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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살, 의금부에서 국문받아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26회] 노론세력은 정약용 등 개혁인사들을 천주교인이라는 사교집단으로 엮어

등록 2020.09.25 17:39수정 2020.09.25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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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사상가이자 시·서·화에 뛰어난 예술가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 탁월한 사상가이자 시·서·화에 뛰어난 예술가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 ⓒ 다산연구소

 
16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조선사회에서 붕당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사색당쟁으로 확대ㆍ심화되었다.

영ㆍ정조가 탕평책을 폈으나 붕당의 뿌리를 뽑지 못하였다. 당파는 당대뿐만 아니라 자손들까지 이어지고, 서로간에 왕래는 커녕 원수처럼 여겼다. 심지어 여성들의 의복에서도 당색에 따라 달리하였다.

복건을 착용했던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면서 노론은 홑으로 만든 단건(單巾)을, 소론은 겹으로 만든 겹건(袷巾)을 사용해 당색을 표현했는데 일본 덴리(天理)대학 소장의 김창흡(1653~1722) 초상화를 보면 복건의 뒷자락 안쪽이 가장자리 단에 비해 흐리게 표현되어 있어 노론이 착용했던 단건으로 확인된다.

여자의 치마ㆍ저고리 차림새에도 당색이 나타났다. 먼저 저고리의 경우 노론과 소론의 당파에 따른 깃 형태의 차이를 들 수 있는데, 노론가의 깃은 당코의 끝이 움푹 파여 세련된 선으로 된 반면에, 소론가의 깃은 당코를 파지 않고 밖으로 삼각 모양으로 뾰족하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주석 1)


정조는 비밀리에 당파의 수장들에게 어찰(御札)을 보내는 등 정쟁의 관리에 무던히 노력했으나 그의 붕어와 동시에 24년 적공이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노론이 겨냥한 남인세력은 채제공의 죽음으로 중축이 부러진 상태였으나 조정에는 아직 상당한 세력이 남아 있었다.

정약용이 귀향하여 살얼음판을 걷는 심경으로 지내고 있을 때 정순대비가 천주교도를 일망타진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서울에 숨어서 전교활동을 하던 셋째 형 정약종이 먼저 걸려들었다. 이른바 '책롱(冊籠)사건'이다. 그는 당국의 수색이 강화되자 시골로 피신할 요량으로 그동안 보관 중이던 성상과 천주교 서적을 상자에 담아서 솔잎으로 덮어 마치 땔감나무짐처럼 위장하여 사람을 시켜 나르게 하다가 한성부 순찰에게 적발되었다.

상자 속에서는 천주교인끼리 주고받은 편지 등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참새 잡는 그물에 기러기가 걸려든 격이었다. 이 사건은 노론이 남인세력의 뿌리를 뽑는 계기가 되었다. 노론측은 지체하지 않고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 이른바 삼사(三司)를 통해 채제공에게 천주쟁이들을 비롯한 여죄를 물어야 한다고, 이미 죽은 이의 삭탈관직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명분은 그가 천주교도를 비호하는 우두머리라는 것이지만, 목표는 정약용ㆍ이가환ㆍ이승훈 등 살아 있는 정조시대의 중신들이었다. 사헌부는 이 세 사람이 사학의 소굴을 만들고 사학의 뿌리가 되었다고, 의금부에서 국문할 것을 요청하였다.

정약용에게 마침내 의금부의 칼날이 다가왔다. 이제는 정조도, 채제공도 없는 세상의 허허벌판이다. 마흔 살이던 1801년 2월 9일(순조 1년), 정약용은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정약전ㆍ약종 두 형도 함께 투옥되고, 같은 날 이가환ㆍ이승훈ㆍ권철신ㆍ오석충ㆍ홍낙민 등 친지들도 모두 붙잡혔다. 정씨 일족이 폐족의 지경에 내몰리게 되었다.

첫날부터 혹독한 국문이 시작되었다. 천주쟁이인가 아닌가를 실토하고, 연루자들을 대라는 국문이었다. 국문에 참여했던 대사간 신봉조의 상소문에서, 이때의 정황을 살필 수 있다. (『순조실록』, 원년 2월 14일조)

이들 모두 사악한 기운이 뭉쳐 마귀가 재앙내리는 것으로 습관을 이루었으며, 차꼬(죄인의 발목을 채우는 형틀)를 마치 지푸라기처럼 보고, 형벌로 죽는 것도 마치 즐거운 곳에 나가는 것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 단서가 이미 드러났는데도 곤장의 형벌을 참으며 자백하지 않고 사사롭게 주고받은 편지가 적발되었는데도 죽기를 작정하고 저항하여 실토하지 않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이 지극히 흉악한 무리가 있겠습니까.

순조를 둘러싼 노론의 실세들은 이참에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정약용과 그 일당을 처치하고자 하였다. 명분은 '천주쟁이'들을 사교집단으로 몰아 대역죄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조선후기 유학자들은 주자학을 신봉하면서 거대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천주교인들이 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심지어 위패까지 불태운 사건에 대해 적대감이 극도에 이르렀다. 노론세력은 이를 기반으로 정약용 등 개혁인사들을 천주교인이라는 사교집단으로 엮은 것이다.


주석
1> 성기옥, 『조선 후기 지식인의 일상과 문화』, 63쪽,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7.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다산 #정약용평전 #정약용 #책롱사건 #다산정약용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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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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