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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잘난 사람도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하는 곳

[세상을 잇는 다리] 수양과 겸손을 배우는 백양사 쌍계루 앞 징검다리

등록 2020.06.18 08:53수정 2020.06.24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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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는 누군가 자신의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존재다. 또한 모든 것을 이어주는 존재다. ‘이음과 매개, 변화와 극복’은 자기희생 없인 절대 이뤄질 수 없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옛 다리부터, 최신 초 장대교량까지 발달되어 온 순서로 다룰 예정이다. 이를 통해 공학기술은 물론 인문적 인식 폭을 넓히는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편집자말]

쌍계루 징검다리를 건너는 연인 백양사 쌍계루 앞 징검다리 ⓒ 이영천


우리나라 최고의 징검다리를 꼽으라면 감히 백양사 쌍계루 앞 연못에 있는 징검다리라고 말하고 싶다. 쌍계루 앞에 돌로 제방을 쌓아 인위적으로 연못을 만들고, 물이 떨어지는 곳(落水)의 돌 제방 가장자리에 자연석으로 징검다리를 놓았다.

이 징검다리는 백양사를 드나드는 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쌍계루 좌우에 있는 무지개다리(虹霓石橋)는 1980년대 후반(불기 2531년)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 다리를 건너면, 가람으로 드는 길이 살짝 꼬이고 에둘러 가야만 한다. 이로 미루어, 쌍계루 앞 연못 징검다리가 백양사로 출입하는 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이는 가람 배치에서도 드러난다. 사찰로 들어오는 길 먼 곳에 통상 당간지주가 있다면, 사찰 입구에는 반드시 사천왕문이 있다. 우리나라 가람배치의 기본이다. 사천왕문은 일주문, 금강문 다음으로 배치하는 문이다.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쫒아, 불문에 드는 사람으로 하여금 착한 마음을 갖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백양사에는 비교적 최근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일주문이 멀리 외따로 떨어져 있고, 금강문은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예전엔 사천왕문이 제1문이었던 셈이다. 사천왕문은 쌍계루 앞 연못 징검다리를 지나면 바로 나타난다. 징검다리를 건너야만 백양사에 당도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두 번째 근거다.
 

백양사 쌍계루 앞 징검다리 사천왕문으로 직접 통하는 징검다리 전경 ⓒ 이영천


백양사 징검다리는 수양(修養)의 다리다. 무량청정토로 들어서는 속인을 한없이 겸손하게 만든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의 마음을 겸허하게 만든다. 물에 빠지거나 옆 석축 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몸을 낮추고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한다. 조신한 몸가짐으로 천천히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

연못에 비춰진 자기 얼굴을 쳐다본다. 속세에서 제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이 징검다리를 건너려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 겸손해져야 한다. 몸과 마음에 가득 찬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귀의(歸依)해야 한다. 아미타불과 미륵의 정신을 찾는 길에 들어서는 걸음이다. 보잘 것 없이 못생긴 다릿돌들이 길게 줄맞춰 늘어서서, 사람의 마음을 씻어준다. 이것이 징검다리다.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어 파란 가을 하늘을 희롱하는 계절이 오면, 수많은 나들이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단풍 색깔만큼이나 화려한 옷맵시를 뽐내며, 이곳 징검다리를 건넌다. 가족끼리, 친구들끼리, 혹은 연인들이 이 징검다리 위에서 수많은 약속을 한다. 지워지지 않을 추억을 쌓는다. 서로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노둣돌을 놓는다.

1894년 한겨울 이 징검다리를 건넜을 전봉준 
 

쌍계루와 징검다리 전경 백양사 앞 쌍계루와 징검다리 전경 ⓒ 이영천

 
1894년 섣달이 다가오는 추운 겨울. 공주 우금치를 넘지 못한 전봉준이 남쪽으로 후퇴한다. 논산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고, 전주에서 우의(友誼)로 맞아주는 전라감사 김학진을 만난다. 관리와 혁명가 사이가 아니었다면, 좋은 시절엔 평생의 벗이 될 수도 있었을 관계이다. 그간의 도움과 성원에 진정을 담아 인사를 한다.

그리고 원평과 태인에서 동학혁명군의 성화에 못 이겨, 추격하는 조·일연합군과 전투를 벌인다. 조·일연합군의 잔인한 살육 작전에, 울분을 참지 못한 동학혁명군의 마지막 항전이었다. 그 싸움을 끝으로 후일을 기약하기로 한다. 입암 천원역에서 갈재를 힘겹게 넘어 입암산성으로 접어든다. 산성에선 우의가 두터운 수비대장 이종록의 후의(厚意)로, 따뜻한 며칠 밤을 보낸다.

오랜만에 몸이나마 편안한 휴식이었다. 입암산성을 거쳐, 백양사로 고요히 깃든다. 전봉준은 백양사에 못 미친 청류암에서 며칠 밤을 유숙한다. 청류암에 드는 길은 어두침침하고 험하다. 길고 좁은, 깊은 골짜기에 은밀하게 숨겨진 암자다. 많은 스님들의 후의가 고맙기만 하다. 청류암에선 맑고 포근한 샘물을 마시고, 이름을 '남천감로(南泉甘露)'라 지어주었다. '남쪽 샘에서 나는 달디 단 이슬'이라는 뜻이다.

혁명전쟁에서 패배한 마음이 어땠을까? 달콤한 샘물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어 주었을까? 불의(不義)와 외세를 물리치고, 나라를 반석 위에 세우고자 했던, 큰 뜻이 꺾였다. 이제 당분간 지리산이든 어디든 깊은 산중에 은신하면서, 재기를 노려야 한다. 아니면 게릴라전술이라도 펼쳐, 나라 구하는데 온몸을 바쳐야 한다.

백양사를 떠나, 담양으로 돌아 나간다. 동행하는 일행은 겨우 몇에 불과하다. 정읍의 민보군을 피해, 순창 쌍치 피노리 옛 친구가 사는 마을로 스며든다. 친구 이름은 김경천이다. 그러나 그는 기회주의자였다. 돈과 벼슬에 눈이 멀어, 전주감영 군관출신 한신현에게 전봉준을 밀고한다.

한신현의 손에 잡힌 전봉준은, 12월 7일(음력) 담양에 주둔 중인 일본군에게 인계된다. 이후 전주를 거쳐 한양으로 압송된다. 재판을 받는다. 일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재판관에게 당당하게 맞선다. 나라를 팔아먹은 너희가 죄인이라 일갈한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의연한 모습으로, 보신각 근처 종로에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한 시대를 호령하고, 후손들에게 불의에 저항하는 정신을 남겨두었다. 침학(侵虐)하는 외세를 배격하는, 드높은 기개를 세워 두었다. 백성들의 형형한 눈빛을 살려 놓았다. 조선 사람들에게 전혀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여 주었다. 백성자치의 해방구이자 민중권력기관, 집강소였다. 동학혁명 전쟁이었다.

전봉준도 분명, 1894년 한겨울 추위에 이 징검다리를 건넜을 것이다.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면서 백양사 징검다리를 건너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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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제2막은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역사와 문학 등을 재미나게 풀어보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더 쉽고 재미있는 글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면서 서로 교감하면서 보다 풍부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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