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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수교 조약문을 쓴 '이동인 스님'은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자주 독립의 머나먼 여정

등록 2020.10.05 08:20수정 2020.10.05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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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기자말]
* 이 기사는 구한말 조선에 머문 미 해군 중위 조지 클레이턴 포크의 이야기를 사료와 학술 논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전 기사 : 조선이 미국에 보낸 최초의 공한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가 쓴 것]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한국은 지금 완전한 자주독립국가가 되었나요? 나는 일찍이 1880년대에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젊음을 바쳤고 그로 인해 수난을 당했기 때문에 한국의 자주독립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관심도 많고 할 말도 많습니다. 

조선이 실질적으로 자주독립의 첫 걸음을 내디딘 것은 1883년 9월 조선의 특별사절단(보빙사)이 미국을 방문하면서였습니다. 그들이 9월 2일 처음으로 지구 반대편의 미국땅에 발을 들인 일은 실로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동방의 은둔 왕국이 최초로 서양문명과 접속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조선이 당당한 주권국가로서 세계무대에 올랐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이는 푸트(Foote) 초대 주한 미공사가 서울에 부임한 지 며칠 만에 전격 추진된 일이었습니다. 이에 청나라 측은 무척 당황하였고 화를 냈지요. 조선의 자주독립 행보는 그처럼 시작부터 어려움 속에서 극적으로 시도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당시 조선에 씌워진 '속국'의 굴레를 애써 풀어준 나라가 미국이었다는 점에서 한미관계의 첫 출발은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두 나라 관계가 원만히 발전하기만 하면 조선은 필시 근대국가로 일어설 것입니다. 그만큼 조선이 미국에 거는 기대도 컸지요.

나는 바로 한 해 전에 조선땅을 밟았던 최초의 미국인으로서 조선인들의 방미 소식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첫 발을 디딘 것은 내가 부산항에 첫 발을 디딘 지 불과 1년 여 만의 일이었지요.


이제 내 나라 미국 땅에서 조선인들과 만나 동행하며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하지만 이 순간 어떤 조선인 한 명이 나의 가슴 속에 걸려 있습니다. 그를 토해내지 않고서는 아무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군요.

한미 수교 조약문을 직접 쓴 사람
 

한미 수교 100년 기념 우표. ⓒ 국가기록원 화면 캡처

 
이동인(李東仁)이라는 의문 투성이의 스님입니다. 그는 알면 알수록 더욱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어 버리고, 파면 팔수록 더욱 깊은 미궁에 빠지고 마는 그런 인물입니다.

1882년 초 중국 땅에서 한미 수교 조약문 내용을 두고 수 차례에 걸쳐 중국, 미국, 조선이 협상할 때로 돌아가 봅니다. 조선 측 조약문 초안이 있었을 게 아니겠어요? 그것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바로 이동인 스님이었습니다. 조선에서 김윤식이 와 있었는데 그가 이동인의 초안을 가지고 왔다는 말이지요.

이 사실은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조정의 대신이 아니라 승려가 조약 초안을 작성했는지부터가 참으로 야릇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너무 복잡하므로 생략합니다. 여기에선 그의 초안에서 쟁점이 되었던 부분을 주목해보겠습니다. 이 내용이야말로 흥미로운 대목인데 알려지지 않은 것 같군요.

중국 측에서 이동인 안을 훑어 보니,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라는 언급이 없지 않겠어요? 헌데 당시 어떤 상황이었느냐 하면, 중국 측은 기어코 제1조에 '속방'을 규정하려 하고 슈펠트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대치하는 형국이었습니다.

한편, 김윤식은 슈펠트를 직접 대면하지 못했습니다. 이홍장이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이홍장은 김윤식이 국왕의 신임장을 지참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구실로 농간을 부렸지요. 그러다 보니 주된 협상은 이홍장과 슈펠트가 진행하고 중국 측과 조선측은 막후에서 밀담이 오가는 모양새가 되었지요.

슈펠트가 완강하자 이홍장이 계략을 부립니다. 즉, 슈펠트에게 "봐라 당사자인 조선도 '속방'을 원하고 있지 않느냐", 하고 들이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동인 초안을 보니 그 내용이 없었던 거지요. 사실, 김윤식이 중국에 오기 한참 전부터 이홍장은 조선 측에 편지를 보내 사전 정지 작업을 해왔던 터라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종주국' 규정을 조약문에 추가하자고 김윤식을 설득합니다. 어이없게도 김윤식은 쉬이 수용하고 맙니다. 하지만 슈펠트의 입장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홍장의 계략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였지요.

무산 위기를 동반한 지리한 공방 끝에 결국 타협이 이루어집니다. 즉, 조약 문안에는 '속방'을 넣지 않되 조선 국왕이 별도로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라는 어귀가 들어간 편지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중국 측은 고종의 편지 문안을 자기들이 직접 만들어 조선 측에 건네 주었고, 조선 측은 그 내용을 그대로 국왕 명의로 미국 대통령에게 보냈습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요? 거기엔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나 내치와 외교는 자주적으로 한다"는 어귀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 미국은 그 편지를 받아보긴 했으나 아예 무시해 버렸지요. 자주 독립을 향한 조선의 여정이 얼마나 험난한 길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의 단면을 지금 우리는 보고 있는 중입니다.

슈펠트가 이동인 스님의 초안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중국 측이 가로 막고 있었기 때문이죠. 한편, 중국은 조선 측 조약안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견이 있는 부분은 어떻게 해서든 막후에서 조율을 하려고 했지요. 조선이 조약 당사국이니까 그건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헌데 이동인 초안엔 중국 측을 급당황시킨 또 하나의 문제가 들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공사 주재와 통상 문제는 조약 체결 후 5년 후에 다시 논의한다는 구절이었지요. 그렇게 되면 미국 공사의 서울 주재 및 양국 통상활동은 장래를 기약할 수 없게 되어버리겠죠. 이에 놀란 중국 측은 미국이 이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며 철회를 종용합니다. 조선 측은 수용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동인 스님의 의중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속방' 규정을 넣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가 강렬한 자주의식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 전통적인 사대주의에 비추어보더라도 그렇고, 중국에 맞섰다는 점에서도 이는 특기할 만한 일입니다. 물론 조약안은 고종이 인가한 것이지만 고종을 그런 방향으로 움직인 주인공이 바로 이동인이었습니다. 당시 이동인은 오늘날의 용어를 빌면 국왕의 외교특별보좌관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이동인은 왜 '5년 후' 조항을 넣었을까요? 그는 틀림없이 일본이 서양 여러나라와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된 상황을 꿰고 있었을 겁니다. 더구나 신미양요, 병인양요로 인해 이동인은 서양 열강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을 거구요. 그는 우호 조약은 일단 맺어 놓되 시간을 두고 조선의 힘을 충분히 기르면서 준비를 튼튼히 다지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이 대목이 묘미가 있는 게, 일본이 미국의 강박에 대처했던 방식, 즉 대결은 피하면서 시간을 최대한 끌어 그 사이에 자력을 기르고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려 했던 책략을 원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놀랍지 않나요? 이동인이라는 의문의 승려가? 그는 자주의식에 투철했을 뿐 아니라 국제 정세를 꿰뚫고 있던 희귀한 선각자였던 거지요. 내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실제로 타결된 한미 조약은 불평등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이동인의 우려는 기우로 끝났지만 그를 비웃을 수는 없겠지요.

다시 쓰여져야 할지 모를 '이동인론'

실로 야릇한 일은 1882년 초 그의 조약문 초안을 놓고 한중간에 밀담을 벌이고 있을 때엔 그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한 해 전인 1881년 3월에 증발해 버렸으니까요.

바꾸어 말하면, 그의 조약문 초안은 그의 유작이었던 셈입니다. 그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불과 10여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이동인은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죠. 숱한 의혹을 남겨 놓은 채.

어느 날 어디에서 왜 사라졌는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 소문과 추측은 그때도 무성했고 지금도 무성합니다.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그를 처치해 버린 사람은 과연 누구였는가? 그리고 왜? 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그가 고종의 밀명으로 신식 무기 및 군함 구매를 탐색하기 위한 임무를 띠고 일본행을 하려던 참에 암살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 한국 학계의 정설일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 외교관 사토우(Satow)의 일기에는 이동인이 실종된 후 일본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토우가 자금을 마련하여 이동인 구명 운명에 나선 정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록 내용을 같이 보도록 합니다.

어네스트 사토우는 일본내 조선 도공 마을을 탐방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문화
조선인이 만든 도자기 유럽에 팔아 전쟁 준비한 일본
). 그의 일기와 편지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정보가 꽤 들어 있습니다. 이동인의 행적과 정체를 밝혀줄 새로운 정보와 단서도 들어있습니다.
 

어네스트 사토우 26세 ⓒ 요코하마 역사 박물관

     
사토우의 일기와 편지는 애초에 그의 유언에 따라 영국의 공공기록물청 Public Record Office로 보내졌습니다. 오랜 세월 기밀 자료로 숨겨져 있던 이 자료들이 봉인을 풀고 나온 것은 그것들이 쓰여진 지 100여 년이 지나서였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조선인과 만났던 소중한 기록이 들어 있지요. 이동인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이제 접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이동인론은 다시 쓰여져야 할지 모릅니다. 오늘은 우선 이동인이 등장하는 사토우의 첫 번째 일기를 보겠습니다.
 
1880년 5월 12일
오늘 아침 '아사노(朝野)'라고 하는 조선인이 찾아왔다. 헌데 그는 '아사노'란 조선 야만인 "Korean Savage"을 뜻하는데, 동포들을 깨우칠 목적으로 세상 견문을 위해 몰래 건너왔노라고 재치있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의 일본어는 짧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유럽의 건물이나 기계, 기타 놀라운 물건이면 뭐라도 좋으니 그 사진을 구입하고 싶다고 한다. 사진을 가지고 귀국하여 외국문물이 굉장하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님을 동포들에게 확인시켜 주고 싶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영국 방문을 열망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서울 토박이라면서 서울에서는 '츠ch'라고 발음하지 '쯔tz'라고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일요일 아침 다시 오기로 약속했다. (하략) 
(May 12.  Had a visit this morning from a Korean who goes by the name of 朝野 Asano, but w[hi]ch. he wittily explained also to mean Teu-señ Ya-bañ, [Chōsen Yaban 朝鮮野蛮] "Korean Savage", who has come over by stealth to see the world in order to enlighten his countrymen. He spoke only broken Japanese, but we understood each other very well. He wants to buy photographs of European buildings and machinery, and whatever else is most striking, to take back & convince Koreans that the stories about the magnificence of foreign countries are not lies. And desires also to visit England. He says he is a native of the capital, where they pronounce ch and not ts. Promised to come again next Sunday morning. (하략)) 
- Ruxton, Ian. A Diplomat in Japan Part II: The Diaries of Ernest Satow, 1870-1883 . Kindle Edition.
 
이 대목은 드라마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2년 반 전에 조선인 도자마을을 탐방하여 조선인의 인정과 도자예술에 취한 바 있었던 영국 외교관을 어느 날 봄 정체불명의 조선인이 불쑥 찾아온 것입니다.

성도 이름도 밝히지 않고 가명을 쓰는 이 사나이의 정체는 무엇인가? 도대체 그는 어떻게 사토우의 집을 찾아올 수 있었으며 무슨 목적을 품고 있었던가? 일기의 내용은 무슨 뜻이며 행간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그 이야긴 다음 편에서 풀어내 보겠습니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조지 포크 #한미수교 #이동인 #사토우 #슈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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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만남이길 바래 봅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제2의 코리아 여행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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