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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모사건으로 유배형 좌천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18회] 정조가 이가환ㆍ이승훈ㆍ정약용 등 측근들을 천주교도가 많은 지역으로 좌천한 이유

등록 2020.09.17 18:13수정 2020.09.1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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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초상화. ⓒ 이재형

 
정약용이 짧은 기간이지만 경기 북부지방의 암행어사를 하던 해 (1794년) 청나라의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구베아 북경 주교의 사령을 받고 서울로 들어와 비밀리에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듬해 조정에서는 주문모 신부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이 사건은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게 큰 화난으로 이어진다.

주문모가 비밀 입국하여 선교하기 전에 조선에서는 권철신ㆍ정약전ㆍ이벽 등에 의해 천주교의 신앙이 전도되고 각지에서 신도들의 모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주문모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조선에는 수백 명 혹은 4천 명의 천주교신자가 있었다고 한다.(『한국천주교회사(상)』)

경유년(1777년)에 권철신이라는 유명한 학자가 정약전 등 여러 학자들과 더불어 산골에 있는 그윽한 절에서 철리(哲理) 깊은 뜻을 서로 토론한다 함을 듣고, 몹시 추운 날에 100리나 되는 눈이 쌓이고 험한 산길을 어두움과 호랑이 떼들과 싸우면서 걸어가 그날 밤으로 그 모임에 참가하였다.

연구회는 10일 이상을 두고 계속되어 천(天), 세계, 인성(人性) 등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옛 성현들의 학설을 끌어내어 일일이 토의하였는데, 갑이 주장하면 을이 반박하여 그칠 줄을 몰랐다.

이때 그들은 북경에서 가져온 과학, 산수, 종교에 관한 예수회 신부들이 지은 책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는 천주의 섭리와 영혼이 없어지지 않음을 가르치며, 칠악(七惡)을 이겨내어 덕을 쌓을 것을 가르쳐 주는 『천주실의』, 『심리진전』, 『칠극』 등 유명한 천주교 교리서도 있었다. 여태까지의 확실치 않고,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점이 많은 유교에 관한 책만을 읽고 있던 그들은 곧 가르침에 따라서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드리고,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일을 쉬고 오로지 깊이 생각하며 가만히 묵상에 잠겨 재계(齋戒)를 엄격히 지키려고 애썼다. (주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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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종로구 계동에 있는 석정보름우물. 외국인 사제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숨어 살면서 영세물로 사용했던 곳이 우물. 15일 동안은 맑고 다음 15일 동안은 흐려지곤 해서 보름우물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 서울시

 
이로 미루어 정약용도 형 정약전과 이벽 등과 함께 공무를 마치면 천주교 모임에 깊이 참여하였을 것이다. 이때까지는 아직 조정에서 천주교에 대해 금압하거나 이단시하지 않고 있었다. 본인들도 천주교를 신앙한다고 하여 그것이 마치 사문난적으로 몰리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채제공이 영의정이 되면서 남인 시파들이 모처럼 권력의 핵심에 포진하였다. 영의정을 중심으로 이가환과 정약용이 판서ㆍ승지 등에 올랐다. 정약용은 1795년 1월 사간원에 제수되어 품계가 통정대부에 이어 동부승지에 오르고, 2월 병조참의, 3월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 병조참의 때는 정조의 수원 행차에 시위(侍衛)로서 직접 모시기도 하였다.

채제공이 사도세자를 죽이도록 참소한 노론 벽파의 주동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면서, 집권당이 된 남인 시파와 노론 벽파 사이에 암투가 벌어지고, 조정은 이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등장했다. 이같이 미묘한 시기에 주문모가 입국하여 비밀리에 선교하다 체포되고, 노론 벽파는 이를 빌미삼아 반격에 나섰다. 주문모의 입국에 이가환 등이 배후라는 주장이었다. 정약용이 주문모를 은신시켰다는 주장도 나왔다.


정조와 채제공은 모처럼 개혁정치를 펴고자 노론 벽파를 약화시키려다 이 사건으로 오히려 된서리를 맞게 되었다. 공조판서이던 이가환은 충주 목사로, 이승훈은 예산으로, 승정원 승지이던 정약용은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각각 좌천되었다. 금정은 충남 청양군 남양면 금정리다. 사실상 유배였지만 찰방은 그나마 작은 지역의 지방관을 겸했기에 상당한 권한이 있었다.

정약용은 자신이 반대파에 내몰려 유배 신세가 된 내막을 잘 알고 있었다.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였다. 권력에서 밀린다고 판단한 노론 벽파는 채제공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를 사교의 비호자로 무고하여 혁신세력인 정약용과 이가환 등을 조정의 주요 보직에서 배제시키려는 전략이었다. 반대세력은 정약용이 경술년 증광별시에 급제할 때의 책문(策文)은 서양의 사설(邪說)을 좇아 오행(五行)을 사행(四行)이라고 하였는데도 시관(시험관) 이가환이 그를 1등으로 평정했다는 무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다행히 이를 정조가 배척하고 무고자를 유배시켰다.

정약용은 자신이 천주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는지, 금정에서는 열심히 천주교 신앙자들에게 이를 믿지 말도록 설득하고 조상의 제사를 지내도록 독려하였다.

7월 26일 금정에 나갔다가 12월 20일 다시 서울로 돌아왔으니, 4개월 남짓 금정 찰방으로 근무한 셈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이곳에서도 결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금정에 있는 동안 이 지역의 토호들을 불러다 국가의 천주교 금교령을 어기지 말고 제사를 지내도록 타일렀다. 또한 천주교 신앙에 빠져 있던 이곳의 역리(驛吏)들을 깨우쳐 효과를 거두었다고 하며, 천주교도 김복성을 붙잡아 자백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사람들을 모아 천주교를 사교로 배척하는 제사(斥邪之禊)를 베풀면서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권장하였으며, 또한 동정을 지킨다고 고집하는 여자 신도를 혼인시키기도 하였다. (주석 3)


정조가 이가환ㆍ이승훈ㆍ정약용 등 측근들을 천주교도가 많은 지역으로 좌천(유배)한 것은 "그곳에서 천주교도들을 깨우쳐 유교의 교화체제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공적을 세움으로써 비판의 표적에서 벗어나는 기회를 삼으라는 뜻이 깃들어 있었다." (주석 4)

정약용은 이때도 헛되이 '소일'하지 않았다. 지방의 선비들을 만나 학문을 논하고, 이 지역에 사는 평생 사숙해온 성호 이익의 종손과 사귀면서 성호 선생의 유저를 접할 수 있었다. 이곳 백성들의 생활 역시 비참하기는 경기지역과 다르지 않았다.
 「맹화ㆍ요신 친구의 창곡 부패 이야기를 듣고」란 제목의 시를 지었다. 대표작의 하나이다.

 남은 것은 조그만 송아지 한 마리
 차가운 귀뚜라미 서로 위안되네
 초가집에 뛰노는 건 여우와 토끼
 고관 집 붉은 문에는 청룡 같은 말
 촌가에는 겨울 지낼 쌀도 없는데
 관가 창고는 무난히 겨울나네
 궁한 백성들 풍상이 몰아치는데
 대감 집에는 산해진미 올려바치네.


주석
2>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300~302쪽, 1980, 한국교회사연구소.
3> 금장태, 앞의 책, 119쪽.
4> 앞의 책, 116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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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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