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하면 척 아는데 왜 '척'하냐면요

[나도 이번 생은 글렀다고 생각했다] 내겐 없는 미움받을 용기

등록 2020.09.08 10:35수정 2020.09.0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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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척' 좀 해주세요.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이 절실합니다. ⓒ 남희한

척의 변천사


누나가 지나치게 귀여웠다. 한때 "감기 조심하세요~"하는 감기약 광고에 나왔던, 지금 봐도 세상 귀여운 그 아이의 판박이였다. 그 덕에 나는 어디서 귀엽다는 '빈말'도 한 번 들은 기억이 없다. 정말이다. 누나는 그렇게나 귀여웠다. 그런 이유로 나에겐 차별화 전략이 필요했던 것 같다.

기억이 나는 어린 시절을 더듬어 보면, 어른들의 눈치를 지나치게 많이 보는 내가 보인다. 먹고 싶은 음식이나 만지고픈 장난감이 있어도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손대지 않았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울거나 떼를 쓰는 대신, 하품하는 척 눈물을 감추며 급히 밖을 향했다. 애어른. 어딜 가나 붙었던 수식어였고 들으면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착하고 얌전한 아이가 되어졌다. 이때까지의 척은 누나와 어른들의 탓으로 돌려도 될 것 같다. 애가 뭘 알았겠어요. (웃음)

그렇게 착한 코스프레로 지내던 나날이 흘러 또 다른 코스프레가 필요해졌다. 어른들의 관심보다는 또래 친구들의 관심이 중요해지면서 필요했던 남성적인 거침과 강한 모습. 초등학교 고학력을 기점으로 수컷 야수들이 득실거리는 중, 고등학교까지. 큰 무리 없이 지내기 위한 센 척,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대범한 척이 몸에 자연스럽게 뱄다. 길을 걸을 때면 영화 <이유 없는 반항>의 치킨게임 장면처럼, 마주한 사람에게 먼저 비키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았고, 누군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나침반이 방향을 잡은 양 먼저 시선을 옮기지 않으려 분투했다. 나침반처럼 미세하게 떨면서.

대학생이 된 이후론, 눈 깜짝하면 코 베어 간다는 서울에서 묵언 수행자로 지냈다. 차마 자존심이 상해 경상도 뉘앙스의 말을 할 수 없었던 것.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더 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당시엔 서울에서 경상도 사람이 잘 몰라서 묻는다는 것이 심히 위축되는 일이었다. 나를 업신여길 듯했고, 무시할 듯했으며, 코를 베일 것 같았다. 그래서 말을 아꼈다. 환승역에서 지하철을 잘못 타도 결코 주변에 묻지 않았다. 마음이 쪼그라들고 식은땀이 나도 절대 허둥대지 않고 태연하게 또 다른 지하철을 잘못 탔다. 신도림, 용산, 종로는. 정말이지 무서운 곳이었다.

'척'하면 척 알지만


참 피곤하게 살았다. 그러고 얻은 것이라곤 무의미한 시비와 안위의 위협뿐이었는데 말이다. 친구 탓, 경상도 탓, 서울 탓을 하고 있지만 조금 더 큰 어른이 되고서야 알게 됐다. 이게,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는 걸.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누군가로부터 내쳐지는 것이, 무리로부터 배제되는 것이 두려운 아이가 보인다. 어딘가에 속하고 싶어 아등바등하는 아이. 아이임에도 어른스러움을 택했던 아이. 다른 이의 판단에 슬퍼지는 것이 무서워 애써 과격했던 아이. 그래서 언제나 만만해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고, 슬퍼하지 않으려 무뎌지는 연습을 했던 아이가 거기 있었다. 이제와 보니, 알 것 같다. 외로웠구나, 좀 더 사랑받고 싶었구나.

그렇게 사랑받고 싶었던 아이가 많은 '척'으로 외로움과 싸우며 어른이 됐다. 그리고 이제는 조금 더 자연스럽고 순화된 척으로 지금을 살아내고자 한다. 여전히 더 많은 사랑을 바라면서 겉으론 무덤덤한 어른인 '척' 하며.

미움받을 용기가 없는 사람들

맞다. 내겐 미움받을 용기가 없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아니. 적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미움받을 용기를 내보려 해도 나는 그게 안된다. 나를 너무도 사랑해서 남들에게도 사랑받고 싶은가 보다. 참 욕심도 많네요 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수십 년의 나를 몇번이나 들여다봐도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은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싶은, 욕심쟁이다. 잘 받지도 않는 술을 받으면서 괜찮은 척하고 피곤에 절어 한숨 더 자고 싶은 날도 괜찮은 척 출근한다. 알게 모르게 제외되는 대화와 모임을 모른 척하고, 엄마를 바라는 아이의 마음을 모르는 척, 아이를 안고 달랜다.

그렇게 오늘도 '척'한다. 어린 시절의 두려움에 더해 조금 더 매끄럽게 살고 싶은 마음에, 껄끄러워도 부드럽게 살아 내고 싶은 여러 사람의 '척' 속에서 하나의 '척'을 담당하고 있다. 부디 오늘의 진심어린 '척'이 나와 주변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었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 실린 글입니다.
#그림에세이 #심리 #척 #생전전략 #인생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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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렀지만 넌 또 모르잖아"라는 생각으로 내일의 나에게 글을 남깁니다. 풍족하지 않아도 우아하게 살아가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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