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 떠난 고승들 수도처, 만일암을 아십니까

다산 정약용의 기록의 힘... 그가 남겨둔 덕분에 '만일암'도 남았다

등록 2020.09.12 21:42수정 2020.09.1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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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두륜산 일원 두륜산은 대흥사를 보호하듯 안고 있는 산이다 ⓒ 정윤섭

 
한반도의 마지막, 백두산에서부터 시작된 백두대간의 정맥이 길게 뻗어 가장 마지막으로 치솟아 이룬 산이 해남 두륜산(703m)이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세 가지 큰 재앙이 미치지 않는 '삼재불입지처'라 하여 자신의 의발을 이곳 두륜산 대흥사에 모시라고 했다. 두륜산은 서남해 지역을 관할하는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천년고찰 대흥사를 안고 있다. 지난 2018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명산에는 수도하는 고승들이 많이 모여들기 때문에 암자도 많다. 두륜산에는 20개가 넘는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 두륜산 정상인 가련봉 바로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암자가 만일암이다. 이곳에서 서북쪽 아래로 약간 내려가면 북미륵암이 있다. 이곳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국보 308호)과 북미륵암삼층석탑(보물301호)이 있어 불교를 숭상한 고려 시대에는 만일암과 북미륵암을 중심으로 대흥사의 불교문화가 꽃핀 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가면 마치 도교에서 말하는 선계에 와 있는 느낌마저 든다. 속세를 벗어나 산 정상에서 불법을 깨달으려 했던 수도승들의 자취가 묻어난다.

두륜산은 북쪽에서 들어오는 입구를 빼고는 대흥사를 둥그렇게 안고 있기 때문에 천혜의 요새와 같은 곳이다. 다산 정약용은 이곳 두륜산에 성을 쌓자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지형 덕분에 대흥사는 큰 전란을 피해가며,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할 만큼 큰 사찰을 유지해 왔다.
  

가련봉 아래 만일암지 일원 두륜산의 정상부에 대흥사의 시원이라 할 만일암이 있다. 현재 5층석탑만 남아있다. ⓒ 정윤섭

 
두륜산 정상에 오르면 서남해 바다와 날씨가 좋으면 멀리 한라산까지 보인다. 내륙의 마지막이자 바다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첫 출발점이기도 하다. 두륜산은 안쪽으로는 아늑하고 여성적인 산이지만 산 정상에 오르면 동쪽 산 바깥으로는 천 길 낭떠러지의 험한 바위 능선을 이루고 있다.

다산이 기록한 '만일암'지, 불승들과의 만남

두륜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가련봉(703m) 아래에 만일암지(挽日庵址)가 있다. 지금은 옛 영화를 말해주듯 5층 석탑만 남아 있지만, 만일암은 대흥사의 시원이라 할 만큼 가장 역사가 오랜 암자이자 여러 고승이 머물렀던 곳이다.
  

만일암지 5층석탑 만일암의 옛 영화를 말해주듯 5층석탑이 남아있다. ⓒ 정윤섭

 
이러한 고승들의 수도처인 만일암은, 만약 그에 관한 기록이 없었다면 그저 오랜 암자의 하나로 기억될 뿐이었을 것이다. 이를 기록으로 남긴 것은 불승이 아닌 다산 정약용이었다. 다산은 『만일암지』와 『만일암중수기』를 통해 만일암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정약용은 대흥사의 역사를 기록한 『대둔사지』 편찬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진 백련사의 『만덕사지』 편찬도 주도하는 등 그의 기록에 대한 집념은 대단하다 여겨진다.

다산은 평생 5백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겼다고 하는데, 그의 기록에 대한 집념은 종교를 초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약용은 유배 기간에 여러 스님과 교류 관계를 맺었는데 그중에서도 혜장선사와 유독 인연이 깊다. 아암 혜장과의 만남은 그가 불교를 이해하고 대흥사와 강진 백련사 등 이 지역의 사찰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데 많은 역할을 하게 된다. 혜장선사는 다산과 함께 『대둔사지』의 편찬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혜장이 백련사의 주지로 있는 동안 이루어진 유불을 넘나드는 교류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산은 혜장을 통해 고려시대 고승인 진정국사 천책에 대해 알게 되어 자신의 시문집과 『만덕사지』, 『대둔사지』에 덕룡산 용혈암과 진정국사에 관련한 여러 편의 글을 남기고 있다.
 

만일암지 다산이 직접 친필로 쓴 만일암지다. ⓒ 정윤섭

  
다산의 불승들과의 교유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범위가 넓고, 지속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산의 이들 스님과의 교유 중에 완호 윤우, 은봉 두운, 아암 혜장 등은 벗으로 교유를 나눈 상대였다. 그리고 수룡 색성, 기어 자굉, 철경 응언, 침교법훈, 호의 시오, 초의 의순, 철선 혜즙, 풍계 현정 등은 사제의 관계로 만남이 이루어 졌다고 한다.

다산은 전등계傳燈契를 통해 이들 승려들과 관계를 지속했는데 단순히 개별적인 관계에 머물지 않고 이들과 공동 작업으로 『대둔사지』, 『백련사지』와 같은 사찰의 역사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다산초당에서 제자들과 저술활동을 했던 것처럼 불승들과도 다양한 저술 편찬 작업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암지』와 『만일암 중수기』 읽어보니

다산 정약용의 『만일암지』에 대한 기록도 이들 불승들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일암지』는 다산이 직접 필사한 것으로 간행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혜장선사 · 초의선사 등이 편집한 『대둔사지』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것으로 보고 있어 『대둔사지』를 정리하면서 만일암에 대해서도 기록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만일암지』에서는 백제 구이신왕 7년(426) 신라의 승려 정관이 창건하였고, 백제 무령왕 8년(508) 이름이 전하지 않는 선행비구가 중건하였으며, 신라 헌강왕 1년(875) 도선이 크게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록에 대하여 아암 혜장 등은 백제의 영토에 신라 승려가 들어와서 지었다는 등의 설은 모순이 많고 연대 또한 혼동이 많다는 등의 지적을 하며 신라 말 창건설을 주장하고 있다.

정약용은 『만일암지』 뿐만 아니라 『만일암중수기』도 기록하였다. 1809년 대흥사 만일암 중수 공사가 끝나고 다산은 은봉스님의 요청으로 『만일암중수기』와 『만일암지』를 지어 친필로 써주면서 "만일암 기문記文과 만일암지는 모두 친필로 써서 보내오, 모름지기 아암과 더불어 한 차례 펼쳐 본 뒤에는 마땅히 깊이 상자 속에 간직해서, 자주 꺼내 보지 말아야 할 것이오"라고 당부한다.

정약용은 『만일암중수기』를 써주면서 사적인 욕심 없이 후세 사람들을 위해 절을 수리한 승려 두운의 마음이 훌륭하다고 평가하였다. 만일암 중수기를 읽어보면 정약용의 유학자로서의 집에 대한 가치관을 잘 살펴볼 수 있다. 그는 만일암을 짓는 것을 누에나 제비, 까치가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며 만일암을 중수하는 것이 자신들을 위해 도모하는 일이 아님을 말한다.

현재 만일암 암자 터 주변에는 오층석탑, 연자맷돌, 석등, 샘터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정관존자가 만일암을 창건할 때 암자보다 탑을 먼저 세웠다고 하는데 탑을 완성한 후에 암자를 지으려니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그래서 해가 지지 못하게 탑에 묶어 놓고 암자 세우는 작업을 계속했으며, 암자를 완공한 후에 암자이름도 잡을 만挽자와 해 일日자를 써서 '만일암挽日菴'이라 불렀다고 한다. 

만일암터의 석탑 옆에는 다듬은 돌로 잘 조성된 샘이 있다. 이 샘은 음양의 조화를 고려하여 음 양수 샘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위 샘과 아래 샘이 나누어진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도 주거가 가능할 만큼 샘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나온다.
  

만일암 옛사진 1940년 한 일본인이 편찬한 '조선의 차와 선'이라는 책에 만일암 사진이 소개돼 있다. ⓒ 정윤섭

 
암자 터 아래쪽에는 암수의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한 그루는 죽고 현재 한 그루만 남아 있다. 이 나무의 수령을 천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어 '천년수'라 부른다. 지난 2018년에는 전라도 정도 천년을 기념하는 기념수로 지정된 바 있다. 암자 터 역시 풍수를 잘 고려해 들어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만일암은 일제강점기 무렵까지도 암자가 유지되고 있었던 것 같다. 1940년 일본인 모로오까 다모쓰가 저술한 <조선의 차와 선>이라는 책에는 만일암 사진이 한 장 게재되어 있다. 역사는 항상 기록한 자에 의해 만들어진다.
#두륜산 #대흥사 #만일암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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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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