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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승만 정부가 만든 '이산가족'입니다

경산 코발트광산 피학살자 나윤상의 자녀 나정태-나점순의 상봉기

등록 2020.09.19 20:10수정 2020.09.1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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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한 장면(자료사진) ⓒ KBS

 
"절대 집에 가지 마세요!"

화장실에 가려던 나정태의 뒤통수에 날아온 말이다. KBS 대구방송국 관계자한테 수십 번 들은 소리다. 언제 가족과 연락이 될지 모르니 잠시라도 자리를 뜨지 말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1983년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은 스치듯 지나가는 방송에 수천만 명의 시청자가 목을 빼고 있어, 찾던 사람이 나오면 즉시 방송국에 연결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찾는 전화가 빗발쳐 연결 자체가 어려웠다.

이산가족찾기 특별 생방송에 나가다

화장실에 다녀온 나정태가 자리에 앉아 푯말을 들자마자 "다음은 대구방송 나와주세요"라는 KBS 이지연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자리에서 일어나주세요"라는 대구방송 PD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약 200명의 참가자들이 부리나케 일어났다. 한 사람당 15초, 나정태의 순서는 11번째였다.

"1567번 김귀분. 본적은 함경남도 북청입니다. 1.4 후퇴 때 서울에서 헤어졌습니다. 찾는 이는 엄마 한소녀입니다." 다음 사람 순서가 이어졌다. "1568번 정진호. 본적은 강원도 홍천입니다. 6.25때 부산에서 헤어졌습니다. 당시 자갈치시장에서 헤어졌습니다. 찾는 이는 형 정찬호입니다."

다음이 나정태 순서였다. 심호흡을 하는데 방송국 카메라가 그를 비췄다. "1569번 나점순(가명). 1952년 전쟁의 와중에 헤어졌습니다. 허벅지에 화상을 입은 자국이 있습니다. 찾는 이는 오빠 나정태입니다."


간신히 방송 전파를 타고 나니 나정태는 허탈해졌다. '15초 방송에 나오려고 열흘을 방송국에서 비상대기했나.' 겨우 20명의 사연이 소개되고 방송 화면은 대전방송국으로 바뀌었다. 1983년 9월 30일 새벽 여섯 시의 일이었다.

네 시간 전인 새벽 두시, 나정태는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푯말을 들고 있는 나정태의 모습을 카메라가 잠깐 비춘 것을 보고, 오빠인 것 같다며 알아본 이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찾던 여동생이 아니었다. 

긴장된 순간이 지나고 나정태는 잠시 담배를 피우러 방송국 청사를 나왔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담배가 반쯤 타내려가고 있을 무렵, 택시에서 손님이 내렸다. 만사가 피곤해진 그는 택시를 향해 뛰었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 세수하고 한숨 자려는데 '따르릉' 소리가 귀를 찢었다. "여보세요?" "왜 집에 갔습니까?" 방송국 관계자의 화난 목소리였다. 수십 번이나 "자리를 뜨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이였다. 그는 나정태에게 그토록 찾던 여동생이 나타났다고 했다. 나정태는 곧바로 수원방송과 연결될 수 있었다.

"지가 네 살 때 대구에서 남의 집으로 갔습니데이."
"허벅지에 덴 자국이 아직도 있습니꺼?"


"오빠!" 하는 소리와 동시에 울음이 터졌다. 30년간 한시도 잊어 본 적 없는 오빠와 여동생이었다. 

일주일 전 전화를 놓지 않았다면... 

이 애타는 만남도 하마터면 불가능할 뻔했다. 불과 일주일 전에 나정태 집에 전화가 설치됐기 때문이다. 1983년 당시만 해도 전화가 무척 귀했다. 시골에서는 마을 당 전화가 한 대밖에 없을 정도였다. 전화는 대부분 이장 집에 있었는데, "명자 아버지, 전화왔어예"라고 마을방송을 하면 이장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가곤 했다.

나정태도 전화를 신청한 지 1년 만에 임시전화를 개설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수원에 사는 여동생 나점순과 통화가 되었다. 만일 집에 전화가 없었다면, 나정태는 여동생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해가 뜬 그날 오후 나점순은 고속버스를 타고 대전을 경유해 대구로 왔다. 북부터미널 앞 뉴욕제과가 약속 장소였다. 문을 밀며 들어오는 여성이 자신의 동생 나점순임을 한눈에 알아본 나정태는 통곡을 했다. "점순아!" 10분 동안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게 나정태와 나점순 남매가 상봉할 수 있었던 것은 KBS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 덕이 컸다. KBS(한국방송공사)가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무려 138일에 걸쳐 453시간 45분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한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은 세계 방송 역사상 최장 생방송 프로그램으로 공인되었고 78%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남겼다. 

흔히들 6.25 이산가족이라고 하면 전쟁통에 피난하면서 헤어진 가족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는 절반의 진실이다. 이승만 정부의 국가폭력에 의해 가족 구성원이 학살되고, 가족공동체가 붕괴되어 헤어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나정태-나점순 남매가 그런 경우다. 이들 남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버지의 죽음 이후 뿔뿔히 흩어진 가족
 

나윤상의 초상화 ⓒ 박만순

 
"매형, 오늘 오후에 동생분이 트럭에 실려 경산으로 갔습니데이."

대구형무소 간수로 있던 처남이 나차상에게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나차상은 동생 나윤상이 경산에서 학살될 것임을 직감했다.

미군정 당국의 양곡수집정책, 경찰의 부패, 미군정에 대한 반감, 한국인 군정관리의 무능함, 실업문제 등으로 1946년 대구에서 발생한 '10월항쟁'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당시 대구역에 근무하던 나윤상도 이에 연류돼 몇 개월간 구속됐다. 하지만 출소 후 그는 직장에 복귀했고, 1949년에는 이승만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에도 가입했다. 국민보도연맹은 좌익 전향자들을 계몽하고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정부는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생명을 보호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건 헛된 약속이었다. 반대로 보도연맹 명부는 살생부(殺生簿)가 되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나윤상은 다른 이들과 함께 대구형무소에 구금되었고 이후 8월 경북 경산군(현재의 경산시) 코발트광산에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희생자들은 나윤상같은 대구형무소 재소자와 경북 경산·청도·대구·충북 영동군의 보도연맹원들로 그 수가 최소 1800명에서 최대 3500명에 이른다.

이후 나윤상 가족의 삶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 났다. 전쟁 전 나윤상 가족은 대구역 관사에 살고 원래 집은 임대를 해주어 여유롭게 살았다. 하지만 아버지 나윤상이 코발트광산에서 학살된 지 2년 만에 온 가족은 뿔뿔이 헤어졌다.

1952년 나윤상의 아내는 개가했고, 당시 4살이던 나점순은 양녀가 아닌 식모로 남의 집으로 갔다. 그때는 나이가 어려 일을 할 수는 없었고 나점순은 열 살 전후로 해서 집안일을 하게 되었다.

당시 여섯살이던 나정태는 큰아버지 나차상의 집으로 갔다. 큰집이라고는 하지만 나정태는 '애비 없는 자식'의 삶을 살았다. 배고파 살 수가 없었던 소년은 열한살 나이에 섬유공장에 취직했다. 그때부터 그는 주야 맞교대(2교대)를 하며 소년 노동자로 일했다.

그가 일한 태평직물은 노동자가 100여 명이었고 기숙사도 있어 나정태는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처음에는 월급을 받을 수 없었던 나정태는 심부름, 청소를 하며 눈치로 기술을 익혀야 했다. 그렇게 일해 열심히 돈을 모은 덕택에 나정태는 자취방을 얻을 수 있었다. 자취방 첫날 나정태는 밥을 한솥 가득해서 배가 터지게 먹었다. 아버지가 죽고 항상 배고프게 살았던 그는 배터지게 쌀밥을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나정태가 큰아버지 집에서 배를 곯은 기억만 있다면, 큰아버지인 나차상 가족에게는 또 다른 기억이 있다. 동생 나윤상이 죽고 난 후 형 나차상은 1960년 국회에 만들어진 '양민학살특위'에 동생의 죽음을 신고했다.  

그런데 1년 후에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은 박정희 군사정권은 '피학살자유족회'를 탄압했다. 나차상의 집에는 군인들이 수시로 들이닥쳤다. 군인들은 군홧발을 신은 채로 안방에 들어와 구석구석을 뒤졌다. 나올게 있어서 뒤진 게 아니라 피학살자 가족들을 공포에 떨게 하려 한 것이다. 그렇게 큰집 식구들은 그들대로 고초를 겪어 몸고생, 마음고생을 했음을 나정태는 2000년대 들어서야 알았다.

민주노동당은 내 전화를 받아주었다
 

증언자 나정태 ⓒ 박만순

 
"여보세요." "예, 한나라당 대구시당입니다." 2004년 3월. 나정태는 '민간인학살 통합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말하기 위해 한나라당에 전화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건 제가 잘 몰라서요"라며 일방적으로 끊었다. 화가 난 나정태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에는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전에는 노근리특별법, 거창특별법처럼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해 개별법을 만들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한국전쟁 전후 모든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루는 통합법을 특별법으로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몇 차례 시도 끝에 포기한 그는 '민주노동당'이라는 곳에 전화를 했다. 국회의원 한 석 없는 정당이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민주노동당 당직자는 "예. 그러셨군요"하며 친절하게 반응했다.

그렇게 연결된 김에 나정태는 자신의 속 깊은 얘기를 모두 토해냈다. 그렇게 30분을 통화하는데도 상대방은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단번에 나정태는 민주노동당에 호감이 생겼다. 그리고 나정태가 통화하고 한 달 후에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2004년 4월 15일)에서 그 정당은 10석을 얻었다.

그렇게 전화로 민주노동당과 연을 맺게 된 나정태는 이후에 '민주노동당 노인위원회 대구·경북위원장'을 맡았다. 2011년에는 경선으로 치러진 통합진보당 대구달서구 지역위원장 선거에서 85%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됐다. 

아버지 나윤상의 죽음의 진상규명운동이 '민간인학살 통합특별법 제정운동'으로 발전되었고, 이내 진보정당운동을 포함한 대구지역 시민사회운동과 깊은 연을 맺게 되었다.

4년 전부터 나정태는 지역시민사회운동 일선에 나서지는 않지만, 현재도 교류는 이어나가고 있다. 진보정당과 시민사회운동이 아버지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에 앞장섰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굴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윤상의 진실규명 결정문 ⓒ 박만순

 
#이산가족찾기 #코발트광산 #대구 십월항쟁 #보도연맹 #민주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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