나와 형 가족이, 대구에서는 육촌 형제들이 상주로 향했었다. 

하지만 이번 추석은 고민됐다. 부모님 묘소를 이장한 후 처음 맞는 추석이라 성묘를 하고 싶었는데, 코로나19 여파로 사회적 거리도 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주말 한적한 시간을 틈타 경북 상주에 있는 문중 봉안당에 다녀왔다. 
           
성묘 후 근처에 있는 오촌 아저씨 집을 들러보았다. 비어 있었다. 고향을 지키던 오촌 아저씨가 2017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제 상주에는 친척이 아무도 살지 않는다. 아저씨의 자녀들인 육촌들이 그나마 제일 가까운 혈육인데 그들은 모두 대구에서 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1960년대 초반 우리 가족들이 서울로 이주할 때 상주에 남았던 친척들의 후손 중 현재 상주에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의 모두 서울 아니면 대구, 즉 도시에 산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첫째는 공대, 둘째는 농대... 박정희 시대의 단상

상주에 남은 가장 가까운 친척인 오촌 아저씨는 평생 농촌에서 살았지만 사실 농부는 아니었다. 그는 상주 인근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다 정년퇴직한 교사였다. 1926년생인 아저씨는 사업과 자녀들 공부를 위해 서울로 떠난 열 살 위 사촌 형인 우리 아버지를 많이 따랐다고 했다. 

하지만 조상이 대대로 일군 땅과 그들이 묻힌 선산이 있는 '중동면'을 떠나지는 않았다. 도시로 떠난 우리 아버지 등 일가를 대신해서 고향을 지키는 마음도 있었다고 했다. 

상주는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1970년대에 공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된 주변 지역보다 발전이 더뎠다. 어릴 때 상주 읍내에서 중동면에 가려고 나룻배를 탔던 기억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1982년 '중동교'가 세워지기 전에는 사람은 물론 버스도 '토진 나루'라는 곳에서 커다란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야 했다. 
 

낙동 나루 상주시와 중동면을 이어주던 '토진 나루'도 1982년에 다리가 세워지기 전까지 는 저 모습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 다음 블로거 '한오석'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낙암서원' 문중 봉안당 근처에 있다. 상주는 유교적 전통이 짙게 남아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 강대호


상주 읍내보다 더욱 낙후된 중동면은 1972년에야 전기가 들어왔다. 신식 공부를 했지만, 한학자다운 면모가 있었던 아저씨라도 도시에서 불어오는 산업화와 탈농촌의 바람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자녀들을 서울 상급학교에 보낸 우리 아버지에게도 자극을 받은 아저씨는 아들들을 1960년대 말에 모두 대구로 유학 보낸다. 어쩌면 이 결정이 오촌 아저씨 일가의 미래를 좌우한 중요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73학번인 첫째 아들은 공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당시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이전의 경공업 중심의 개발 계획을 벗어나 중공업 비중을 높이던 기간이었다. 사회 분위기도 공대 진학을 권장했었다고.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전자 회사에 입사해 중간 간부까지 오른 다음 IMF 때 퇴직했다.

76학번인 둘째 아들은 농대를 나와서 경영대학원에 진학했다.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라 공대만큼이나 농대 진학을 권하던 시기였다고. 그는 대기업 금융회사에 들어가 서울과 대구에서 중견 간부로 있다가 정년을 몇 해 앞두고 명예퇴직했다. 79학번인 셋째 아들은 약대를 졸업해서 약사가 되었고 현재 경북 어느 도시에서 약국을 운영한다. 

우리 가족이 서울로 이주한 1960년대와 오촌 아저씨 자녀들이 대구로 유학한 1970년대는 '이촌향도(移村向都)' 현상이 크게 일었던 시기였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지방에 살던 많은 사람이 도시로 이주한 것이다. 

당시 인구 추이가 이 현상을 쉽게 설명한다. 경북 상주의 인구는 1965년 약 26만 명이었는데 1980년에는 약 19만 명이 됐다. 15년 만에 상주는 5분의 1 넘게 인구가 줄어든 것이다. 

상주의 후예들은 더 이상 상주에 없다

줄어든 사람들 대부분이 서울이나 구미 혹은 대구처럼 일자리가 많은 도시로 이주했을 것이다. 특히 대구는 교육 중심지여서 오촌 아저씨 아들들 같은 경북 여러 지방 학생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당연히 인구도 크게 늘었다. 1955년 약 50만 명이었던 대구의 인구는 1970년에 약 1백만 명, 1985년에 약 2백만 명, 2000년에 약 250만 명이 됐다. 

오촌 아저씨는 고향인 상주 인근에서만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도시로 전근할 기회도 있었지만, 조상 대대로 일군 땅과 그들이 묻힌 선산 곁을 떠나진 않았다. 그렇지만 당신 자녀들만큼은 도시로 보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농촌학교의 활성화 실태와 시사점>(2009) 연구에서 이촌향도의 원인을 "경제개발 초기에는 농촌 젊은이가 일자리를 찾아 이촌향도하였으나,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부터는 보다 나은 자녀교육을 위해 도시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라 보았다. 

어쩌면 아저씨가 아들들을 대구로 보낸 것도 좋은 교육 환경에서 공부해 미래에 안정된 직업을 가지게 하려는 포석이었을 것이다. 
 

문중 봉안당 기념비 경상북도 상주에서 400여 년 터 잡고 살아온 할아버지들의 계보가 적혀있다. ⓒ 강대호

 
아저씨 바람처럼 나의 육촌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한 후 안정된 일자리를 얻었다. 취업은 그들을 도시에 정착할 수 있게 한 기본 동력이 됐다. 그리고 도시에서 새로운 가정을 이룬 것은 도시 정착의 두 번째 동력이 됐을 것이다. 자녀들을 키우는 환경은 도시가 지방보다 좋았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태어난 육촌 자녀들은 물론 상주에서 태어난 나의 육촌들도 자연스럽게 도시인이 되어갔다.   

반면 상주 인구는 계속 줄어들었다. 1985년 약 18만 명, 2000년 약 12.4만 명이 됐다. 2019년에는 약 9.9만 명으로 줄어들어 상주시에서 전입을 독려해 10만 명을 넘겨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현재도 10만 명을 넘지 못했나 보다. 

<경북일보> 2020년 9월 12일자 '상주시 인구 10만 명 붕괴... 인구증가 정책 빨간불' 기사는 "상주시의 전입 독려"와 "육아지원금 등 각종 지원금 정책"에도 불구하고 상주 인구가 "지난 8개월 동안 8천여 명" 줄었다고 밝힌다.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이었을까. 이번에 둘러본 상주시와 중동면은 예년보다 더 썰렁해 보였다. 오촌 아저씨의 집이 있는 마을도 많은 집이 비어있는 듯했다. 그 마을은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대대로 터 잡고 살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후손들은 현재 모두 도시에 나가서 살고 있다.

집으로 올라오며 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증조할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상주 읍내로 분가시키지 않았더라도, 혹시나 아버지가 큰 세상을 볼 기회가 없었더라도, 그래서 우리 가족이 그때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더라도, 우리 가족은 어쩌면 상주를 떠나 도시에서 살 방법을 찾았을지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당시 아버지는 알고 있었을까. 서울로의 이주가 우리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들까지도 도시인으로 살게 한 결정적 순간이었다는 것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강대호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어느 도시인의 고향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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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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