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 인천 연안부두에 왜 러시아군 추모비가?

등록 2020.08.14 09:42수정 2020.08.1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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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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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 하면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연안부두입니다. 그곳에는 중국과 옹진군의 섬들로 가는 여객터미널이 있으며, 또한 인천에서 가장 큰 어시장도 있지요.

연안부두는 대부분의 바닷가가 부두와 산업시설로 가득 찬 인천에서 소래포구와 함께 일반 시민들이 바다를 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역입니다.


그런 연안부두에 2013년부터 새로운 볼거리 하나가 추가되었습니다. 바로 연안부두 앞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입니다.

2010년 한-러시아 우호 교류 합의서 채택으로 인천-상트페테르부르크시 간 자매결연 체결이 합의되었으며, 이후 그 상징으로 2011년 10월 14일 연안부두 앞의 광장을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광장에는 러시아와 관련된 여러 조형물들이 등장하게 되었는데요, 입구에는 상트레테르부르크 피의 성당 탑 조형물이 서 있고, 중앙에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전통인형 마트료시카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광장 한 켠에는 2004년부터 자리를 지켜왔던 조형물이 하나 서 있는데요, 바로 러일전쟁 100주년을 맞아 러시아의 요청으로 세워진 러일전쟁 전사자 추모비입니다.

최초의 제국주의 전쟁이자 제0차 세계대전이라 불리는 러일전쟁. 그 시작이 이곳 인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제물포 전투였습니다. 접전 40분 만에 일본 함대가 두 척의 러시아 함대를 침몰시켰고, 이를 시작으로 벌어진 전쟁에서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죠. 바로 이때 부상당한 러시아 병사들이 치료받은 곳이 인천 내동의 성공회성당 자리에 있었던 성누가병원입니다.


청일전쟁에 이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우위권을 점하게 되었고, 결국 이는 1년 뒤 을사조약과 함께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인천 앞바다에서의 일본의 승리가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의 하나의 단초가 되었죠.

현재 인천 연안부두는 커다란 변화에 직면해 있습니다. 갑문으로 유명한 인천내항의 산업시설들이 송도 신항으로 모두 옮겨지고 내항이 친수 복합 해양공간으로 다시 태어남에 따라 그 옆에 있던 연안부두 역시 새로운 전기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시민 친화적인 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 연안부두의 고민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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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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