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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촌 생활도 삶 일부" 위안부 할머니 일생 그린 감독의 의도

[인터뷰] 전주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상 수상작 <보드랍게> 박문칠 감독

20.08.19 16:51최종업데이트20.08.1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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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으로서 한 개인을 오롯이 이해하는 게 정말 가능할까. 상대를 특정 단어와 프레임으로 규정하지 않고 잘 기억하는 것 또한 어쩌면 닿을 수 없는 경지일지 모른다. 다만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무수한 시도 자체가 의미 있을 따름이다. 

올해 비대면 장기 온라인 상영으로 치러지고 있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보드랍게> 또한 그런 맥락에 있다.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다양한 작품이 있었고, '피해자', '여성 운동가' 등 당사자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했다. <보드랍게>가 2020년 존재해야 할 이유를 하나만 꼽는다면, 비극의 역사를 관통해 온 한 개인을 인간으로서 이해해내려 하는 섬세한 노력에 있을 것이다.

지난 광복절, 서울 명동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상영을 마치고 대구로 내려가려는 박문칠 감독을 18일 서울역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올해 비대면으로 진행된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박문칠 감독. ⓒ 전주국제영화제

 
김순악, 열여덟 개의 다른 이름 

영화는 고 김순악 할머니의 생전 영상과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생애 전반을 다룬다. 노동 관련 웹툰, 여러 일러스트를 발표해 온 애니메이터 이재임 작가의 애니메이션이 군데군데 등장하고, 여러 여성 인권 활동가가 육성으로 할머니의 증언을 낭독하는 장면이 교차한다. 여자라는 이유로 '옥'자를 쓸 수 없어 순옥이 아닌 순악이 된 한 여성의 인생을 젊은 세대가 나누어 마음으로 품는 시도가 엿보인다. 

'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쓰사케, 위안부, 기생, 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 할매, 순악씨'. 82년 평생 김순악 할머니를 지칭한 이름들이다. 2018년 대구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의 제안으로 시작된 고 김순악 할머니와의 만남을 박문칠 감독은 "힘든 삶을 사셨지만 그 안에 놀라운 생존력이 있었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회상한다.

"제안을 받고 고민이 많았다. 직전까지 <퀴어053>이라는 대구 성소수자 축제 다큐를 한창 만들고 있었는데 부담스러운 제안이 와서 더 고민했다. 결심한 이후 현재를 사는 젊은 여성을 등장시켜 그분들 목소리로 할머니의 삶을 낭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이야기 같은데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직접 이야기하면 그 지점에서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다."

영화 제목은 평소 김순악 할머니가 한탄처럼 던진 말에서 비롯됐다.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그 어느 누구 하나라도 "고생했다", "많이 힘들었지" 식으로 보드랍게(따뜻하고 부드럽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고백이었다. 

"이분이 평소엔 흥이 많고 장난치면서 노는 것도 좋아하신다. 그러면서도 특정 시기, 당신께서 힘들었던 시절을 얘기할 땐 짜증, 울화가 치미는 느낌을 제가 받곤 했다. 산전수전 다 겪고 삶을 달관한 태도 속에서도 목소리에 섞인 짜증이나 억울함의 실체는 뭘까 그런 걸 많이 생각해보고 감정이입도 해보려 했다. 그러면서 할머니 인생 후반에 본인의 안위보단 위안부 관련 운동에 헌신하고 사회에 기부하려는 모습을 보이시는데 그건 정말 인생 밑바닥, 좌절을 맛보신 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모습이 영화에 드러나길 원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보드랍게> 관련 사진. ⓒ 박문칠

 
모순 혹은 입체적인 삶

<보드랍게>가 한 인물을 다룸에 있어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지점은 애써 미화하거나 과장하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정신대 운동에 헌신하기 전까지 마음을 열지 않고 망설이던 모습, 그리고 해방 직후 유곽에서 일한 전력, 동두천 기지촌을 전전하며 일명 '마마상'으로 일한 과거를 짚는다. 다큐멘터리스트로서 고민이 컸을 지점으로 보인다. 영화에 출연하는 여성 활동가들 또한 그 지점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기지촌 생활, (일명) 색시 장사라고 사실 포주 역할을 하신 건데 그런 민감할 수 있는 부분을 어디까지 어떻게 이야기할지 초반에 고민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말해야 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기로 했다. 후반으로 갈수록 김순악 선생님의 여러 증언이나 주변 사람들 말을 당사자에게 직접 확인할 수 없기에 얼마나 제가 해석을 덧붙일 수 있는가가 고민이었다. 꼭 100% 고증된 게 아니더라도 (김순악 선생을 바라보는) 다양한 여성들의 해석 등 여러 버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향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왜 유곽 생활 등을 했고 거기서 안 벗어났는지 처음 이야기를 접하는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물론 여러 차별과 배제가 있긴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고등 교육, 대학 교육도 받는 상황에서 여성들도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기에 당시를 상상하긴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출연자분들은 당시 환경적 제한, 시대적 제한, 그러니까 글도 못 배운 여성이라는 걸 떠올리면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래서 그분에 대한 이견이 그리 크진 않았다." 


그렇게 한 개인의 삶을 관찰하고 영화로 만들어 내면서 박문칠 감독 본인은 어떤 생각의 변화를 겪었을까. "자주 찾아뵙고 싶고,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분, 삼계탕과 백세주를 좋아하셨던 분"이라는 고인의 취향을 언급하며 감독은 말을 이었다. 

"많이 외로우셨던 것 같다. 아무리 자식이 있고 주변 사람이 있어도 그 안에서 외로움을 느끼셨을 것 같다. 그분이 인생의 중요 순간에서 내린 선택, 삶을 대하는 자세에 울림이 있는 것 같다. 수동적으로 당하기보다는 선택을 하셨다. 가난했고 생계가 중요했기에 자기 몸으로 할 수 있는 노동에 충실하셨다. 그리고 치열하게 사셨다. 본인 노동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도 했다. 식모살이 말씀할 때도 본인이 깔끔하게 했고 음식을 맛있게 했다고 하시지 않나. 흔히 우리가 천하다고 여길 수 있는 직업에서도 그분은 최선을 다했다. 거기에 큰 울림이 있지 않나 싶다."

관객을 만난다는 것

 

다큐멘터리영화 <보드랍게>를 연출한 박문칠 감독. ⓒ 박문칠

 
캐나다 출생 이후 한국으로 역이민 온 이후 직장을 그만두고 영화인으로 살고 있는 그는 지금까지 사적 역사,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시도를 꾸준히 해왔다. 자전적 다큐멘터리 <마이 플레이스>, 사드 배치 문제를 조명한 <파란나비효과> 등이 대표작이다. 극영화를 경험한 뒤 이처럼 다큐인이 된 그는 여전히 할 이야기가 많아 보였다.

"극영화 작업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데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이 많았다. 그 와중에 내 삶에서 중요하거나 애착이 있는 대상을 얘기해 봐야겠다 싶었다. 그래야 (영화하면서 느낀) 난관을 뚫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렇게 논픽션을 하고 있다. 인간을 다루는 이야기가 재밌더라. 

주변을 관찰하든 제 안에 있는 얘길 하든 하고 싶은 얘긴 계속 생기는 것 같다. 요즘은 영화를 만드는 어려움보단 사람들이 영화 자체를 잘 안 보니까 누구와 어떻게 관람하고 소통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크다. 영화를 계속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어떤 형식으로 영화를 사람들과 나눠야 할지가 요즘 관심사다."
보드랍게 박문칠 위안부 김순악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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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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