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9 07:58최종 업데이트 20.07.09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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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위해 다주택자와 단기간 투기성 매매자에 대한 세금을 인상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사진은 5일 오전 경기도의 한 아파트 건설현장 모습. 2020.7.5 ⓒ 연합뉴스

 
부동산 개혁은 검찰 개혁보다 힘들다. 검찰청 같은 권력기관의 구성원들은 '국록'에 의존하는 샐러리맨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조직과 활동은 법의 규제를 상당부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부동산 투기 세력은 독자적인 경제 기반을 갖고 있고, 조직과 활동 역시 법적 규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또 부동산 정책은 재벌 개혁보다도 힘들다. 재벌 총수 일가는 국록에 의존하는 샐러리맨들은 아니지만, 사회적 감시가 심한 제도권 경제 내에 있기 때문에 법과 제도를 어느 정도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부동산 투기 세력은 지하경제에 숨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이들은 법과 제도에 덜 얽매이게 되고 또 실체도 잘 드러나지 않게 된다.


세무사 정연태의 <지하경제와 죄악세> 등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 혹은 5분의 1은 국세청이 파악할 수 없는 지하경제로 스며들어간다. 이는 대한민국 경제 권력의 20%나 25% 정도가 법과 제도의 밖에 있음을 의미한다. 부동산 투기 세력의 상당수가 이런 지하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들과의 싸움은 안개 속에서 칼을 휘저어대는 양상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부동산 소유자의 위세, 예나 지금이나

땅을 많이 가진 경제적 상류층은 어느 시대건 다루기 힘든 존재였다.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에는 관직 같은 것 없이도 사회적 위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 정조 임금 때의 무관 노상추가 남긴 일기에 따르면, 오늘날의 서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부근의 훈련원에 근무했던 경상도 선산군 출신의 노상추는 지금의 충무로역 인근에 세 들어 살면서 집주인의 갑질에 말도 못 하게 시달렸다.

노상추의 지위는 군수급 이상이었다. 그런 그에게 기와집 사랑채를 전세보증금 27냥에 내준 집주인은 1개월 만에 그를 내쫓으면서도 보증금을 10냥밖에 반환하지 않았다. 내가 좀 썼으니 이것만 받고 그냥 가라는 식이었다. 다른 세입자와 이중계약을 하면서 40냥을 받았으니, 17냥이 없지도 않았다. 없어서 안 준 게 아니라, 그냥 안 준 것이었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노상추는 소송을 걸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에서 검색되는 노상추 일기를 읽어보면, 그가 소송을 걸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집주인은 자기 집에 세 들어 사는 다른 공직자들에게도 위세를 부렸다. 그 위세를 노상추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듯하다.

과거시험 성적이 출세에 영향을 주는 관료들에게 '행복은 성적순'이었다. 하지만, 과거시험 안 봐도 위세를 부릴 수 있는 집주인들에게 '행복은 경제력 순'이었다. 그런 그에게 소송을 걸면 피곤해지는 것은 노상추뿐이었다. 설령 소송에서 노상추가 이긴다 해도, 집주인은 아무 일 아닌 듯이 17냥을 던져주면 그만이었다. 노상추에게는 큰돈이어도 집주인에게는 '껌값'일 수 있는 돈이었다.

관직이 없으면서도 중·고위직 관료들을 함부로 대하는 집주인들의 모습은 여타 기록들에서도 확인된다. 어느 시대건 간에 토지와 돈을 가진 이들은 관직이나 명성이 없어도 위세를 부릴 수 있었으며, 나라님이나 정부 고관일지라도 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상류층의 상당수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다. 조선시대 경우에는, 그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법적으로 노비 신분을 유지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세조(수양대군) 때 있었다.

음력으로 세조 13년 7월 4일자(양력 1467년 8월 3일자) <세조실록>에 따르면, 세조 정부는 '함길도(함경도) 국경 방어를 위해 쌀 50석(100가마)을 헌납하고, 이것을 자기 비용으로 함길도까지 운반해주는 노비에게는 면천 특혜를 제공하겠다'는 정책을 실시했다. 함길도에 보낼 군수물자도 부족하고 거기까지 운반할 재정 여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개월 뒤 정부는 이 정책을 취소해야 했다. 뜻밖의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수의 노비들이 50석을 내놓는 바람에, 과도한 노비 면천을 우려해야 할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법적으로는 노비이면서도 경제적으로는 갑부 생활을 하는 노비들의 규모에 당시 정부는 크게 당황했다. 공권력이 파악하지 못 하는 지하경제 규모가 상당했던 것이다.

세조의 할아버지인 태종 이방원 때부터 시도된 저화(지폐) 유통정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한 이유 중 하나도 여기 있다. 지하경제를 배경으로 정부 정책을 무력화시키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검찰 개혁보다 훨씬 어려운 부동산 개혁

예나 지금이나 주요 경제정책은 그런 세력들과의 싸움이다. 부동산 정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 정책은 집을 1채 가진 사람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많은 부동산을 자기 혹은 타인 명의로 보유하고 가격 등락과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집단과의 싸움이다. 이들 중 일부는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 싸움은 한층 더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부동산 개혁은 검찰 개혁이나 재벌 개혁보다 훨씬 힘들 수밖에 없다. 개혁에 열의를 가진 대통령이나 청와대 참모진도 쉽게 지치게 되거나 중도 포기하게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 점이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에도 절절히 표현돼 있다. 이백만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이 2006년 11월에 쓴 '가격이 너무 오른 지금 시점에 집을 샀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으므로, 조금 기다렸다가 집을 사라'며 부동산 거래 자제를 요청하는 글이 나간 뒤의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언론들이 난리가 났다. 모든 미디어가 '집 사면 낭패'라는 제목을 달아 청와대와 홍보수석을 비난했다. 문책 경질하라는 사설이 줄을 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왜 강남에 사느냐는 인신공격과 아파트를 편법 분양받았다는 의혹 제기까지 나왔다. 민정수석실에서 조사를 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백만 홍보수석에게 이메일을 보내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문제로 11·15 조치의 초점이 흐려질 우려가 있다면서 사표를 냈다.
 
정부와 부동산 투기 행위자의 일대일 관계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정부가 우월적 위치에 있다. 하지만 투기 세력 자체를 놓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들의 전체 숫자가 적지 않고, 실체가 불명확할 뿐 아니라, 파워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재산 규모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이들은 오래 버티면서 지구전을 수행하기에도 유리하다.

대선은 5년에 1회, 총선과 지방선거는 4년에 1회 있으므로, 3년에 2회 정도는 선거가 치러지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투기 억제책이 나온 뒤부터 최대 1년 반 정도만 버티면서 '경제가 어려워진다', '이러다가 나라 망한다'는 여론전을 펼치면, 정부나 여당 내에서도 이탈자가 생길 가능성이 커진다. 지역 유지들의 동향을 의식해야 하는 총선이나 지방선거 출마자들이 정부 정책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이러다 보니, 역대 정권은 투기 세력과의 싸움에서 대체로 공통적인 약점을 드러냈다. 이 약점이 부동산 정책의 실패로 귀결되곤 했다. 그 약점은 다름아닌 뒷심 부족이다.

역대 정권의 부동산 억제책은 투기를 막고 가격 상승을 꺾겠다는 의도로 나온 것들이다. 정책의 질적 수준에서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다들 똑같은 공통 목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정책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책이라도 꾸준히 시행만 됐다면, 부동산 문제가 이미 예전에 꽤 해결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정권은 뒷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번번이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이것이 부동산 정책의 주요 실패 원인이었다.

2007년에 <사회경제평론> 제29(1)호에 실린 전강수 대구가톨릭대 부동산통상학부 교수의 논문 '부동산 정책의 역사와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은 "역대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투기가 기승을 부릴 때 그것을 잠재우는 효과는 분명히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며 "그러나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동산값 폭등이 재연되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정책들이 얼마 안 가 대부분 실패한 원인과 관련해 이 논문은 "(이유 중) 하나는 부동산값이 폭등할 때는 투기억제 대책을 쏟아내다가도, 부동산 시장이 침체하는 기미가 보이면 바로 이전의 대책들을 후퇴시키고 부동산 경기 부양책을 추진했다는 점"이라고 설명한다.

투기를 잡겠다며 팔을 걷어붙인 정권들이 막상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면 이것이 경기 침체로 연결되지 않을까 우려한 나머지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는 부양책으로 선회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 실패 요인 중 하나라는 것이다. 투기 세력이 주도하는 여론 선전전에 역대 정권들이 당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취임 2개월이 안 된 1993년 4월 16일, 김영삼 대통령은 '부동산을 많이 가진 것이 고통이 되도록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해 4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 '부동산 많으면 고통받게 할 터'는 김영삼이 청와대 회의에서 "이번 기회에 부동산에 관한 국민의식을 바로잡도록 하겠다"고 발언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하지만 그렇게 호언장담했지만, 김영삼의 정책은 오래지 않아 흐지부지됐다. 다행히 적극적인 부동산 경기 부양책으로 선회하지 않은 덕분에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부동산을 많이 가진 것이 고통이 되는 사회'를 만들지는 못했다.

김대중 정부 역시 초기에는 투기 억제에 열의를 보였다. 김대중은 부동산 보유세 강화를 통해 투기를 잡겠다고 대선 때 약속했다. 하지만 그 역시 IMF 외환위기의 파고 속에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기득권층의 요구에 밀려 도리어 역대 최악의 '부동산 경기 부양책'들을 내놓고 말았다. 노태우·김영삼 때보다도 못한 정책적 후퇴를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역대 정권들이 뒷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번번이 무너진 것은, 이 일이 정권 혼자 해낼 수 없는 일이 아님을 의미한다. 옛날 임금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대통령들도 부동산 대규모 소유자들과의 싸움을 홀로 수행해서 승리할 수 없음을 뜻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오후 청와대에서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연합뉴스


결국은 국민의 힘

결국 '국민의 응원'이 관건이다. 정부와 투기 세력이 싸울 때 국민이 정부를 열렬히 응원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정책결정 그룹이 동요하지 않고, 여당의 선거 출마자들도 동요하지 않게 된다. '국민은 투기 세력과 싸우는 세력을 지지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줘야만, 정부와 여당 내에서 균열이 생기지 않고 추진력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

그런데도 부동산 문제만 나오면, 상당수 국민들은 중립적인 관전자가 되거나 정부를 비판하는 쪽에 가담한다. 집을 한 채만 가진 사람들 중에도 그런 대열에 가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투기가 억제되고 경제정의가 실현되면 이익을 받을 사람들까지도 알게 모르게 투기 세력을 편드는 일이 적지 않은 것이다.

사실, 부동산 투기 문제는 '집이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집을 많이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싸움이다. 그래서 정부 정책이 실패하고 가격이 폭등해서 양극화가 심화되면, 집이 없는 사람들뿐 아니라 집을 1채만 가진 사람들도 피해를 보게 된다. <운명이다>에서 노무현은 이렇게 호소했다.
 
부동산 가격 상승은 그 자체로서 국민의 삶을 고단하게 만들고 국민경제의 경쟁력을 해친다. 그것은 또한 경제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결정적 요인이다. 부동산 거품을 방치하면, 언젠가는 거품이 꺼지면서 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이런 위기를 막고 가계 경제를 지키려면, 집이 없든 있든 대다수 국민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응원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검찰 개혁이나 재벌 개혁보다 한 차원 높은, 정부의 힘만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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