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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성해 보이지만 정교하다, 600년 이상 버텨온 다리

[세상을 잇는 다리] 학처럼 고고하고 산처럼 중후한 함평 학교면 고막천 널돌다리

등록 2020.10.14 09:11수정 2020.10.14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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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학교(鶴橋)는 말 그대로 학다리 고장이다. 학교리는 쌍교(雙橋) 마을이 주축이다. 쌍교는 소학다리(小鶴橋)와 대학다리(大鶴橋)를 이르는 지명이다. 학교리 북서쪽은 학의 들판, 즉 학야리(鶴野里)다.

이 마을에도 돌다리가 있었다. 학교리 북측 사가리(四街里)에도 돌다리가 있었다. 함평 학교면은 가히 돌다리의 본고장이었다 할 만하다. 고막천은 이들 동측, 좀 떨어진 곳에서 남북으로 흐르며 함평과 나주를 동서로 가르는 하천이다.


주두(柱頭) 가구법으로 결구된 널돌다리
 

고막천교 전경 앞에 옛 널돌다리가 장방형 인공섬과 잇닿아 있다. 화면 상단에 널돌다리 모양을 흉내낸, 길고 곧은 콘크리트 형교가 보인다. 넓은 고막천을 오로지 옛 널돌다리로만 건넜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게 만드는 모습이다. ⓒ 이영천

 
고막천 널돌다리는 고려 24대 왕 원종 14년(1273년)에 축조되었다 전한다. 2000년 발굴시 탄소 측정으로 확인된 연대는 1450년 전후로 판명되었다. 무안 법천사 고막대사가 신비한 도술을 부려 다리를 만들었다는 전설도 구전되고 있다.

고막천 널돌다리는 길이 20m, 너비 3.5m, 높이 2.5m이다. 하상 펄에 나무말뚝을 촘촘히 박아 지반을 안정화 시켰다. 일종의 말뚝기초다. 말뚝으로 쓴 나무는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등으로 밝혀졌다. 그 위에 지대석을 놓아 교각을 지지했다. 지대석 모양도 제 각각이다. 지대석 주변에는 장방형의 잘 다듬은 돌을 정교하게 깔아 급류에 하상이 세굴 되지 않도록 조치했다.
 

고막천석교의 다양한 교각 모습 지대석의 높낮이 차이와 다양하게 결구된 교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교각 맨 위에 '받침대' 모양의 주두를 얹어 결구시킨 모습이 확연하다. 귀틀돌 사이로 청판석이 삐져 나오도록 결구시킨 모습이 이채롭다.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 교각 결구 모습이 무척 재미나다. ⓒ 이영천

 
다리 하부구조에 많은 공력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교각은 횡으로 3열, 종으로 5열을 설치하였다. 상판은 2열 우물마루로 짜였다. 상판 각 열 청판석 길이가 다르다. 엉성해 보이면서도 무척 정교하며, 배열도 무척 고르다. 다만, 서측 다리가 시작되는 곳 제1경간 상판은 자연석 널돌로 변형되었다. 후대에서 보수·수리하는 과정에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교각 가설 방법이 매우 특이하다. 길고 짧은 4각의 돌들을 얼기설기 포개어 쌓았다. 어느 교각은 돌기둥이 홀로 서 있기도 하다. 짜인 모습들이 다 제각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고하게 600∼750년 이상을 버텨온 것이다. 교각 맨 꼭대기에 '받침돌'을 놓아 멍엣돌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고막천교 상판 전경 후대에 수리하는 과정에서 변형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1경간 자연석 널판돌과, 이어지는 우물마루 상판이 이질적이면서도 조화롭다. 우물마루 청판석 길이가 달라 엉성해 보이나, 실은 매우 정교하다. ⓒ 이영천

 
이는 고려시대 목조건축 특징이 그대로 다리로 이어진 흔적이다. '주두(柱頭, 목조건물에서 기둥 상부에 올려 공포를 구성하는 됫박 모양 네모난 부재)가구법'이라 부르는 결구방식을 돌다리에 응용한 모습이 뚜렷이 보인다. 멍엣돌 길이도 제각각이다. 어느 것은 상판 옆으로 길게 삐져나와 있고, 어느 것은 귀틀돌 가장자리에서 잘려 나갔다.

고막천교에 잇대어, 하천 한가운데 길이 4∼5m의 석축을 쌓아 장방형의 섬을 만들었다. 섬에 잇대어 최근 만든 것으로 보이는, 널돌다리 모양을 흉내낸 콘크리트 형교가 이어져있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모습임에는 분명하다.
 

고막천교 상판 전경 2열 우물마루 상판이 정연하다. 청판석 길이가 다르지만, 매우 정교하게 가설되어 있다. 다리 위에 서면, 꿈쩍도 하지 않는 튼실한 돌다리 위용이 그대로 두 발에 전해져 온다. ⓒ 이영천

 
고려시대에도 고막천 넓이에 맞는 널돌다리가 있었을까? 아니면 하상에 둔덕이나 섬이 있어 지금 보이는 20여m 다리로만 건넜을까? 큰물에 수 없이 물길과 흐름이 바뀌었을 것이다. 다만, 고막천을 건넜을 장대한 다리 모습만은 상상해 볼 수 있다.

긴 널돌다리로 80여m 고막천을 건널 수 있었다면, 그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을까? 학처럼 고고하고 산처럼 중후하지 않았을까? 쉽사리 변해버리기 일쑤인 사람 마음이, 결코 따라갈 수 없는 경지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양성우 시비 함평군립미술관 앞으로 최근 이건된 양성우 시비. 꽃이 피어나는 모양을 형상화 하였다. 비에는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 함평군청

 
함평 학교면은 시인 양성우(梁成祐, 1943∼ )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20대 땐 시인의 시를 읽고, 뛰는 가슴에 치솟는 의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노래로도 만들어진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이란 시는, 반공이데올로그에 찌든 돌 머리에 망치질을 해댔다. 굳어있는 생각을 깨뜨리기엔 제격이었다. 청년이라면 역사를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가를, 시는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다.

고부 배들평야 망망한 벌판에선 조병갑 학정에 치를 떨며 가슴을 쳐대기도 했다. 동진강 어귀 만석보가 헐려나간 자리, 검은색 돌에 새겨진 '만석보'라는 시를 보고 나서다. 그곳을 지나는 이의 발길을 붙들기에 충분하다. 시이며, 역사에 대한 서사적 기록이다. 죽창 들고 봉기에 나서야만 했던 백성들의 절절한 마음이, 시에 눅진하게 녹아들어 있다. 가슴 벅찬 고부봉기 승리와, 백성들 손에 만석보가 헐려나가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만석보 시비 만석보 시비 전북 정읍시 이평면 배들평야 만석보 유허지. 동진강이 시작되는 둑 위에 서 있는 양성우 시인이 쓴 '만석보' 시비다. 대 서사시로 1894년 1월 조병갑 목을 베고자 일어선 고부봉기와 만석보가 헐리게 되는 역사 서사가 긴장과 축약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 이영천

 
아니다. 시인이 피 끓는 젊은 시절을 살아낸 고단했던 길에, 오히려 숙연했었다. 4.19혁명 때인 1960년엔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제적을 당한다. 호남지역에서 고등학생 반독재 연맹을 주도했다는 죄목이었다. 압제의 칼날이 시퍼런 1970년대엔, 몸을 아끼지 않고 반유신·반독재의 맨 앞줄에 시인이 서 있었다.

몇 차례 필화사건도 겪는다. 교직에서 해직 당하고, 영어의 몸이 되기도 한다. 1979년 병보석으로 풀려난다. 1980년 광주에선 시인의 행적이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진 않으나, 어디선가 뭔가에 처절하게 임했으리라 짐작한다.

유신폭압에 맞서 문인들이 결성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를 맡아,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우기도 한다. 19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대변인도 맡았다. 그야말로 펜과 온몸으로 불의와 반칙, 독재와 반동에 처절하게 저항한 시인이었다. 그는 자기 시처럼 시대와 역사가 내린 짐을 당당하게 떠안았다. 문학이 가진 힘과, 현실 실천의 힘을 골고루 겸비한 살아있는 예술가였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1997년 이후 시인의 행적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아니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솔직히 별로 알고 싶지가 않다는 것이 옳은 답일 것이다. 관심이 없어졌다. 미루어 상상하고 짐작할 일이다.

하기야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다른 길에 들어서서 궤변을 늘어놓은 사람이, 시인만은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부지기수였고 지금도 부지기수다. 곡학아세(曲學阿世)요 자기부정이며, 교언영색(巧言令色)이다. 생존해 계시는 시인에게, 나 같은 장삼이사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뭉툭하면서 단단한 고막천 널돌다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학을 닮아 있어 고고하고, 곱게 나이 든 산처럼 중후하기만 하다. 다리 밑으론 맑은 물이 변하지 않고 묵묵히 오늘도 흐르고 있을 뿐이다.
#고막천_널돌다리 #학다리_고장 #고려시대_돌다리 #양성우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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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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