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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훈련 하고 싶다면... 이 오름을 추천합니다

풀숲을 헤쳐 길을 만들어 올라간 제주 체오름

등록 2020.09.24 10:07수정 2020.09.24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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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8일, 금오름나그네들이 오름을 2개나 올랐다. 거친오름을 올라갔고, 뒤이어 그 옆에 있는 체오름에 올랐다. 원래 체오름은 오를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남았고, 바로 옆에 있고, 수월하게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름 사냥꾼들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체오름스카이뷰 체오름이 말굽형 화산체이며 능선 경사가 매우 급함을 알 수 있다. ⓒ 신병철


체오름은 체, 즉 곡식 알갱이를 가려내는 농기구인 키처럼 생긴 데서 유래했다. 한 쪽이 터진 말굽형 오름이다. 분화구 안이 상당히 넓고 평평한 데다가 그를 체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능선이 높고 매우 가파르다. 비고가 117m로 제법 높은 편이다. 우리는 체 바깥 쪽에서 올랐다.


아래에서 보니 올라가는 길이 뚜렷이 보였다. 별로 높아보이지도 않았다. 길을 보고 방향을 잡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잔디같은 부드러운 풀밭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억새, 띠 같은 억센 풀과 국수나무 같은 작은 나무로 덮혀 있었다. 다행히 찔레나무와 망개나무는 드물었다.
 

체오름 올라가는 길 풀술을 뚫고 길을 만들어 올라가야 했다. ⓒ 신병철


거친오름의 험한 길에 혼난 직후에 좋은 길을 기대했는데 여기도 마찬가지다. 요리조리 쉬운 풀숲을 찾아 길을 만들어 가며 올라간다. 뚜렷이 보였던 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누군가 "금오름유격대라 이름 바꿔야겠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때부터 군대에서 유격훈련을 받아 본 남자들이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유격 유격" 한다.

올라가는 풀숲에 꽃들이 아무도 모르게 살짝 피어있다. 연보라색 무릇꽃이 제 철을 만났다. 노랗고 길쭉한 짚신나물꽃도 한창이다. 환상적인 보라빛 잔대꽃도 이쁘기 짝이 없다. 너무나 간간이 나타나 아쉬울 뿐이다. 어떤 것은 연보라, 어떤 것은 진보라색인 이질풀꽃은 새초롭다. 험한 길을 헤치고 나아가는 우리의 불평을 갑자기 나타나 한 방에 날려버린다.
 

야고꽃 억새풀 속에서 기생하는데, 가을에 이쁜 꽃을 피운다. ⓒ 신병철


그러나 이 시기 꽃 중에 최고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억새 속에서 함초롬히 피어 있는 야고꽃일 거다. 야고, 육지에서는 본 적이 없는 특이한 꽃이다. 푸른 색염록소가 없다. 억새에 붙어산다. 이런 걸 기생식물이라 한다.

혹시나 야고 꽃을 볼 수 있을까 유심히 살폈다. 한두송이 씩 피어 있는 건 봤다. 산 중턱 쯤 올랐을 때 여러 송이가 오롯이 모여 피어 있었다. 6송이다. 억새에 뿌리를 박고 발그스레한 꽃을 이쁘게 피었다.
  

체오름전망 전망이 좋다. 웃밤, 알밤, 두개의 봉우리가 닮았다. ⓒ 신병철

 
꽃구경에 유격훈련 같은 등반 부담이 반감했다. 끝내 분화구 능선에 다 올라왔다. 거친오름이 아니라 쉬울 거라 여겼던 체오름에서 땀이 났다고 투덜거린다. 뻥 뚫린 한라산 쪽 전망이 환상적이다. 왼쪽 윗쪽이 웃밤오름이고, 오른쪽 아랫쪽이 알밤오름이다. 두 오름이 닮았다. 밤톨처럼 보였나 보다. 이곳에선 쌍둥이 밤오름이 되었다.
 

체오름능선길 분화구 능선이 좁고 분화구 안쪽 경사가 매우 급하다. ⓒ 신병철

 
능선은 좁다. 분화구 안쪽은 가파른 절벽이다. 좁은 능선 가운데가 길이고, 양쪽으로 나무가 울창하다. 어둡다. 길을 따라 남쪽 정상으로 걷는다. 저 아래 평평한 분화구 안쪽이 얼핏 보인다.

드디어 능선 중에서 가장 높은 정상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은 오름인 듯했다. 나무로 뒤덮혀 사방이 보이지 않았다. 걸어 온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도 없었다. 이때가 되돌아 가야 할 때다.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왼쪽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다. 간간히 철조망에 구멍이 있다. 내려가는 길이 있구나 하고 나가 길을 찾았으나, 못 찾았다. 할 수 없이 왔던 길로 고스란히 되돌아갔다.
 

절굿대 체오름에 유난히 많다. 파르스름한 둥근 꽃이 이쁘다. ⓒ 신병철


내려가는 길에 파르스름한 색 절굿대 꽃을 만났다. 꽃 모양이 절굿대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막 져가고 있었다. 체오름에 유난히 많은 꽃인 것 같다. 절정일 때 절굿대꽃은 정말 이쁜데... 아쉬웠다.


경사가 급하니 내려가는 길 역시 어렵고 미끄러웠다. 아래에서 보였던 길을 또 찾아 보았다. 길은 보이지 않고 비가 많이 오면 생기는 물길이 크게 보였다. 그래서 합의했다. 아래에서 뚜렷이 보인 길은 바로 이 물길이라고.

내려가는 길 왼쪽에 철조망이 쳐져있다. 그 안쪽은 목장이다. 목장 안쪽은 억센 풀이 없어 걷기에 편할 것 같았다. 철조망을 들고 들어가서 내려간다. 편했다. 소들이 뛰어 오더니 빤히 쳐다본다. "아는 사람이 아닌가 벼" 하더니 후다닥 뛰어 가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다 내려왔다.
 

황혼의 한라산 돌아오는 데, 한라산이 황혼으로 물들었다. 황혼도 이렇게 멋있다. ⓒ 신병철


고생고생했으니, 저녁은 푸짐하게 먹어야 된단다. 신산리 포구에서 고등어회를 먹기로 한다. 신산리로 가는 길이 황혼으로 물들고 있었다. 뒤돌아 보니 한라산 하늘이 시뻘겋다. 이런 하늘을 가을에는 자주 본다.

모두가 오랫만에 먹는 고등어회가 맛있단다. 이구동성(異口同聲)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진짜 다른 입으로 같은 소릴 냈다. 오름 등반이 아니라 유격 훈련이었기 때문이리라. 오름에선 금오름유격대였으나, 고등어회와 막걸리 먹을 때서야 금오름나그네가 되었단다. 유격대와 나그네를 넘나 들며 보낸 하루는 정말 알차고 보람찬 하루였다.
#체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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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살고 있습니다. 낚시도 하고 목공도 하고 오름도 올라가고 귤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아참 닭도 수십마리 키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개도 두마리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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