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에게 초점 맞추는 보도행태… 다른 피해자 만든다

[수술대 오른 언론①] 'N번방' 문제적 언론 기사 분석

등록 2020.07.31 13:40수정 2020.07.3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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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은 광신도나 반사회적 성격장애자가 아닌 상부의 명령에 순응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됐다. 유대인 박해의 실무 책임자는 아이히만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체포되기 전 포악한 성질을 가진 악한 사람일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를 검진한 정신과 의사들조차 아이히만은 매우 정상이라고 판명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이를 지칭하는 개념이 '악의 평범성'이다. 평범한 사람이 사회 구조나 요구에 따라 가학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다는 뜻으로 구조적 문제나 사회 분위기 등에도 원인이 있을 수 있음을 내포한다.

이번 'N번방 집단 성착취 사건'도 구조적 문제에서 바라봐야 하는 디지털 성범죄다. 한국 사회는 성(性)을 대하는 데 있어 여성과 남성 간의 차별이 존재해왔고 '성착취'라는 혐오로 뿌리내릴 정도로 역사가 깊었다. 이런 사건을 두고 가해자를 '악마', '괴물', '그놈' 등으로 표현하는 건 범죄의 구조적 특성을 무시하고 가해자 개인에게서만 문제 원인을 찾게 되는 위험이 존재한다. 본연의 역할은 잊은 채 헐레벌떡 트래픽 경쟁에 달려든 언론은 이런 영향을 고민할 새가 없었다. 조주빈이 스스로를 '악마'라고 칭하자 그대로 기사에 옮겨 적기 바빴다.

그들은 악마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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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박사방'에서 운영자 조주빈을 도와 성 착취물 제작·유포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된 '부따' 강훈이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세계일보 기사([단독] 초등생까지 표적 삼아… 성범죄 마수 뻗은 'n번방 그놈')는 문 대통령의 수사 촉구와 수사 상황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기사 제목에서 '그놈'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가해자들을 특수한 개인으로 묘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경제 기사(이용자 처벌한다는데도···"○○방 영상 찾아요" 분주한 악마의 손길)는 수사가 시작됐음에도 피해자의 성착취물을 공유하는 이들을 비판하고 있다.

2차 가해를 알리는 기사지만 제목에서 '악마의 손길'이라 하며 마치 특정한 사람들만 저런 행위를 하는 것처럼 인식시킨다. 하지만 디지털 성범죄는 한국에서 하나의 산업이 됐을 정도로 거대한 사회 문제다. 또한 "영상 찾아요"와 같이 가해자들의 불필요한 말을 인용해 클릭을 유도하고 있다.

거대 일간지 중 하나인 조선일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단독] 그놈이 여친이라 부른 여성도… 성착취 노예였다' 기사는 경찰 조사 중 조주빈 진술 하나에서 얻은 정보를 제목으로 삼고 '단독' 타이틀을 달았다. 내용에서도 피해 여성에 대한 심층적인 접근을 찾아보긴 힘들었다. 또한 조주빈의 얼굴을 가면과 합성해 자료 사진으로 사용하면서 '가면 뒤에 숨은 특정 인물'로 매도할 가능성을 만들었다. '뒤틀린 성욕 'n번방' 그놈들은 성도착증 환자?(세계일보)'에서도 '뒤틀린 성욕'과 '그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개인의 비뚤어진 성 관념으로 치부해 버렸다.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다

일부는 '악의 평범성'에 너무 집중했던 탓일까. 언론은 조주빈의 자서전을 대신 써주기도 했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학점은 몇 점인지, 성격은 어땠는지, 무슨 활동을 했는지 모두 보도했다. 계속해서 그가 얼마나 평범했는지 설명했다. 그러나 '악의 평범성'의 기본 개념을 다시 떠올려보면 조주빈의 과거 행적을 비추라는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평범한 사람이 사회 구조나 요구에 따라 가학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뒤에 있다. 평범함에 녹아있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가해자의 평범함은 '평범하다'는 단어 하나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성폭력 예방기사 쓰고 뒤에선 성착취…'두 얼굴' 조주빈(헤럴드경제)' 기사는 범죄의 가해나 피해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가해자의 과거 행적들을 나열했다. "그는 일상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숨긴 채 평범하고 선량한 젊은이로 살아 온 '두 얼굴'의 인물이었다"라는 표현은 서사를 부여해 범죄 심각성을 지운다. 심지어 조주빈이 학보사 활동 당시 작성한 기사 내용까지 언급하며 사건 본질에서 벗어난 정보를 담았다.

'장애인 돕던 오빠가 'n번방' 그놈이었다(조선일보)'에서는 조주빈의 과거 봉사 사진을 사용하여 사람들의 단순 호기심을 유도했다. 또한 여기서도 '선량한 청년'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며 서사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갓갓'인 문형욱에 대한 기사도 비슷했다. '공대생 '갓갓'의 두 얼굴… "정말 조용하고 평범한 학생"(국민일보)'에서는 문형욱 지인의 말을 인용해 "그가 매우 평범하고 범죄를 저지를 사람 같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런 서사 부여의 반복은 가해자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해 법정에서 범죄가 실수 정도로 여겨지게 할 가능성이 있다. 가해 사실에 정당성을 부여할 위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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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로 송치되는 '박사방' 조주빈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 등 수십 명의 여성을 협박, 촬영을 강요해 만든 음란물을 유포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씨가 25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기 위해 호송차로 향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범죄를 예민하게 바라보려는 노력은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첫 번째 단추다. 자극적, 선정성 보도가 아닌 보도 윤리를 지키며 사회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가 필요한 이유다. 다행히 언론이 경쟁적으로 가해자 중심 보도에 뛰어든 만큼 문제 제기도 빨랐다. SBS가 단독으로 조주빈의 신상을 공개한 이후 하루 만에 전국언론노동조합에서 긴급 지침을 발표했고, 시민단체의 비판도 잇따랐다. 언론 내부에서의 자정의 목소리와 반성도 있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흐름은 지면기사와 온라인 기사의 담론 형성 차이다. 가해자 악마화와 서사 부여는 지면과 온라인 두 곳에서 모두 이뤄졌지만 지면기사는 상당히 적었다. 3월 9일부터 5월 15일까지의 지면기사 중 'N번방' 키워드를 포함한 기사는 1416개다. 이 중 60개의 기사만이 가해자를 악마화하고 있었다. 가해자의 불필요한 서사를 부각하는 기사도 1416건 중 46건이었다. 그러나 온라인 기사를 포함했을 때는 'N번방' 중 '봉사활동, 학보사, 이중인격, 성실, 착실' 중 하나라도 포함하는 기사가 775건으로 약 20배에 달했다. 결국 현재보다 나은 담론이 형성될 수 있었지만 수많은 트래픽 기사, 양산형 기사에 그 담론이 묻힌 것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지난 2019년 실시한 언론수용자 의식조사 결과, 포털이나 SNS, 유튜브 등의 동영상 플랫폼으로 뉴스를 접한 비율이 종이신문을 읽었다는 응답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소비자들이 접하는 기사의 대부분이 포털 사이트상에서 무분별하게 생성되는 받아쓰기형 기사와 클릭 유도를 위한 기사들이란 소리다. 결국 사회의 성 담론을 건강하게 형성하는 물꼬를 트기 위해선 긍정적 노력을 하는 언론사 수가 더욱 늘어나야만 한다.
#N번방 #언론 #성인지감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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