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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기, 동상으로 본 삶의 전환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는 '대전환의 시대'가 될 것이다] 3편, 이동성에서 안정성으로

등록 2020.09.19 19:33수정 2020.09.19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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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발생한 지 9개월이 넘어가면서 평범한 월급쟁이 일상에도 때로는 참을 수 없는 지루함과 답답함이 찾아온다. 코로나 19에 감염되었거나 이를 치료하는 의료진, 그리고 코로나 19로 영향을 받는 직종에 계신 분들에게는 비할 바 아니나 필자는 이 어려운 시기에 월급을 꼬박꼬박 받으면서도 불편을 느낀다.

사람을 만날 수 없는 것과 집에만 머물러야 하는 것이 불편한 것이다. 일부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보려는 것도 필자의 이런 마음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집에서 혼자 하나님께 예배를 볼 수 있는데도 교회에 나가 함께 예배를 보고 싶은 마음 말이다.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은 인간이 군집 생활하는 생물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욕망이고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옮기고 싶은 것 또한 인간이 동물, 즉 움직이는 생물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당연한 욕망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집에 머무르면서 가족 구성원과 군집 생활을 할 수 있고, 집 밖으로 얼마든지 돌아다닐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갑갑함을 느낄까? 아마 우리가 구석기 시대의 원시인이라면 가족과 군집 생활을 하고 가족과 또는 혼자 이리저리 이동하는 데 제한이 없는 한 별 불편함을 크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산업화가 일어나기 전인 1960년대, 1970년대 이전의 삶에만 머물렀어도 우리의 갑갑증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을지 모른다.

지역에 따라,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1970년대 필자의 어린 시절은 가족이 중심이 되는 삶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는 모두 우리 논밭이라는 같은 일터로 나갔다가 대부분은 같은 날 집에 돌아와서 필자와 필자의 누이들과 어울려 여가도 같이 보냈다. 활달한 큰 누이가 마을 동무들과 즐겨 어울리기도 하고 할머니께서 가끔 마실을 나가기도 하였지만, 삶의 중심은 가족이었고 일도 가족이 함께했고 여가의 대부분도 가족이 함께했다. 

그런데 나이 오십 줄에 고독한 개인주의자를 자처하던 필자가 이 어려운 시국에 갑갑증을 느낀다. 정부의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에서 필자는 과감히 직장동료를 만나는 일을 포기하고 벗을 만나는 즐거움 또한 별 어려움 없이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끝난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는 의외의 불편함을 가져다주었다. 카페에서 커피를 못 마시고, 스포츠 클럽에서 운동을 못 하고, 명상센터에서 명상을 못 하는 것이 이리 불편한 줄 생각을 못 했다.

1970년대 이전이라면 어쩌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닌데 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책을 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고 불편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또 운동을 굳이 차를 몰고 나가 헬스클럽에서 한다는 것도 시답지 않은 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굳이 장 보러 갈 일도 없는데 장터국밥을 먹으로 장을 간다는 것도 별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명상은 뜰 앞의 잣나무에서 하면 될 일인데 필자는 왜 이리 갑갑증을 느끼는 것일까?

필자의 갑갑증은 문화적이다. 교인들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안 드리고도 문화 전통과 관련이 있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밈(meme)'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었다. '밈', 또는 쉽게 얘기해서 우리 뇌리에 박힌 문화 전통은 우리의 행동 양식, 사고 양식을 지배한다.

현재 우리 사회의 '밈' 또는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우리 주변의 조각물을 살펴도 우리 현대문명이나 문화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쉽사리 알 수 있다. 
  

사진 1 서울 시내의 조각상 ⓒ 박호진

  

사진 2 서울시내의 조각상 ⓒ 박호진

  

사진 3 서울 시내의 조각상 ⓒ 박호진

 
이 사진들은 필자가 서울 시내에서 무작위로 찍은 조각상들의 모습이다. 이를 세종로에 있는 이순신 상과 비교해 보자.

사진1, 2, 3의 조각상들이 이동성(mobility)과 역동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상대적으로 이순신 상은 안정적(stable)이다. 세종로의 세종대왕상이나 위안부 소녀상을 제외하고는 최근에 서울 시내는 물론 국내에 조각된 조각상들 대부분은 이동성(mobility)과 역동성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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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동상. ⓒ 권우성

  
이른바 현대성(modernity)의 주요 키워드는 이동성(mobility)과 역동성이다. 필자의 어머니는 1960년대 도시에서 시골로 시집와서 시골의 갑갑함, 그러니까 정주성을 혐오하셨다. 필자도 어릴 적에 우리의 이순신상은 서구의 세련되고 역동적인 조각상에 비해 촌스럽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 필자의 어머니는 그 갑갑한 시골에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필자도 너무나 유동적이고 사진3처럼 불안정한 현재의 삶에 지쳐있다. 그렇다면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이동성, 유동성, 역동성에 지쳐있는 인류의 무의식을 읽어내어 출현한 것일까? 물론 아닐 것이다.

인류는 동물이지만 언제나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움직일 때와 머무를 때가 있다. 인류의 움직임(mobility)을 주목하는 문화 전통은 인간의 모습 속에서 호랑이, 사자, 곰, 독수리 등을 본다. 반대로 조선 시대의 선비처럼 인류의 움직이지 않음(stability)에 주목하는 문화 전통은 인류에게서 매, 난, 국, 죽, 또는 돌과 꽃들의 모습을 본다.
또 인류의 마음속에는 무리 지어 함께 살고 싶어 하는 마음과 동시에 나 홀로 호젓이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이 공존해 왔다.

성서에서 말하는 바벨탑의 이야기는 신앙인들에게는 신벌로 이해가 되겠지만 사실상, 이 이야기는 인간의 이중적인 속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즉 이 이야기는 함께 모여 살기, 즉, 도시화와 문명화를 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함께 모여 사는 불편함과 흩어져서 제각기 살고 싶은 인간의 이중적인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18세기, 19세기 유럽의 목가 시인들은 호젓한 전원생활을 꿈꾸며 노래하였고 2,500년 전의 노자는 지금의 기준으로서는 별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당시의 기술과 문명을 멀리할 것을 가르쳤다.

도회에서는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기적인' 개체들이 모이면서 교환이 일어난다. 그것이 물물교환이든 정신적 교환이든 세균의 교환이든 말이다. 성서에서 도시를 창녀에 비교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도시에서는 간혹 바람직하지 않은 '더러운' 교환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럽다'라는 것은 반드시 위생적으로 '더럽다'라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부정적(不正的)인 교환이 자주 일어난다는 뜻이다. 전염병학자들이 지적하듯 중세 흑사병 전파경로와 상인들의 교역 루트는 상당 부분 일치한다. 현재 코로나 19의 전파도 교역의 허브인 도시를 중심으로 발생하고 있다.

그렇다고 인류가 이제 노자의 가르침이나 18세기, 19세기 어느 전원시인의 꿈대로 반(反)문명적인 목가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강박적으로 이동성과 역동성, 만남, 소통을 강조하는 "밈"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현재 인류를 지배하는 "밈" 아래에서 인류의 무의식 일부는 안정성을 갈구하고 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의 꿈의 직장은 공무원이며, 자영업자들의 꿈은 월급은 적더라도 고정적인 수입을 원하고 있다. 전 세계를 주름잡던 미국인과 영국인들도 그저 자기 울타리 안에서의 행복한 삶을 바라고 있다.'

이동성(mobility), 역동성, 만남, 소통이 나쁜 것이 아니다. 인류는 예나 지금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키워드를 강조하기도 하고 소홀히 여기기도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문제는 이동성, 역동성, 만남, 소통을 지상의 선으로 생각하는 "밈"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만나고 소통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70억 인류가 하나의 몸을 가졌다고 생각해보자. 끔찍하지 않은가? 몸은 떨어져 있되 마음만은 하나가 되면 어떨까? 70억 인류의 마음이 모두 하나가 되는 것도 역시 끔찍한 상황일 것이다. 그리고 마음과 몸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하나라면 그것은 빅뱅 이전의 상황일 테고 이동성, 역동성, 만남, 소통이라는 단어는 쓸데없는 말이 된다.

필자는 이동성(mobility), 역동성, 만남, 소통을 중지하라는 것이 아니다. 코로나 19와는 별개로 이동성(mobility), 역동성, 만남, 소통을 적정수준에서 안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기적인' 개체 간에는 거리가 있어야 한다. 거리가 있고 각 개체가 안정화 되어있어야 이동, 만남, 소통이 가능하고 두 개체 간의 관계가 역동적이고 상호적일 수 있다. 두 개체 또는 세 개체, 또는 집단 내 또는 집단 간 안정화를 깨는 소통 또는 이동은 아니 함만 못할지 모른다.

*참고: 영어의 'mobility'는 이동성 또는 유동성을 의미하는데 이글에서는 이동성으로 번역하였다.

[관련 기사]
①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는 '대전환의 시대'가 될 것이다 http://omn.kr/1nh1v
②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정의하기 전에 따져야 할 것 http://omn.kr/1opm1
덧붙이는 글 한국외대 중남미연구소 '21세기 문명전환의 플랫폼, 라틴아메리카, 산업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웹진에 연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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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국립대 중남미 지역학 박사학위 소지자로 상기 대학 스페인어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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