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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미 소장의 죽음과 다시 생각해보는 '피해자 중심주의'

[주장] 누가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달콤한 말로 위하는 척하나

등록 2020.06.10 10:19수정 2020.06.1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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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열렸다. ⓒ 연합뉴스


서울 마포에 소재한 '평화의 우리집' 소장 손영미 선생이 지난 6일 숨졌다.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20년 가까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곁에서 노심초사하며 돌보던 이의 가슴 아픈 죽음이 최근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지난 5월 25일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기자회견장에서 읽은 글의 맨 끄트머리에 '여성인권운동가 이용수'라고 표기했다. 피해자로 멈추지 않고 실천을 통해 스스로 의식적인 운동가로서 성장했음을 당당히 밝혔다.

실제로 우리는 '위안부' 피해자나 고문 등 인권피해자들이 단지 억울함과 무죄 판결, 국가배상을 호소하는데 머물지 않고, 자신이 겪은 참혹한 고문이 우연히 '교통사고'처럼 발생한 것이 아니라 독재정권의 정치적 범죄의 결과이자 우리 공동체와 민족의 현실이 만들어 낸 구조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사회개혁과 민족문제 해결에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위안부'나 고문조작사건 등 인권침해 사건 피해자들의 정신적 트라우마 치유에서도 피해당사자들의 대자적 의식화와 역사적 사회참여는 전문 의사나 치료사들의 정신심리적 치료만큼 효과를 보일 때가 많아 '사회적 치유'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인권침해 피해자들이 이렇게 '운동가'로서 거듭나면서 정신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때, 다른 한편에서 '운동가'에서 '피해자'로 접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피해자들을 만나고, 조사하고, 돌보고, 그 아픔에 공감하며 같이 눈물 흘리면서 점차 피해자화(victimization)하는 '인권운동가'들이다.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운동가와 맞잡은 손과 눈물을 통해 운동가의 몸속으로 천천히 '전이'된다. 운동가들이 어느 순간 피해자들처럼 골목길을 쫓기다 지하 고문실에서 고문당하고 가위눌리는 악몽을 꾸게 될 때, 그리고 어느 순간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만의 공간으로 숨어드는 자신을 발견할 때, 그들은 누구의 이해와 공감도 얻지 못한다고 믿는 '피해자'의 처지로 빠져들게 된다.
  
1985년 채택된 국제연합(UN) 공식 문서인 '범죄피해자와 권력 남용의 피해자를 위한 기본적 사법원칙 선언'(이하 피해자 인권선언)은 피해자 지원에 대한 국제적 원칙과 기준을 밝히고 있다. 이 피해자 인권선언은 '권력남용의 피해자'를 "개별 국가의 형법 위반은 아니라 할지라도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인권 관련 규범에 반하는 작위 또는 부작위를 통하여 개별적 또는 집합적으로 신체적 또는 정신적 손상, 정서적 고통, 경제적 손실 또는 기본적 권리의 실질적 손상 등 손해를 입은 사람"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

피해자를 판단할 때는 범죄자의 확인, 체포, 기소 또는 유죄판결 여부를 묻지 않으며 피해자와 범죄자의 가족 관계 유무를 묻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피해자의 범주에는 직접적 피해자의 직계가족 또는 피부양자와 고통받는 피해자를 지원하거나 피해자화를 방지하기 위한 개입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 포함된다.


진정한 '피해자 중심주의'의 정신

이 UN 피해자 인권선언에 의하면, 20년 가까이 권력남용의 피해자와 함께하며 피해자를 지원하고 그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헌신한 '여성인권운동가' 손영미 소장은 당연히 '피해자'에 포함된다.

'위안부' 피해자 운동이나 과거 인권침해 사건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를 단순히 피해당사자만으로 국한지어 말하면 해당 사건(피해자)을 단순 형사범죄(피해자)로 잘못 인식하게 할 우려가 있다.

최근 미국에서 발생한 경찰에 의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살해사건을 규탄하는 시위에서 참가자들은 '내가 조지 플로이드다'라고 외치고 있다. 이 흑인의 죽음 뒤에 놓인 인종차별의 그늘이 존재하는 한 그 피해는 당사자만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의 것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위안부' 피해자 운동이나 과거 인권침해 사건을 다룰 때 '피해자 중심주의'의 원칙은 당사자를 넘어 우리 사회구성원 모두의 역할과 책임을 간과해서 안 된다. 피해자를 존중하고 옹호하는 데서 나아가 공동체의 책임을 인식하는 것이 진정한 '피해자 중심주의'의 정신이 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UN 피해자 인권선언도 권력남용의 피해 구제를 위해 국가가 법규범에 권력 남용을 금지하고 그 남용의 피해자에 대한 구제수단을 제공하는 조항을 둘 것을 권고하고 있다. 특히 이 구제수단에는 원상회복 및/또는 손실보상 및 물질적, 의료적, 심리적 및 사회적 원조와 지원을 포함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또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여 국가는 기존 입법과 실무를 정기적으로 검토해야 하고, 필요한 경우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심각한 남용 행위를 금지하며, 그와 같은 행위의 예방을 위한 정책과 메커니즘을 촉진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시행하고, 그 행위의 피해자를 위한 적절한 권리와 구제 수단을 개발하고 피해자가 즉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 운동과 같은 인권운동에서 피해자와 운동가의 구분은 겉으로 선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역지사지하고 결국에는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피해자 없는 운동가, 운동가 없는 피해자들이 어찌 온전할 수 있겠나. 오히려 지금까지 피해자를 철저히 외면해왔던 부류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달콤한 말을 내걸고 피해자들을 위하는 척하며 고립시키는 위선이 문제가 되고 있다.

어쨌든 그런 구분을 하거나 말거나, 피해자이며 운동가인 김복동 할머니와 운동가이면서 피해자인 손영미 소장은 하늘나라에서 이미 서로 소곤소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손영미 소장 #피해자 중심주의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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