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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신민서사 새긴 비석을 밟고 지나가시오

[세상을 잇는 다리] 역경과 굴욕을 이겨내고 우뚝 선 옥천의 두 청석교

등록 2020.09.30 14:49수정 2020.09.3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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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군북면 증약리에 찰방이 있었다. 충청도 6개 역참 중 하나인 청주 율봉도(栗峰道) 역참에 속한 찰방이었다. 영남지방과 충청, 한양을 연결하는 군사와 교통, 우편 중계소였다. 그래서 찰방을 다른 말로 '우역(郵驛)'이라 부르기도 한다. 증약리는 이처럼 교통과 통신, 행정, 군사의 요충지였다. 영남에서 추풍령을 넘어 이곳을 지나야만 천안, 한양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증약리 청석교
 

증약리 청석교 신라 문무왕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널돌다리다. 경간이 일정치 않고, 상판을 길고 넓적한 자연석 널돌을 거치하여 만들었다. 지대석과 교각, 교각과 멍엣돌 결구가 정밀하다. 지금은 장계유원지로 이건되어 보존 중이다. ⓒ 이영천

 
청석교는 금강 지류인 서화천, 그 지류인 증약리 개천에 있었다. 청석교가 있던 자리로 경부선 철도가 지나고 있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 경부고속도로가 나란히 지나간다. 지리적 이점으로 형성된 교통 요충지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만, 증약리는 교통수단 발달이 지역을 쇠락시켜버린 경우에 해당한다. 찰방이 있던 곳에 지금은 기차역도 고속도로 나들목도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 왕래가 줄어들어 지역이 쇠락했다는 의미다.

청석교 운명도 증약리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경부선 증약역이 1974년 8월 15일 폐역 된다. 경부선 노선개량 등으로 청석교를 당초 자리에서 하류 100m지점으로 이건 시킨다. 1989년에 찍은 사진을 보면 본래 모습을 많이 잃은 모습이다. 이건 된 곳은 처음 있던 자리보다 하천이 넓었나 보다.
 

1989년 증약 청석교 모습 본래 자리에서 경부선 철도 선형개량 등 이유로 하류 100m 지점으로 이건 된 모습이다. 1989년 12월 눈보라 속에서 쵤영된 사진이다. 사진 오른쪽 하단에 교대가 석축처럼 쌓여 교각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옆으로 콘크리트 형교가 엉성하게 잇대어 있다. ⓒ 옥천군청

  

증약 청석교 세부 다리 한가운데 경간이 양 옆 보다 좁다. 멍엣돌 아래에 홈을 파내, 교각과 결구시킨 모습을 자세히 확인 할 수있다. 그 위에 검은 색 자연석 널돌을 얹어 상판으로 삼았다. ⓒ 이영천

 
이건하면서 교대를 엉성하게 쌓아올려 교각 역할을 하도록 만든 모습을 볼 수 있다. 교대가 교각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거기에 임시로 콘크리트 형교(桁橋)를 이어 붙였다. 짚신 신고 양복 입은 어정쩡한 모양새다. 그마저 홍수 때 파괴되어, 현재 자리로 다시 이건 되었다.

정확한 연대는 미상이나, 청석교는 신라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길이 9.83m에 높이 1.75m, 너비 2.2m로 당시 기술 수준에 견주어 비교적 규모가 있는 다리다. 서화천 지류 상류 증약마을 초입, 물이 회돌이 하는 지점에 있었다. 하천 양쪽에 돌로 단단한 석축을 쌓았다.

석축 맨 위에 큰 돌을 잘 다듬고 가로질러 교대로 삼았다. 하천 바닥은 적심을 하고, 그 위에 긴 장대석을 놓아 지대석으로 삼았다. 지대석 위에 2×2열의 교각을 세웠다. 경간이 일정치 않고 교각이 다리 가운데 모인 형상이나, 그리 어색해 보이진 않는다.
 

청석교 상판 넓적하고 긴 널돌 6개를 가장자리에 거치하였다. 널돌 사이는 화강암을 다듬어 틈새를 메워 상판을 완성하였다. ⓒ 이영천

 
멍엣돌은 교각 넓이보다 길게 하여 상판 밖으로 돌출시켰다. 멍엣돌 아랫부분을 파내어 교각과 결구시켰다. 이곳에 상판인 널판 돌을 걸었다. 귀틀돌을 얹지 않고 바로 상판을 놓아 지탱시킨 특이한 구조다.

넓고 긴 널판 돌은 양 가장자리에 열을 맞춰 총 6개를 놓았다. 널판 돌 사이 벌어진 틈새에 화강암을 다듬어 끼워 넣어 상판을 완성하였다. 교대의 튼튼함과 교각과 멍엣돌의 단단한 결구가 1300년 이상을 버텨낸 힘이 된 널돌다리다. 현재는 안내면 장계리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또하나의 청석교
 

청석교 상판(정지용 생가) 시인의 생가에서 문학관으로 나가는 담에 사립문을 달았다. 그 앞으로 실개천이 흐르게 하고, 그 위에 황국신민서사비로 썼다는 널돌을 뒤집어 얹어 다리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무시로 비석으로 사용한 이 널돌을 밟고 지나도록 했다. ⓒ 이영천

 
옥천에는 또 하나의 청석교가 있다. 복원된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 생가에 있는 통 널판 돌다리다. 일제강점기 시인 고향에 있는 죽향초등학교 교정에 '황국신민서사 비'로 세워졌다는 널돌이다.

시인 생가 뒤 문학관으로 나가는 길목에 작은 개울을 만들었다. 이 널돌을 뒤집어 개울 위에 얹어 '청석교 상판'이라 이름 하였다. 어린 학생들이 아침 조회시간마다 외워야했던 황국신민서사가 새겨진 널돌을, 지금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정지용 시인은 향토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빛나는 서정시를 많이 남겼다. 대표적으로 모든 국민이 몇 구절은 외우고 있는 '향수'라는 시가 있다. 노래로도 만들어져 아직도 즐겨 부른다. 주옥같은 시어에 아련한 추억을 자극하는, 잊힌 고향에 대한 정서를 잘 담아냈다. 시인은 현대시 개척자로 혹은 현대시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킨 시인으로 칭송받는다.

시인 추천으로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등 청록파 쟁쟁한 시인들이 등단하기도 했다. 우리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시인들이다. 하지만 정지용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사람들 기억에서 잊히거나 지워져 있었다. 좌익계 문학인으로 6.25때 월북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시인은 자기 자신 스스로를 무척 부끄럽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으로 인식한 듯하다. 시인은 1942년 2월 친일문학지인 <국민문학> 4호에 '이토(異土)'라는 시를 발표한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찬양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직후다. 시인은 이 시를 발표하고선 곧바로 은거해 버린다. 그동안 활발하게 활동하던 모든 일을 접는다. 아마 스스로에게 절필을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해방 후 '조선시의 반성'이란 글을 통해 이때의 잘못을 고백한다. "친일(親日)도 배일(排日)도 못한 나는 산수(山水)에 숨지도 못하고, 들에서 호미도 잡지 못하였다"는 내용이다. 참으로 수줍고 부끄러우면서,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다.

식민지를 살아낸 무기력했던 보편적인 지식인의 모습이 엿보인다. 친일문학 선봉에 섰으면서 '종천순일(從天順日)'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은 미당 서정주와 비교해 보라. 사물에 대한 인식, 역사를 대하는 자세와 태도, 스스로 반성하는 모습 등 모든 게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보인다.

기억에서 거세되었던 시인
 

청석교 상판(정지용 생가) 복원된 시인 생가 뒤 문학관으로 통하는 곳에 놓인 청석교 상판이 곰솔 사이에 놓여 있다. 일제 강점기 죽향초등학교에서 '황국신민서사 비'로 사용한 널돌이다. 황국신민서사는 다 지워내고, 널돌을 뒤집어 작은 실개천에 얹었다. 무시로 사람들이 밟고 지나도록 만들었다. ⓒ 이영천

 
시인은 해방이 되어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는다. 마지못해 '조선문학가동맹' 같은 좌익계열 문학단체에 이름을 올리나, 실제 활동 대신 은거하는 길을 택한다. 심지어 교편을 잡고 있던 이화여대에서도 사임하고 은거의 길에 들어선다.

1949년 6월 강압적인 억압에 못 이겨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여기저기 강연에 끌려 다닌다. 여린 시인의 감성에 얼마나 큰 상처였을까? 당시 신문은 시인이 자진하여 가입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김기림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보도연맹 소속 좌익문인이라는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시인은 인공치하에서 석방된 것으로 보인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지자, 역시 반강제로 북한으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길에서 미군 전투기 기총소사에 생을 마감하였다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이다. 동두천 소요산 부근이다. 같이 길을 걷던 소설가 석인해의 목격담이 1993년 북한 '통일신보'에 실렸다. 날짜는 1950년 9월 21일 경으로 추정한다.

시인의 주옥같은 작품에도 불구하고, 1988년이 되어서야 해금 되었다. 지금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향수'같은 시들조차, 반공(反共)을 이유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철저히 거세당해야 했다. 왜곡된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생각과 감성까지 지배하려 했던 시절이다. 여기에 예술과 문학은 철저히 하위개념으로 전락한 야만의 시절이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감성을, 이데올로기를 들이대 막고 가르면 과연 재단된다고 믿었던 것일까?

시인의 집 뒷마당엔 지금도 졸졸졸 실개천이 흐르고, 사람들은 황국신민서사가 새겨졌던 청석교 상판을 밟고 다닌다. 시인이 노래한 아름다운 시어들이, 옛이야기 마냥 지줄대며 아직도 세상으로 회돌아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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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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