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7 07:43최종 업데이트 20.09.17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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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 육군훈련소 가족면회가 13년 만에 재개된 2011년 5월 4일 한 훈련병이 고개를 돌려 면회를 온 가족을 찾고 있다. ⓒ 연합뉴스

 
2019년 12월 '현역병 등의 건강보험 요양에 관한 훈령'이 개정되어 질병을 사유로 하는 현역병의 청원 휴가(이하 '병가') 제도가 대폭 손질되었다. 국방부가 추진 중인 '군 의료체계 개선 계획'의 일환이었다.

현역병 등의 건강보험 요양에 관한 훈령은 현역병의 민간 의료시설 요양에 관한 세부 사항을 규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방부 훈령이다. 병사는 군 의료시설에서 무상으로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다달이 내야 하는 국민건강보험료 납입 의무가 없고, 보험료를 내지 않으니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라 입대와 동시에 보험급여도 정지된다.


대신 병사들이 민간 의료시설을 이용할 때 발생하는 보험급여 소요는 국방부가 건강보험공단에 납입한다. 병사들은 민간인과 마찬가지로 자부담 비용만 납부하면 된다. 이처럼 현역병이 민간 의료시설을 이용하면 국방 예산 지출 소요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제반 사항을 규정할 목적으로 훈령이 마련된 것이다.

개정 전 훈령에 따르면 현역병의 병가는 군의관의 진단에 따라 민간 의료시설에서 군 복무 중 최대 30일을 사용할 수 있었다. 진료·검사·약제·입원 모두 가능했다. 입원할 때만 병가를 나갈 수 있다는 일반의 인식은 일선 부대에서 해당 규정을 잘못 이해해서 생긴 흔한 오해였다.

그런데 개정된 훈령에 따르면 ▲지휘관은 군의관뿐 아니라 민간인 의사가 내린 진단·소견으로도 병가를 허가할 수 있고 ▲병가는 입원 목적으로만 허가할 수 있고, 외래 진료·검사·약제 목적인 경우 법령이 정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가할 수 없게 되었다.

우선, 민간인 의사의 진단·소견에 따라 병가를 허락할 수 있게 된 것은 진일보한 조처다. 이전까지는 민간인 의사가 병사에게 진단·소견을 내리면 군 의료시설에서 군의관에게 같은 내용으로 또 진단을 받아야 병가를 허가받을 수 있었다. 민간인 의사나 군의관이나 다 똑같은 의사인데 같은 내용의 진단을 중복으로 받아야 병가의 타당성을 인정해 준 셈이니 불필요한 절차가 아닐 수 없었다.

권리 하나 주면서 다른 권리 회수

문제는 병가의 대상이 되는 의료 행위를 입원으로 한정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는 진료 외출 제도가 새롭게 도입된 것도 한몫했다. 진료 외출은 병사가 민간 의료시설 이용을 희망하면 평일 일과 시간에도 지휘관 허가 하에 부대 밖으로 외출해 진료를 보고 올 수 있는 제도다. 원래 부대 밖 병원을 가려면 매번 복잡한 휴가 승인 절차를 거쳐야 했는데, 지휘관이 외출증만 끊어주면 간편하게 다녀올 수 있게끔 바뀐 것이다. 병사의 민간 의료 접근권이 높아졌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변화다.

그러나 진료 외출 제도 도입이 병가의 제한으로 이어진 것은 이상한 일이다. 권리를 하나 새로 부여하고, 다른 하나는 도로 회수한 셈이다. 이 때문에 병사들은 정당하게 병가를 사용할 기회를 과도히 제한 당하게 되었다.

2018년 국방부가 마련한 '군 의료 시스템 개편안'에 따르면 2017년 기준 군 의료시설을 찾는 환자의 97%는 감기·염좌 수준의 경증 환자다. 중증 환자는 3%도 안 된다. 그나마 상급병원 구색을 갖추고 있는 국군수도병원도 중증 환자 비율은 5%를 넘지 않는다. 민간 상급병원의 중증 환자 비율이 18%인 것을 감안하면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

반면 민간 의료시설을 찾은 병사 중 의원급 병원에서 치료 가능한 질환의 경증 환자는 70% 정도였다. 민간 의료시설 이용자와 군 의료시설 이용자의 비율이 약 5:5인 점을 고려할 때 중증 질환을 앓는 병사들은 군 의료시설보다 민간 의료시설을 많이 찾는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병사의 민간 의료시설 이용 제도 개선은 동네 병원을 가는 병사보다는 큰 병원에 가는 병사들에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런데 민간 의료시설 이용 목적의 병가를 입원에 한정해 버렸으니 밖으로 나가 진료를 봐야 하는 병사들은 하루 만에 병원을 방문해 진료를 받고 부대로 복귀해야 하는 상황이다.

상당수의 군부대가 도시에서 뚝 떨어진 곳에 있다. 경증 질환으로 동네 의원급 시설을 찾는 환자야 별 상관없겠으나, 큰 병원을 가야 하는 환자들은 산 넘고 물 건너 여러 시간을 이동해야 한다. 아파서 병원 다니는 사람 처지에서 진료받으러 가는 길이 도리어 고역이 된 셈이다. 이 때문에 훈령이 개정된 뒤로 멀리 병원을 다녀야 하는 병사들은 개인 연가를 사용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휴가를 다녀오곤 한다.

'병사의 병은 꾀병'이라는 편견

국방부가 진료 외출을 도입하면서 병가 요건을 강화한 것은 우리 군의 기저에 깔린 '환자'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 바탕 한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병가 제도 운용은 병사에 대한 불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병사의 병은 아마 꾀병일 것이라는 기본적인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병가를 허가할 때에도 민간 병원의 진단서·소견서를 믿지 않고 군의관의 진단을 중복해서 받게 한 것이고, 병가 제도 개편의 이유가 병가를 악용하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말을 훈령개정 이유란에 버젓이 써놓은 것이다. 꾀병 우려는 군이 병사의 민간 의료시설 이용과 관련한 제도를 설계할 때마다 단골로 나오는 검토사항이기도 하다. 진료 외출 제도도 도입 직전까지 이를 악용할까 걱정하는 일선 지휘관이 많았다는 후문이다.

60만 대군에 꾀병 환자가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일부의 꾀병 환자를 이유로 전체 환자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군에서 발생한 진료권 침해 사건은 대부분 이런 인식이 낳은 뼈아픈 산물들이었다.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군 의료관리체계에 대한 인권상황 실태조사'는 '아픈데 아프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을 군 의료관리체계의 핵심 문제로 꼽았다. 아픈데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 극한으로 가면 사람이 죽는다.

2011년에는 훈련병 한 명이 중이염을 앓다가 군의관에게 상급병원 진료를 요청하자 군의관이 꾀병을 피운다며 의무병을 시켜 훈련병을 끌어낸 일이 있었다. 이 훈련병은 생활관으로 돌아가 목숨을 끊었다. 아파도 꾹 참다 병을 키워 목숨을 잃거나 장애를 얻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2011년에 연달아 세 명의 훈련병이 육군훈련소에서 병을 앓다 사망한 뒤로 국방부가 여러 가지 제도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일선 간부들의 인식구조는 여전히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픈 사람이 병가를 나가는 일이 소위 '꿀 빠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 역시 우리 군이 아픈 사람을 대하는 그릇된 태도에서 비롯된 위험한 발상이다.

병가 휴가, 개념과 목적부터 달라

병가 제도는 아픈 사람이 잘 치료 받고 충분히 회복하여 임무에 정상적으로 복귀할 수 있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 때문에 누구나 동등한 조건에서 누려야 할 여타의 휴가 제도와는 달리 제도의 핵심이 공정성에 있지 않다. 병가는 위로휴가나 포상휴가와는 개념과 목적이 전혀 다르다. 제도의 초점을 꾀병이나 편법을 쓰려는 사람을 막는 데 두어서는 안 되고, 장벽을 낮춰 아픈 사람이 필요에 따라 신속하게 어려움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데 두는 것이 당연하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우는 일이 없게끔 설계해야 하는 것이 환자의 의료권 보장 문제다. 그러나 군은 늘 빈대 잡는 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이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에 참석해 정경두 국방부 장관에게 질의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최근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을 향한 여러 의혹으로 병사의 병가 제도가 화제다. 지난 15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정경두 국방부 장관에게 병가를 원하는 만큼 사용하지 못한 병사들의 제보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 일병(추 장관 아들)이 받은 혜택을 똑같이 못 누린 병사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지금 그 병사들과 그 부모님이 왜 우리는 서 일병과 똑같은 혜택을 못 받고 차별받고 불이익을 받았냐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국민 중의 압도적 다수입니다. 불이익을 받은 국민이 압도적 다수이고 혜택을 받은 사람이 서 일병 한 사람이라면 이게 특혜가 아니고 뭡니까.
  
서 일병의 군 복무와 관련한 추 장관 또는 주변인의 불법적인 청탁 여부는 진행 중인 검찰의 수사로 한 점 의혹 없이 밝혀내야 할 것이다. 소속 부대의 의료 기록 분실 역시 사실이라면 그 까닭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고, 설사 소속 부대가 기록을 분실하였다 해도 본인이 수술하였던 병원에서 아직 의무 기록을 보존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를 통한 진상 규명도 가능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하 의원 식의 접근은 위험하다.

당시의 법과 제도는 아픈 사람이 30일의 병가를 진료·입원·약제·검사의 목적으로 신청하고 허가받을 수 있게끔 꾸려져 있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이 병가를 나가면 문제지만, 의사가 치료와 회복을 요한다고 진단한 사람이 병가를 장기간 허가 받은 일을 두고 그 자체를 '특혜'라 명명하는 것은 곤란하다.

무책임한 공세, 피해는 오롯이 현역병들의 몫

병사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잘못된 제도 운용으로 누리지 못했다는 제보를 입수했을 때 국회의원이 품어야 할 의문은 "왜 의사도 아닌 지휘관이 환자들에게 까다롭게 병가를 주는 것이냐?"이지 "왜 저 사람만 병가를 내보냈느냐?"가 아니다. 그러나 여야를 막론하고 앞선 질문은 아무도 던지지 않는다. 그저 휴가가 적법절차에 따라 이루어졌는지를 두고 허수아비 싸움을 할 뿐이다.

누군가 병가를 원하는 만큼 충분히 썼고 누구는 쓰지 못했다면, 잘못은 충분히 쓴 병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허가하지 않은 지휘관에게 있는 것이다. 휴가 간 환자와 못 간 환자가 다툴 일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을 비틀어 손쉬운 갈등구조에 편승하는 정치인들 탓에 병가 문제를 둘러싼 일련의 논란이 아픈 병사들이 휴가 가기 더 어려운 방향으로 이어질까 우려스럽다. 무책임한 말의 잔치가 끝난 뒤에 돌아올 피해는 오롯이 현역병들이 다 떠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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