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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살 학생 수백 회 강간… 이런 일 가능했던 이유

[그 코치 봐준 그 판결 ②] 지도자·미성년자 학생 관계에서 발생하는 '그루밍 성폭행'

등록 2020.09.22 07:21수정 2020.09.2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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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폭력·성폭력 문제는 그 심각성에 비해 우리 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19년 심석희 선수의 성폭력 피해 폭로, 올해 최숙현 선수의 죽음을 거치며 스포츠 폭력·성폭력 문제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오마이뉴스>는 최근 20년 동안의 스포츠 폭력·성폭력 판결문 163건을 입수해 분석했다. 판결문에 담긴 사건의 심각성·특수성, 법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른 양형사유 등을 여러 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이 기사는 그 두번째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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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 연합뉴스

  
피고인은 2005년 2월경부터 (중략)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피해자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아 매주 4~5회가량 지속적으로 간음하여 2009년 3월경까지 수백 회에 걸쳐 피해자를 위력으로 간음한 자로서 재범의 위험성이 있다.
 
2009년 9월 대구지방법원 1심 재판부(재판장 임상기) 판결문 내용이다. 여기서 피고인은 30대 남성이었고, 피해자는 첫 피해 당시 11세, 12세, 15세였던 여학생들이었다. 어린 여러 학생을 성적 노리개로 삼는 참혹한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판결문의 범죄사실을 살펴보자.
 
평소 잦은 폭행으로 겁을 먹고 있는 피해자에게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피해자의 하의를 강제적으로 벗겨내고…
수시로 피해자를 폭행하여 피해자의 고막을 파열시켰다.

재판부는 상습적인 폭행을 이 사건의 배경으로 판단했다. 30대 남자 태권도 관장의 무자비한 폭력에 어린 여학생들은 저항하기 어려웠던 셈이다.

재판부는 관장의 지위에도 주목했다. 아래는 양형 이유에 나오는 대목이다.
 
피고인은 태권도장의 관장으로서 관원들을 교육하고 보호하여야 할 지위에 있었음에도 피해자들이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것을 이용하여 아직 채 성장하지 않은 피해자들을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위한 노리개로 삼아 장기간에 걸쳐 피해자들의 정신과 신체를 지속적, 반복적으로 유린하여 왔다.
 
'그루밍(길들이기) 성폭력'이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스포츠계, 특히 생활 체육에서 발생한 성폭력은 그루밍 성폭력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태권도장이 돌봄 기관의 역할을 하는 최근의 상황에 비춰보면, 태권도장 관장은 자신에게 의지하는 미성년자인 학생들을 정신적으로 길들이기 쉽다.

그루밍 성폭력 사건의 또 다른 특징은 피해자 동의를 받고 성관계를 맺었다는 피고인 주장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였지만, 재판부는 피고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고인은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보낸 편지, 이메일 등을 내세우며 피해자가 피고인을 좋아하여 자발적으로 성교에 응하기도 하였다고 주장하나, 피해자는 아직 정상적인 가치관과 성적 정체성이 확립되기도 전인 11세의 어린 나이에 피고인에게 강간을 당한 이후에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폭행, 강간을 당하는 과정에서 피고인과의 관계에 대하여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보일 뿐, 피해자가 진심으로 피고인을 좋아하는 마음에 피고인과의 성교에 응하였다고 보이지 않으므로…
 
1심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징역 10년, 위치추적 전자장치(전자발찌) 10년 부착을 선고했다. 피고인이 여기에 불복했지만, 항소심(2심)과 대법원 모두 피고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 현직 지방법원 판사는 <오마이뉴스>에 "태권도장이라는 생활공동체에서 사범은 아이들에게 부모님을 대체하거나 우상 같은 역할을 한다"면서 "초등학생 등을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의 경우, 범죄를 은폐하기 쉽고 학생들도 성범죄라고 인식을 못 하기 때문에 그루밍에 최적화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모 도움 받지 못하는 어린 선수가 타깃

엘리트 체육에서도 폭력과 그루밍을 동반한 성폭력 사건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11년 12월 수원지방법원 1심 재판부(재판장 위현석)는 경기도 용인시의 한 초등학교 축구부 감독 임아무개(50)씨에게 징역 9년, 8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 등을 선고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2007~2008년, 2010~2011년 40대 임씨는 초등학교 축구부 선수를 장기간에 걸쳐 성폭행했다.

임씨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데에는 40대 축구부 남자 감독과 초등학교 여자 선수라는 절대적인 권력 관계가 있었다. 판결문에는 상습적인 폭행, 진학 문제에 대한 영향력, 합숙으로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 등 스포츠 성폭력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피고인은 2007년 가을경 유일한 여자선수인 위 초등학교 5학년 아동인 피해자에게 욕정을 품고, 선수들을 때리면서 훈련시키는 피고인을 무서워하는 피해자를 그때부터 2008년경까지 축구부 숙소, 피고인의 차 안 등에서 지속적으로 성폭행하여 왔고, 계속하여 피해자가 중학교로 진학한 이후에도 몸이 불편한 아버지 외에 달리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 피해자가 울산에 있는 여자 프로팀 ◯◯중학교로 진학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피해자에게 매월 5만 원씩 용돈을 주는 방법으로 피해자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피해자가 용인으로 돌아온 2010. 8.경부터 2011. 7.경까지 지속적으로 피해자를 성폭행하여 다음과 같이 범행하였다.

임씨는 가정 형편이 어렵고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선수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 또한 스포츠 성폭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가족들로부터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피해자(모친은 사망, 부친은 알코올 의존증으로 경제활동 의사와 능력이 없음)를 장기간에 걸쳐 위력으로 간음하거나 추행한 것으로 그 죄질이 매우 좋지 않은 점…
 
이은의 변호사는 "스포츠 성폭행 피해자 가운데는 부모가 경제적으로 힘들어 신경을 못 써주는 상황에 놓은 아이들이 많다"면서 "지도자는 이런 아이들을 죽일 만큼 때려 아이의 심신을 장악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감형 이유 "사귀어서..."
  
법원은 최근 그루밍 성폭력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눈에 띈다. 춘천지방법원 1심 재판부(재판장 박이규)는 2015~2017년 어린 여학생들을 상대로 성폭력을 저지른 춘천의 한 태권도장 관장에게 징역 9년을 선고했다. 피고인은 "형이 너무 무겁다"면서 항소했다. 

2심 서울고등법원 춘천재판부(재판장 김복형)는 피고인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징역 9년을 징역 7년으로 깎아줬다.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양형 사유로 피고인과 피해자가 사귀었다는 점을 들었다.
 
피고인이 피해자들과 나눈 메시지 대화 등을 보면 특히 피해자 I, M의 경우 피고인을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고 피해자 M은 피고인과 정식으로 사귀기도 한 점, 피해자 I, M이 피고인을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마음이 아직 가치관이나 인격이 정립되지 않았고 사리분별력이 약한 미성년자의 어린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위 피해자들은 당시 13세 이상이었고....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2019년 <스포츠 분야 성폭력/폭력 사건 판례분석 및 구제방안 연구> 보고서에서 "최근에는 그루밍에 대한 심각성이 알려지고 있고,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여 피해자가 피고인을 이성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가졌다거나 정식으로 사귀었다는 상황을 유리한 정상으로 고려하는데 신중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 [그 코치 봐준 그 판결] 특별기획 바로가기 (http://omn.kr/1oz56)
#그 코치 봐준 그 판결 #그루밍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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