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가면 쓴' 남녀의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

[리뷰] 운명이 아닌 선택의 영화 <클로저>

20.09.25 17:07최종업데이트20.10.01 09:55
원고료로 응원
운명. 옮길 운에 목숨 명을 쓰는 이 단어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어서 바꿀 수는 없다고 속삭인다. 단어를 발음할 수록 서로 반대되는 감정이 밀려온다. 먼저 그것이 사랑에 대한 찬미일 때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우린 운명이었어." 이 한마디는 모든 아름다움을 응축해 빛보다 더 하얗게 빛난다. 너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사랑에 빠진 것이 모두 저항할 수 없었다는 사실, 그 사실에 의지해 우리의 사랑은 영원할 것 같다.

앨리스(나탈리 포트만)과 다니엘(주드 로)은 길거리에서 운명처럼 만난다. 분주히 지나가는 거리의 사람들 사이로 두 사람이 걸어간다. 그 누구보다 눈에 띄게 빨갛고 짧은 머리를 한 앨리스는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다니엘을 바라본다. 짙은 갈색 곱슬머리 다니엘도 앨리스를 바라본다. 두 사람을 둘러싼 세상은 느리게 흘러가고 서로 주고받는 눈빛만 남는다.
 

<클로저> 스틸컷 ⓒ (주)퍼스트런

 
하지만 <클로저>는 운명의 일면처럼 사랑에 빠진 순간만을 예쁘게 포장한 영화는 아니다. 대신 가면으로 시작해 맨 얼굴을 보게 한다. 다니엘은 관계에 가면을 씌운다. 그는 자신을 찍어준 사진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에게 작업을 걸어 바람을 피우고 있다. 앨리스와 함께 했던 여행에서도 그는 바람 쐬러 간다며 나가서 안나에게 전화를 걸어 제발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애원했다. 한참 뒤에야 가면을 벗고 이 사실을 밝힌다.

한편, 앨리스는 자신의 이름에 가면을 씌운다. 첫 만남에서 미국에서 왔다는 앨리스는 영국 남자 다니엘에게 자신을 '앨리스 에이리스'라고 소개한다. 이 이름은 앨리스가 문득 본, 비석에 적힌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앨리스의 진짜 이름은 '제인 존스'다.

앨리스는 자신을 두고 바람을 피운 다니엘을 떠나 원래 직업인 '스트립 댄서'로 돌아간다. 클럽에서는 실제 자신의 이름을 닉네임으로 쓴다. 제인이 앨리스의 실제 이름이라는 것은 그가 원래 고향인 미국으로 떠날 때 밝혀진다.
 

<클로저> 스틸컷 ⓒ (주)퍼스트런

 
그들은 가면을 쓴 순간부터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다니엘은 "진실이 없다면 짐승"이라고까지 말하며 진실을 원한다. 하지만 앨리스는 그가 원하는 진실을 줄 수 없다. 모든 이야기의 가장 밑에 깔린 거짓을 뽑으면 젠가처럼 모두 무너져 내릴 것을 앨리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을 택하는 대신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다. '제인'으로 살기 위해.

관계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모두 그들이 '선택'한 운명이다.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버렸다는 다니엘의 고백에 앨리스는 "선택권이 없는 숙명"처럼 말하지 말라고, "사랑은 순간의 선택"이라고 한다. 다니엘은 앨리스 말고 다른 사람을 선택했고, 앨리스는 낯선 도시에서 자신의 이름보다는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선택했다.
 

<클로저> 스틸컷 ⓒ (주)퍼스트런


마이크 니콜스 감독은 주인공들에게 종종 첫 단추를 잘못 꿰어 건넨다. 영화 <졸업>(1967)에서 갓 졸업한 벤자민은 동갑내기 일레인의 파티에 놀러가서 그녀의 엄마와 뜨거운 밤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가 일레인을 사랑하게 된다. <클로저>에서는 포스터의 얼굴처럼 인물들이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사랑에 빠지게 된다. 모두 후회해도 이미 꿰어진 단추다.

<졸업>에서는 단추를 풀고 새롭게 다시 꿰기를 택한다. 벤자민은 일레인에게 솔직하게 다가간다. 내쳐지더라도 끝까지 따라가 구애한다. 반면 <클로저>는 단추를 모두 풀고 가볍게 셔츠를 날리는 순간 끝난다. 미국으로 간 앨리스는 수많은 남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걸어간다. 제인인 상태로 당당하게 말이다. <클로저>는 희극이든 비극이든 갖다 붙이는 대로 전부 말이 되는 운명보다는 선택의 힘을 믿는 영화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씨네리와인드에도 게재됩니다.
영화 로맨스영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