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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 않는 그녀 덕분에 내 '과거'와 화해할 수 있었다

[리뷰] 느려도 이길 수 있다고 힘있게 말하는 영화 <야구소녀>

20.09.08 15:51최종업데이트20.09.08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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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글에는 영화 <야구소녀>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영화 <야구소녀> 포스터 이미지 ⓒ 싸이더스

 
여러 번 공인중개사 시험에서 낙방한 수인(이주영 분)의 아버지(송영규 분)는 또 한 번의 시험을 앞둔 저녁, 모든 책을 차곡차곡 상자에 넣어 정리한다. 다시는 볼 일 없을 것처럼. 또 떨어지면 어떡하냐는 수인의 말에 이번에는 반드시 합격할 테니 걱정할 것 없다고, 확신을 머금은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인 그는 다음날 부정시험을 의뢰했다는 혐의를 받고 경찰서로 이송된다.

수인의 어머니(염혜란 분)는 가만 앉아 남편의 미련을 가득 먹은 수험도서들을 하나씩 태운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수인이 들어온다. 이내 그녀는 딸에게서 그 큼지막한 가방을 빼앗고, 글로브를 꺼내 불 속에 던져 넣는다. 때가 왔다. 남편이 꾸는 시험 합격이라는 꿈, 딸 수인이 꾸는 프로야구팀 입단 제의라는 꿈을 그만 꿀 때가. 그만큼 꿔보았는데 지금껏 안 되는 거라면, 그건 정말 안 되는 꿈이니까. 눈물이 그렁한 수인이 소리를 질러온다.

"진짜 왜 그래, 엄마가 뭘 안다고 그래."
"내가 뭘 몰라. 내가 네 엄마인데 뭘 몰라!"
"하,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모르잖아. 내가 만약에 진짜 잘 하는 거면, 그런 거면 어떡해."

 
영화 <야구소녀>의 주인공 주수인은 넉넉지 않은 형편에 야구를 해왔지만, 실력을 인정받아 여자 선수로는 처음으로 고등학교 야구부에 들어가면서 화제가 된 인물이다. 세간의 시선은 남자가 하는 스포츠인 야구를 여자가 한다, 그것도 잘 한다는 사실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졸업을 앞둔 수인은 번번이 프로팀의 입단 지명에서 비껴간다. 손끝이 갈라져 베어 나온 피로 야구공이 얼룩지도록 던져보지만, 구속은 130km를 벗어나지 못한다. '너의 체격과 근력으로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공은 이 정도'라고 말하는 듯 속도계는 더는 숫자의 크기를 키워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수인은 야구를 그만 두지 못한다. 단지 좋아한다는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할 이유 때문에 못 그만둔다. 주수인이라는 사람이 정말 야구를 잘 하는 사람이면 어떡하나. 빠르게 던지지는 못해도, 다른 방법으로 충분히 야구를 지금보다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인데, 지금 그만 돌아서면 얼마나 아쉽고 슬플지, 수인이는 알고 있다.
 

영화 <야구소녀> 스틸 이미지 ⓒ 싸이더스

 
나는 수인이처럼 '어떡하냐'고 묻지 못했다. 내가 정말 잘 하는 거면 어떡해. 지금 그만 두지 않고 더 가다 보면 더 잘 해내는 방법을 찾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수인과 나는 달랐다. 수인은 소리를 질러 우겨 봤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부모님의 설득에 수긍했고, 회유되었다.

과거 부모님이 왜 내가 꾸던 꿈을 지지해주기 어려운지를 하나씩 풀어놓으실 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틀린 말 하나 없었고, 그게 현실이었다. 안정적인 수입을 기대하기 어렵고, 늦게 시작하는 탓에 입시 결과도 장담할 수 없었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성적으로 안정적인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나를 어떻게든 꿈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 했다. 제대로 꿈을 꿔보지도 못하거나, 꿈을 두고 돌아서는 이가 얼마나 많을지를 생각하면 나 정도는 아쉬운 축에도 못 낄 테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수인이만큼 간절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림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하지 않았다는 결말이 아직까지도 찜찜하게 마음 한켠에 남아 있는 이유는 '혹시' 하는 미련 때문이다. 그래, 내가 그걸 계속 했더라면 혹시 더 잘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부담 따윈 없이 기꺼이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밀고 나갔더라면 정말 잘 해내지 않았을까?

사실 이것보다 더 큰 미련은 꿈을 포기하라는 권유 앞에서 수인이처럼 간절함을 담아 소리쳐보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입시 미술을 준비하지 않는다는 결말은 달라지지 않았더라도 후련하게 소리 한 번 질러봤더라면. 나 그래도 해보고 싶어, 내가 정말 잘 하는 거면 어떡해. 그렇게 말해봤더라면.

수인은 그런 미련 따위 추호도 남기고 싶지 않을 만큼 야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찬, 과연 '야구소녀'이다. 야구를 잘 하고 싶다는 욕망과 스스로도 꽤 잘 한다고 여기는 자신감으로 수인은 포기하지 않고 공을 던진다. 장점을 살린 너클볼(손가락을 구부린 채 쥐고 던짐으로써 공이 전혀 회전하지 않게끔 하는 구종)을 선보인 수인은 마침내 프로팀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는 데에 성공한다. 프로팀 산하 '여성야구부'를 이끄는 프론트가 아닌 정식 '프로2군 선수'로서. 나는 그런 수인이 자랑스러웠다.
 

영화 <야구소녀> 포스터 이미지 ⓒ 싸이더스

 
내가 왜 그토록 나의 한 시절을 찜찜하게 여겼는지를, 불 속에서 타 들어가는 글로브를 보며 소리지르는 수인 덕택에 알았다. 더불어 프로 선수로 발돋움하는 수인의 성장을 보면서 나의 만족감을 대리했다. 이제 나는 무엇 때문에 미련이 남았었는지 알아냈으니, 또 한 번 과거의 나와 화해하고 그를 보내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지금부터 노력해야 할 것은 그때처럼 미련을 남기지 않는 일이다. 유일하게 놓인 선택지를 두고서는 실행에 옮길 시기를 가늠해보며 마음을 준비할 것이고, 여러 선택지를 늘어놓고는 갈팡질팡 하면서 무엇을 고를지 우왕좌왕할 것이다.

나의 멋진 수인은 바로 지금, 자신이 딛고 선 경기장 위에서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에 부흥하는 선택지를 골랐다. 계약서를 내밀면서 구단주가 덧붙였듯이 어쩌면 지금부터 훨씬 힘들지도 모른다. 그런 자신의 미래를 가늠이라도 해보듯, 수인은 경기장 한가운데에 서서 아득히 어딘가를 바라본다.

수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는 건 먼 시간 속 엎어져 울고 좌절하는 자신의 모습일 수도, 환호에 가득 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인은 확신에 찬 눈빛이다. 지금 이 선택이야 말로 가장 적은 미련을 남기는 것임을. 그런 수인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이후 어떤 삶을 살아 갈까. 다만 그녀에게 이 몇 마디들을 전하고 싶다.

부디, 느려도 이길 수 있다 말했던 과거의 수인 자신처럼 당당히 나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세상이 한껏 모나게 굴지라도, 그대는 맘껏 원하는 것을 하라.
 
야구소녀 이주영 최윤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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