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나요?

9월 28일 유관순 100주기, 현준혁 72주기, 김원봉 탄생 122주년, 강윤국 94주년

등록 2020.09.28 11:53수정 2020.09.29 09:01
0
원고료로 응원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14세이던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했고, 16세이던 1918년 4월 1일 이화학당 고등과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1919년 3월 1일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관순은 이화학당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가 구속됐다.

풀려난 유관순은 고향으로 갔다. 3월 10일 날짜로 휴교 조치가 내려져 있어서 학교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유관순은 부모와 숙부 등 고향과 교회의 여러 어른들에게 서울 소식을 전했다. 그 결과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3000명이 운집한 가운데 대규모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복원되어 있는 유관순 생가와 그의 가족이 다닌 교회 ⓒ 정만진

 
이날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 1863-1919)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1875-1919)가 일제에 죽임을 당했다. 최정철(崔貞徹, 1853-1919)과 그의 아들 김구응(金球應, 1887-1919)도 죽임을 당했다.

또 김상헌(金尙憲, 1893-1919), 박병호(朴炳好, 1875-1919), 박상규(朴相圭, 1880-1919), 박유복(朴有福, 1869-1919), 방치성(方致成, 1874-1919), 유중오(柳重五, 1888-1919), 윤태영(尹泰泳, 1850-1919), 윤희천(尹熙千, 1894-1919), 이성하(李星夏, 1859-1919), 전치관(全致寬, 1871-1919), 한상필(韓相弼, 1879-1919)도 죽임을 당했다. 그날 아우내장터에서 한꺼번에 19명이 일제 경찰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다.

아우내장터에서 하루 만에 19명이 죽임 당해 

특히 어머니 최정철과 아들 김구응의 순국은 100년이 지난 지금 듣기에도 차마 귀를 막아야 할 만큼 참혹하다.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이었던 김병조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에서 집필한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에 따르면, 당시 일제 경찰은 시위 행렬 선두에 선 조선인들을 칼로 마구 찔렀다. 조선인들은 맨손으로 나선 만세 시위였던 탓에 최소한의 자기 방어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 바람에 시뻘건 피가 철철 흐르고,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직면했다. 

시위를 주도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인 김구응이 일제의 야만적 행위를 강력히 꾸짖었다. 그러자 일경들은 총을 난사해 그 자리에서 의사를 절명시켰다. 일제의 만행은 그에 멈추지도 않았다. 일경들은 칼로 의사의 팔다리를 난도질했다. 서른두 살 아들의 처참한 사망 앞에 예순여섯 늙은 어머니 최정철이 울부짖으며 항의하다가 혼절할 지경이 되었는데, 그 순간 일경들은 노모마저 칼로 찔러 즉사시켰다. 아우내 장터는 19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들이 흘린 선혈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붉은 피바다가 되었다.

3·1운동이 평화 시위였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이들은 흔히 "1919년 기미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이 무슨 대수냐? 나도 그때 태어났으면 가족을 버려두고 혼자 만주로 가서 독립군이 되지는 못했을지라도 사는 마을에서 벌어진 만세 행렬에는 서슴없이 참여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고 호언장담을 내뱉는다. 그러나 천안 아우내장터에서만도 하루에 19명이 순국한 사실을 알면 그렇게 쉽게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조선총독 "경고 사격 없이 바로 사살하라!"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는 "추호의 가차도 없이 엄중 처단하라"면서 시위대를 향한 발포 명령을 내렸다. 조선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2만3000여 명은 전국에서 살육, 고문, 방화를 자행했다. 그들은 3월 10일 평남 맹산읍에서 단 하루 동안 시위 군중 50여 명을 죽였다.

4월에는 "경고 사격없이 바로 사살하라!"는 조선총독의 명령이 추가 하달됐다. 일본 본토에서 헌병과 보병 부대도 증파되었다. 왜적들은 4월 15일 수원 제암리 주민 30여 명을 교회에 가둬놓고 불태워 죽였다. 화성 송산면에서도 마을 전체를 불지르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5월 말까지 한국인 7,500여 명이 학살됐다. 하루 평균 82명이 일제에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도 만세 시위 동참을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a

독립지사들을 고문하고 죽인 일제 식민통치의 총본산 조선총독부 1926년 경복궁 내에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모습. (본 저작물은 "서울역사박물관"이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것을 이용했으며, 해당 저작물은 museum.seoul.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 서울역사박물관

 
유관순도 공주 형무소로 끌려가 1920년 9월 28일 결국 죽임을 당했다. 일제는 유관순이 기미년(1919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운동 1주년을 맞아 1920년 3월 1일 옥중 만세운동을 벌이자 더욱 악랄하게 고문하였다. 강소천 작사·나운영 작곡의 〈유관순〉 노래에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 파란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라는 대목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유관순〉 노래 2절은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 유관순 누나를 불러봅니다 / 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 듯하여 / 푸른 하늘 우러러 불러봅니다'이다. 노래는 지금도 유관순 누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푸른 하늘 우러러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고 했다.

우리는 과연 유관순을 진심으로 추념하고 있을까?

과연 우리 국민들은 오늘날도 유관순을 노랫말만큼 생각하고 있을까? 단적으로 오늘 9월 28일은 유관순 열사가 세상을 떠난 기일이다. 생일이 살아있는 사람의 기념일이듯이 죽은 사람에게는 사망일이 기념일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자기 혼자서라도 생일을 기념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은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누가 기념을 해주어야 하나? 선조의 기일을 기려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거나 추념 행사를 가지듯이, 순국 지사의 기일은 나라나 국민들이 기려주어야 한다. 오늘 9월 28일, 우리 국민들 중 몇 사람이 유관순의 기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밀양 김원봉 생가터에 세워진 '의열단 기념관' ⓒ 정만진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오늘 9월 28일은 독립지사들을 추도하여 묵념을 하거나, 또는 소주 한 잔을 바칠 만한 특별한 하루다. 1898년 9월 28일 의열단 단장 김원봉 지사가 밀양에서 출생했다. 1926년 9월 28일 우리나라 독립운동 시기 마지막 의열 투쟁 부민관 거사(1945년 7월 24일)를 일으킨 강윤국 지사가 태어났다. 1948년 9월 28일 대구사범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했던 현준혁 지사가 평양에서 암살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현준혁 지사가 암살된 바로 그날, 독립지사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전태열 열사가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찌 9월 28일을 그냥 흘려보낼 수 있을 것인가! 
#유관순 #김원봉 #부민관 사건 #9월28일 오늘의역사 #강소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3. 3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