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당신보다 하루 먼저 죽고 싶지 않다

계속되는 장애인 존비속 살인 사건

등록 2020.07.10 09:48수정 2020.07.10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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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3건의 발달장애인 존비속 살인이 있었다. 하나는 광주 성인발달장애인 질식사 후 부모 자살 사건, 또 하나는 제주도의 18세 장애학생의 죽음과 부모 자살 사건이며, 나머지 하나는 자폐성 발달장애 9세 딸 살해사건에 징역 4년을 선고한 사건이다.

광주의 경우에는 코로나로 인한 국가 개입의 부재가 부른 범죄가 분명해 보이고 제주도 사건은 양육부담 이외에도 다른 원인도 있으리라 여기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마지막 울산 사건의 경우는 부모 한쪽도 자살을 시도했지만 미수에 그쳐서 처벌을 받은 사건이다.

특히나 중증 장애인의 경우,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사회적 지원과 협력이 모두 중단된 나머지 장애인의 돌봄이 모조리 가족들에게 전가되어 모두가 최악의 상황에 몰려가는 중에 일어난 것이라 더욱 충격이 크다. 따라서 그 지역 부모님들이 '발달장애인 부모 일동'의 이름으로 참담한 사연들을 담아 국가적 지원과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는 청와대 청원까지 제기하셨다.

그리고 필자는 그 청와대 청원의 표현에 대하여 인권 감수성에 문제가 있다면서 공식적으로 SNS를 통해 반대했고 많은 장애인 부모로부터 비난과 질타를 받았다.

중증 장애인의 지원과 조력, 그리고 돌봄에 있어 장애인 부모들의 극한의 어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분노하며 당신들의 요구에 대한 나의 입장은 분명히 동일하다. 그러나 이번의 죽음에 대하여 활동가들과 인권 단체들은 이제 불편하고 고통스런 토론과 논쟁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장애인의 문제가 인권의 문제이며 소수자의 문제라면 이제 우리는 단순하고 감정적인 온정주의와, 무책임하고 무비판적인 연대와 침묵에 대한 성찰과 실천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동안 오랜 역사의 유교적인 가족주의에서 만들어진 법체계 내에서 자녀에 의한 부모의 살인 즉 존속 살인은 과중하게 처벌하고 – 우리나라는 '존속 살인' 이란 개념 아래 이를 가중 처벌하는 법조문을 가진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이다 - 그동안 경제 발전이란 미명 아래 부모에 의한 자녀의 살인은 오히려 감형해주는 기형적이며 가부장적인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감형의 근거는 과거 첫 번째가 '경제적인 이유'였고 두 번째가 '정신적인 이유'였다. 법원의 이런 온정주의는 90년대 후반부터 변하기 시작하여 사회적 여론도 점차 변하기 시작했으나 장애인 자녀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제자리다. 인권 활동가들과 인권 단체들은 이제 장애인 부모단체가, 일부 활동가들이 돌봄의 부담에 대해 국가적, 사회적 책임을 묻기 위하여 위의 청원처럼 자녀들의 죽음과 비자발적 안락사를 설득의 서사로 활용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 물음을 던져야 한다.


이것은 돌봄으로 야기된 어려움을 폭력과 반인권적으로 푸는 것을 합리화하거나 정당화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으며 장애에 대한 자기혐오일 뿐 아니라 단체 이름으로 자행되는 집단 혐오이다. 그 언어들이 아무리 공감되고 설득된다 한들, 우리가 다른 소수자들에게 같은 언사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가?

집단의 표현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크게 준다. 당신들의 위치가, 발언 당사자들로서의 당신들의 힘이 문화적으로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대중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풀어낸 감성적인 표현들이 보다 높은 인권 감수성으로 정제 되지 않으면 오히려 차별과 혐오를 스며들게 하는 반작용이 있다.

무엇보다 이 대목 "6월의 어느 날 새벽 발달장애청년과 그 엄마는 차안에서 연탄가스를 교통편 삼아......"로 이어지는 묘사 같은 것이 문제이다. 이런 표현들은 청원의 의도와는 달리, 발달 장애인의 존재부정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보낸다. 개인이 아니라 인권 단체라면 먼저 이 부모의 일방적인 폭력과 살의에 사과하고 국가의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 사건은 명백한 부모 폭력이며 극단적 장애인 학대 사건이다. 정책적으로 국가가 방조 · 방기한 살인 사건이며 정부는 미필적 종범이다.

아무리 부모가 힘들고 고통스럽다 한들 단체 이름으로 그 살의와 살인을 표현하고 집행하는 것을 정서적으로라도 용인하면 안 된다. 상처와 이해라는 이름으로 상상하는 행위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부모라는 권력과 관계가 살인을 쉽게 도모할 수 있게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비극과 안타까움의 이름으로 이 폭력과 범죄의 현실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방법, 다른 길이 있다고 외쳐야 한다. 장애인 비속 살인은 극단적 선택이 아니다. 상상으로라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장애인을 개별 주체로 보지 않겠다는 자기혐오이자 순환 혐오일 뿐이다. 특히 광주와 같은 사건에서 장애인 당사자가 부모와 함께 자살하는 것에 동의 했는지, 부모가 장애인 당사자 살해 후 자살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 명확하게 경찰이 사건 조사를 하지 않은 것도 분명히 문제 제기 해야 한다 - 장애인 당사자 살해 후 자살이라면 이건 분명 비속 살인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장애인 당사자가 억울한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당사자가 죽음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않았다면 극단적인 장애인 학대일 뿐이다. 단지 안타까운 사건으로만 말하는 언론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온정주의적인 대중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부모단체와 인권단체들이 보다 민감하게 다른 방법이 있음을 외치지 않는다면, 아무리 사회적 지원이 많아지고 풍부해지더라도 이런 사건은 반복될 것이다. 1990년대부터 그마나 늘어난 사회적 지원에도 지금까지 장애인 가족의 존비속 살인은 크게 줄지 않았다.

단체 청원이라고 하면, 인권단체라고 하면, 얼마든지 더 강한 표현으로 더욱 세고 다르게 청원할 수 있다. 장애인의 비속 살인을 멈추라. 가족들을 살인자로 만들지 마라. 이렇게 강하게 정부를 규탄할 수 있다. 장애인 부모 단체의 그 대표성이 개인화되지 않고 더 높은 인권감수성으로 더 많은 대중들에게 해결을 위한 강한 정치력과 연대를 끌어낼 수도 있다. 대중들이 발달 장애인에게 높은 인권감수성을 갖추기를 바란다면 부모 단체들과 인권단체들이 이를 이끌어 주면 좋지 않겠는가?

이런 사건과 청원을 접하는 대중들과 부모들이 장애와 장애인을 단지 '고통과 부담'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기를, 장애인 당사자들이 살인과 살해의 공포에 놓이지 않기를, 가족의 우울 앞에 당사자가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를, 부모들의 삶과 장애인 당사자의 삶이 온전히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법적으로 개별주체로 인식되어 지원되고 발달 장애란 존재 자체가 부정되지 않길 바란다.

장애인의 주체적 존중과 국가 책임제를 요구하는 마당에 이는 지극히 자기 모순적이며 자기혐오, 순환 혐오이다. 공적인 발언을 통해 그런 인식을 자꾸만 재생산하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최소한 장애인 당사자를 죽음으로 이끈 부모가 같은 단체소속이고 같이 활동했다는 이유로, 돌봄의 책임을 죽음으로 다했다는 명예를 주는 것은 그만 목격하고 싶다.

최소한 함께 명복을 빌고 안타까워하더라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자리에서 죽음을 논하는 것은 전혀 인권적이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밝히고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립니다. 이 글을 쓴 김형수님은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으로 활동 중입니다.
#장애인인권 #존비속 #약자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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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대는 1999년 7월 2일 창립이후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에 따라 국내외 인권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인권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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