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한국독립당 창당, 감찰위원장 맡아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 / 29회] 한국독립당은 김구와 이시영 등 임시정부 정통세력이 처음으로 만든 임정의 방계 조직이다

등록 2020.08.05 16:32수정 2020.08.05 16:32
0
원고료로 응원
 
a

이시영(1868-1953) ⓒ 독립기념관

 
정세의 변화는 이시영의 '칩거'를 오랫동안 용인하지 않았다.

1927년 4월 중국에서는 장개석이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정부를 수립하고, 10월에는 모택동이 정강산에 근거지를 구축했다. 국내에서는 이에 앞서 1926년 4월 순종이 붕어하고, 6월에는 6ㆍ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27년 1월 좌우연합으로 신간회가 발족하였다.

중국 관내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1926년 12월 김구가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면서 그동안 혼란했던 체제가 바로 잡히게 되고, 의열단원 나석주가 서울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제 경찰과 교전 끝에 자결하였다.

1929년 3월 만주의 독립운동기관 정의부ㆍ참의부ㆍ신민부가 길림성에서 제2차 통합회의를 열고 국민부로 통합하였다. 명분은 교민자치 기관임을 내세웠으나 무장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이었다. 9월에는 재만한인 중앙의회를 개최하고 자치와 혁명을 분리하여 자치는 국민부가, 혁명은 민족유일당 조직을 개편하여 조선혁명당이 담당키로 하였다. 이 해 국내에서는 11월 3일 전라도 광주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민족진영 독립운동가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은 1927년 중국의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면서 공산주의세력이 급격히 성장하고, 이의 영향으로 독립운동계의 사회주의세력이 비대해지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강화되었다. 이에 맞서 태동한 것이 한국독립당이다.

좌익계는 민족계열에 도전적인 자세를 취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노선을 비판하는 등 모든 일에 사사건건 물고 늘어져 민족진영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에 대항할 수 있는 회합을 결성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놓이게 됐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시영을 비롯한 백범ㆍ이동녕ㆍ조완구ㆍ윤기섭ㆍ조소앙ㆍ안창호 등이 상해 프랑스조계 대한민국임시정부 판공처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주석 5)


한국독립당은 김구와 이시영 등 임시정부 정통세력이 처음으로 만든 임정의 방계 조직이다. 이시영은 감찰위원장에 피선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의해 조직된 한국독립당은 민족진영의 쇄신을 도모하고 지방적ㆍ파벌적ㆍ학문적 감정을 청산하여 해외 독립운동 전선의 통합을 기약하려는 큰 뜻을 또한 갖고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당은 초기에는 당력을 보강하기 위해서 정세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1931년 4월부터 한국독립당의 공식적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은 당정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주석 6)

한국독립당은 기본강령으로 국가의 독립을 보위하며 민족의 문화를 발양할 것. 계획경제를 확립하여 균등경제의 복된 생활을 보장할 것. 전민족의 정치기구를 세워서 민주공화의 국가체제를 완성할 것. 국비교육시설을 완비하여 기본지식과 필요기능을 보급할 것. 평등호조를 원칙으로 하는 세계일가를 실현하도록 노력할 것 등이었다. 한국독립당의 기본이념은 삼균주의를 토대로 하고 있었다.

선전활동의 일환으로 『한보(韓報)』ㆍ『한보특간(韓報特刊)』ㆍ『상해한문(上海韓聞)』ㆍ『진광(震光)』 등을 발행하였다. 광동지부는 『한성(韓聲)』을 별도로 발행하였다.

『한보』는 한국독립당에서 발행한 최초의 기관지였다. 한인들에게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발행되었으며, 미주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들에게도 발송되었다. 『한보특간』은 『한보』의 자매지로 "일본제국주의의 흑막을 폭로하고 독립당의 정체(正體)와 중한 두 나라의 우의를 고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한국독립당 본부가 있었던 사흠방 입구 ⓒ 조종안

 
한국독립당은 집단지도체제의 중앙집권제였다. 중앙조직은 중앙당부와 구회(區會)ㆍ지회(支會)의 형태를 갖추었으며, 이사장제를 체택하였다. 이사장은 10명 내지 13명으로 구성된 이사회를 대표하고 당무를 집행하는 당의 최고책임자이었다.

한국독립당의 초대 이사장에는 이동녕이 추대되고 1932년 4월 윤봉길의거 이후에는 송병조가 이사장에 선출되어, 1935년 7월 한국독립당이 해체될 때까지 역임하였다.

중앙당부는 최고의결기구인 당대표회의와 이사회ㆍ감사로 구성되었다. 당대표대회는 각 구회와 지부의 대표들이 참가하는 회의로, 중앙당부의 간부인선 및 당의 주요업무를 심의ㆍ결정하는 기구였다. 당 대표대회는 한국독립당이 결성된 이후 두 차례의 임시대표회의를 포함하여, 모두 아홉 차례 개최되었다. 이사회는 10명 내지 13명의 이사로 구성되었으며, 당의 업무를 협의 추진하는 운영기구였다. 이시영은 당이 해체될 때까지 이사직을 맡았다.
 
 
a

대전자령 전투의 유적지 길림성 왕청현. 대전자령 전투는 한국독립당 산하 한국독립군의 항일전 사상 최대의 승전이었다. ⓒ 독립기념관 보도자료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조직ㆍ선전활동 뿐만 아니라 일제의 요인 처단이나 적기관의 파괴와 같은 의열투쟁을 명시하고 실행하였다. 상하이에 있는 일본 신사(神社)에 폭탄을 던진 강병학 의거를 시작으로 1932년 3월말에는 상해한인청년단의 이덕주ㆍ유진만ㆍ유진식을 조선통족 우가키를 처단할 목적으로 국내로 파견하였다. 또한 4월에는 유상근과 최흥식을 따리엔(大連)으로 파견하여, 일본 관동군사령관 혼조와 만철총재 우치다 폭살을 계획하였다.

비록 이들의 의거계획은 좌절되었지만, 한민족의 강렬한 독립의지와 항일의식을 일깨우는 데에 충분하였다. 산하단체로 상해한인청년단ㆍ상해한인애국부인회ㆍ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ㆍ상해한인청년동맹 등이 있었다. 산하단체들은 당원모집과 양성기관 역할을 수행하였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해체되었다. 한국독립당은 1920년대 중반 중국 관내지역 민족유일당운동의 결실로서 민족주의진영의 대표적인 독립운동정당이었다. 임시정부의 여당역할을 수행하면서, 많은 선전활동과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주석 7)


주석
5> 추헌수 편, 『자료 한국독립운동』2, 86쪽, 연세대 출판부, 1971.
6> 이은우, 앞의 책, 143쪽.
7> 조범래, 「한국독립당」,『한국독립운동사사전(7)』, 346쪽, 독립기념관, 2004.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AD

AD

인기기사

  1. 1 "왜 진중권을 두둔하세요?" 제자의 당황스러운 공격
  2. 2 윤석열 총장은 우선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3. 3 [영상] '조국 딸 모욕' 고소당한 일베 "전과 남나요?"
  4. 4 [오마이포토] 류호정 의원 1인시위 바라보는 문재인 대통령
  5. 5 TV조선, 종편 재승인 조건 넘겨... 채널A는 '구사일생'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