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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독자' 남편이 총맞아 죽었을 때가 내 나이 스물둘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 이금순의 이야기

등록 2020.09.18 12:14수정 2020.09.18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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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순이 6.25 당시 살았던 집터. 옆에 선 이는 이금순 남편 박희도가 학살될때 같은 마을에서 살다 코발트광산에서 학살된 윤덕출의 아들 윤용웅. ⓒ 박만순

 
1982년 대구. "계란 사이소. 싱싱한 계란이 있어예." 이금순은 새벽부터 리어카에 계란을 잔뜩 실어 대구 시내 주택가 골목을 이 잡듯이 다니며 목청을 높였다.

새벽 5시 집에서 나와 범어동에 있는 몇몇 양계장에서 계란 100판을 받아 와 대구 시내 골목을 다니며 일일이 팔러 다니는 것이다. 오전 11시면 70판이 팔리고, 나머지는 오후 4시부터 두 시간 동안에 팔면 된다. 리어카가 없을 때에는 큰 '다라이(대야의 비표준어)'에 계란 10판을 담아 머리에 이고 팔러 다녔다. 그나마 리어카를 장만해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한여름에 계란 팔기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혼자서 리어카를 끌고 골목길을 두 시간만 다니다 보면 흘린 땀으로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다 젖었다. 그렇다고 중간에 옷을 갈아 입을 수도 없어, 수건을 갖고 다니며 땀을 닦기에 바빴다. 오후가 되면 수건에서도 옥수수 쉰내가 나기 일쑤였다.

이금순이 이렇게 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리어카 앞쪽에 손자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리어카 앞 그물망에 손자 박정길(당시 3세)이 하루종일 있었는데, 정길의 아빠와 엄마는 서울에서 같이 장사를 했다. 애기를 봐 줄 사람이 없어 대구에 사는 할머니 이금순에게 맡겼다. 이금순도 집에서 손주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겨우 먹고 살 수 있었다.

"정길아, 거서 뛰면 안 돼야." 할머니의 걱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세 살배기 정길이는 리어카 그물에서 뛰기 시작했다. "이놈아, 그러다 떨어져 다쳐." 할머니의 고함에 정길이가 조용히 있는 것도 잠시였다. 리어커 앞 그물은 정길이의 작은 놀이터였다.

"아이고, 정길이구나!" "꼬맹이가 잘도 노네." 계란을 사러 온 동네 아줌마들은 정길이의 볼을 만지고 뽀뽀를 해댔다. "할무이, 제가 정길이 보고 있을 테니까, 계란 팔고 천천히 오이소." 매일 보는 젊은 새댁이 손주를 봐준다는 소리에 이금순은 옆 동네로 가서 계란을 팔고 왔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리어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금순이 '야가 새댁 집에 가 있나'라고 생각해 발걸음을 옮겼지만 그 집에도 없었다. "다른 아줌마가 아를 보겠다고 해서 저는 그냥 왔는디라"하며 새댁이 무안해했다. 이금순은 혹여나 귀한 손자를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애가 닳기 시작했다.


금순은 새댁과 함께 이집 저집을 30분 넘게 뛰어다녔다. "할무이"하며 정길이가 하드(손잡이용 막대를 끼워서 얼린 얼음과자)를 입에 물고 뛰어오는 게 아닌가. "야가 울지도 않고 잘 노네요" 정길이에게 하드를 사준 아줌마가 뒤따라 왔다. 이금순은 정길이랑 놀아준 아줌마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정길이를 혼내킬 수도 없었다. 1982년 당시 세 살이었던 정길이를 리어카에서 키운 이금순 이야기다.

3살 아기 엉덩이가 늘 퍼랬던 이유

"으앙." 엉덩이를 꼬집힌 태화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이 가시나가 어디가 아픈가. 와 우노?" 싸리나무로 엮어 만든 삽짝을 발로 차고 들어온 이들은 금천지서 경찰들이었다. "박희도 어디 갔노?" 딸을 안고 마당의 평상에 앉아 있던 이금순은 남편을 찾는 경찰에게 짐짓 모른 척했다.

이금순은 경찰이 집으로 오는 소리를 미리 듣고 4살짜리 딸 태화의 엉덩이를 꼬집었다. 그러면 영문을 모르는 어린 딸이 울었고, 이를 신호로 남편 박희도는 뒷문으로 달아났다. 이미 십수 번 겪은 일이라 이제는 이력이 났다.
 

산사람들이 활동했던 운문산 자락의 김전리 앞산 ⓒ 박만순

 
박희도·이금순 부부가 살았던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김전리는 산사람(빨치산)들이 밤마다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운문산 자락에 있는 이 마을 앞산에서 산사람들이 수시로 활동하면서 밤에 '보급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밤에는 산사람들이 마을에 와 '밥 해달라'고 하고, 낮에는 경찰들이 와 '빨갱이'에게 협조한 사람들을 색출하려 주민들을 닦달했다. 이른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세상이었다.

위안부(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16살에 결혼한 이금순은 4세 연상 남편이 잘못될까 좌불안석이었다. 남편 박희도는 3대 독자였는데, 박희도같은 젊은 남성은 경찰의 희생양이 되기 십상이었다.

경찰이 빨갱이에게 협조한 사람을 잡아들인다며 수시로 마을에 들이닥쳤고, 그 탓에 박희도의 딸 태화의 엉덩이는 늘 시퍼랬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부터 운문산과 그 자락 산에서 산사람들은 봉화 시위 등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경찰 입장에서는 청도군 금천면 김전리가 '요주의' 마을이었다.

코발트광산에서 학살된 3대 독자
 

코발트광산에서 학살된 박희도 ⓒ 박만순


1950년 봄 경산군(현재의 경북 경산시) 압랑면에 살고 있는 이○○(이금순의 사촌언니)의 집으로 이금순의 시아버지 박남수가 찾아갔다. 박희도는 여기 사과밭에 피신해 있었다. 그무렵 금천지서에서 날마다 사람이 와 박남수에게 "아들이 어디 있노?"라며 채근했다. 경찰에게 시달리는 거야 참을 수 있었지만, 경찰이 내미는 당근에 박남수의 마음은 흔들렸다.

"보이소. 댁의 아들래미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면 괜찮다 아인교." "그기 뭐요?" "전향하면 보호해 주는 거지. 대통령이 책임지고 보호해준다는기요."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면 과거 전력을 묻지 않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떳떳하게 살 수 있다는 데야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야, 지서 순사(순경)랑 구장(이장)이 와가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도망 안 다녀도 된다 카더라." 아버지의 설득에 박희도는 3개월 사과밭 농막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국민보도연맹 가입서에 도장을 찍었음은 물론이다. 6.25 일어나기 바로 직전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같은 마을의 윤덕출도 도장을 찍었다.

모내기로 정신 없던 1950년 7월 11일. 아침 일찍 금천지서 경찰들과 이웃마을 최해준이 박희도를 잡으러 왔다. 국민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이 시작된 것이다. "박희도 어디 있노?" "와요?" "경찰서에 잠시 갈 있어 그러지." "내는 모릅니더." 이금순이 잡아뗐지만 잠시 후 박희도가 경찰들에게 끌려왔다.

이후 청도경찰서로 연행된 박희도는 다른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국민회당'에 구금되었다. '국민회당'은 1950년 당시 청도경찰서 우측 50m 지점에 위치한 김명옥의 집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일주일만 훈련 받고 집으로 돌려보낸다"던 애초의 약속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몸이 달은 아버지 박남수는 박희도 면회를 갔다. 하지만 면회는 창문을 통해 이야기하는 게 고작이었다.

"내 논을 팔아서라도 니를 빼낼끼구만."
"아부지요. 그럴 필요 없습니데이. 내캉 아무 죄 없습니다. 일주일만 더 있으면 나갈 수 있다 아입니껴."

하지만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박남수가 면회하고 이틀 후 옆 마을 이광기 어머니가 '국민회당'으로 면회를 갔을 때다. 박희도는 이광기의 모친에게 "아줌마요. 우리 집에 가거들랑 어무이한테 옷하고 담배랑 보내주라 카이소"라고 전했다.

이광기 모친 말을 전해들은 이금순이 시어머니에게 이야기했지만 시어머니는 "내는 몬 간다"라는 말만 했다. 국민회당까지는 무려 40~50리(16km~20km) 거리였기 때문이다. 몸이 단 것은 아내 이금순이었다. 밤새 한잠도 못 잔 그녀는 식전에 시아버지에게 상황을 이야기했다. "와. 이제사 이야기하노!"라며 역정을 낸 박남수는 부지런히 청도 읍내로 갔다.

그러나 박남수는 한 발짝 늦었다. "아침에 새끼줄 매서 알로(아래로) 갔심더." 아래로 갔다는 것은 대구경찰서로 갔다는 이야기이다. 이후 청도에서 북쪽 방향으로 간 이들은 곰티재에서 학살되었고 남쪽으로 간 이들은 대구형무소를 경유해 경산코발트광산에서 학살되었다. 3대 독자 박희도는 이렇게 허망하게 26세의 나이에 코발트광산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때가 1950년 7월로, 이금순 나이 22세였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1950년 7, 8월에 경북 경산·청도·대구·충북 영동군의 보도연맹원들과 대구형무소 재소자 일부 등, 최소 1800명에서 최대 3500명이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됐다.

깡패들에게 끌려간 4대 독자

하지만 박희도의 시신을 보지 못한 아버지 박남수는 아들이 아직 살아 있으며 꼭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논을 팔아 이리저리 쫓아다녔다. 그렇게 동분서주하던 박남수는 술독에 빠졌다. 매일 면소재지 술집에서 술타령을 했고, 고주망태가 된 시아버지를 밤늦게 부축하는 게 며느리 이금순의 일과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아들을 찾지 못했고, 화병으로 9년간을 누워 지냈다. 그러다 건강을 회복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지 3년 만에 이승을 하직했다. 1962년도의 일이다.

박희도가 세상을 떠난 후 이금순은 둘째를 낳았다. 손이 귀한 집안에서 낳은 둘째는 아들이었다. 4대 독자 박철규는 아버지 얼굴도 보지 못한 유복자였다. 박철규는 열다섯살이 되자 시골에서 살려고 하지 않았다.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가 지겨웠기 때문이다.

이금순은 아들을 데리고 친구가 사는 대구 범어동으로 가 방을 얻었다. 아들 박철규는 바늘공장에 입사했지만 때려치우고 우유보급소를 차렸다. 하지만 그 일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에 우유보급소 일은 영업구역이 있어 매달 깡패들에게 돈을 바쳐야 했다. 그런데 박철규는 그런 상황도 몰랐고, 바칠 돈도 없었다.

"아이고, 철규 엄마. 철규가 깡패들에게 잽혀 갔구만이라." 식당 아줌마가 이금순에게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이금순은 아들이 잡혀간 곳을 물어 찾아갔다. 깡패 10여 명이 아들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4대 독자 박철규는 코피가 터지고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녀는 깡패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16세에 결혼한 이야기, 남편이 6.25 때 학살된 이야기 등을 하며, 아들을 살려 달라고 사정했다. 그렇게 해서 아들은 풀려났지만 우유보급소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그 다음에는 장녀 태화가 서울에 있는 삼성물산에 자리를 알아봐줬다. 하지만 가방끈이 짧은 박철규는 회사에서 승진이 되지 않자, 퇴사하고 서울역 앞에서 슈퍼를 했다. 슈퍼가 잘 되자 이번에는 건물 주인이 쫓아냈다. 그래서 사무용품을 판매하는 가게를 차렸는데 다행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후에는 금순에게 맡겼던 아들 정길이를 서울로 데리고 올라왔다. 이금순은 칠순이 넘어서까지 대구남부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시장바닥 인터뷰에 주변은 눈물바다
 

증언자 이금순 ⓒ 박만순

 
"남편을 도망가게 하려고 딸래미 엉덩이를 꼬집었어예... 딸래미 엉덩이가 1년 동안 성한 날이 없었는데, 결국 남편은 코발트 광산에서 죽었지라."

이금순의 증언을 들은 시장 상인과 시민들은 눈물 콧물을 찍어내느라 바빴다. 2003년 대구남부시장에서 지역 방송사들이 경산코발트광산의 피해자 가족을 찾아 인터뷰했다. 이 인터뷰를 계기로 이금순은 시장 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제는 92세가 된 그녀는 여러 곳이 아파 집에서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6개월 전에 한 허리 수술이 문제가 되어 외출을 못하고 있다. 코발트광산에서 학살된 남편이 학살된 지 70년이 지났다.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평생을 힘들게 살아왔다.

구십이 넘어 병마가 찾아와 거동도 자유스럽게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리어커 #코발트광산 #국민보도연맹 #계란 #엉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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