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임진각이었습니다

강화에서 고성까지, 501km 'DMZ평화의 길' 걷기를 시작한 이유

등록 2020.06.11 09:25수정 2020.06.1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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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임진각이었습니다.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양평에 갈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임진각에 가게 되었습니다. 임진각은 여러 번 가본 곳이지만 혼자서는 처음입니다. 마치 먼 곳으로 여행이라도 온 양,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습니다. 


지난 5월 20일의 일입니다. 양평에 사는 아는 분이 아카시아 꿀이 들어오기 전에 정리 채밀을 해야겠다면서 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 분은 벌을 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경험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제 남편에게 자문을 구하곤 합니다.

달콤한 벌꿀보다 임진각

벌을 살피는 일은 대개 이른 아침에 시작합니다. 아침에는 기온이 낮아 보호복을 입고 일해도 덥지 않습니다. 또 벌통을 열고 내검해도 벌들이 낮만큼 왕왕대지 않으니 일하기에 좋습니다. 남편은 정리 채밀할 도구들을 챙겨 새벽에 양평으로 떠났습니다.
 

파주시에서 개성시까지 20킬로미터, 평양까지는 160킬로미터. ⓒ 이승숙

'나도 뒤따라서 양평에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은 올 봄부터 벌을 치기 시작한 양평의 그 댁이 집을 예쁘게 가꿔 놓아서 마치 카페에 간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안 그래도 양평이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얼마나 예쁘면 그런 말을 할까요. 남편을 따라 양평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집안 일을 대강 끝내고 길을 나섰습니다.

출근 시간대의 올림픽도로는 막혔습니다. 강화도 우리집에서 양평까지는 130km가 넘는 거리지만 길만 막히지 않다면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로에 차들이 많아 속도를 낼 수 없으니 언제 도착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가봤자 정리 채밀은 이미 다 끝날 것 같았습니다.

자유로를 달리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옆길로 빠져 나왔습니다. 막혔던 길을 벗어난 뒤 차의 속력을 높였습니다. 코로나19가 발생하고 강화 밖으로 통 나오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나오니 좋았습니다.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아깝습니다. 이왕 나온 김에 달려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자유로였습니다.

자유로를 달리자 가슴이 뻥 뚫렸습니다. 옆 차선으로 달리는 차들도 다 신이 나 보였습니다. 꽉 막혔던 올림픽도로에 비하면 자유로는 그야말로 거칠 게 없었습니다. 쭉 뻗은 곧은 길을 달리는 내 마음은 하늘로 붕붕 날아올랐습니다.
 

통일대교를 건너려면 출입 허가증이 있어야 합니다. ⓒ 이승숙

저 앞에 이정표가 보입니다. 개성까지 20km라고 적혀 있습니다. 평양까지는 160km라고 합니다. 아니, 개성까지 20km밖에 되지 않는다니요. 이 길을 따라가면 개성은 물론이고 평양까지도 갈 수 있다는 말인가요?

이정표를 따라가 보기로 했습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는 데까지 가보렵니다. 77번 도로의 끝이 어디일지 자못 궁금했습니다.

77번국도, 개성까지 가는 길

77번 국도는 부산광역시 중구에서 출발해서 황해도 개성시에 이르는 일반 국도입니다. 국도의 길이가 897㎞에 달하는 대규모 해안국도, 부산에서 남해안 및 서해안을 따라 인천광역시, 서울특별시, 자유로 그리고 황해북도 개성시까지 이어집니다. 

자유로를 달려 계속 가면 개성시가 나옵니다. 이대로 멈추지 않고 달린다면 30분도 안 걸릴 거리입니다. 강화에서 양평까지 약 130km도 멀다 않고 찾아가는데 개성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나 더 달릴 수 없었습니다. 임진강을 건너는 다리 위에는 검문소가 있었습니다. 통행증이 없는 차는 돌아가라는 안내 글자가 적혀있는 입간판을 보고 차를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곤돌라를 타고 임진강을 건너갔다 올 수 있습니다. ⓒ 이승숙

그날, 임진강 평화누리공원을 거닐면서 생각했습니다. '위로 올라갈 수 없다면 옆으로 가보면 어떨까. 강화도에서 출발해 강원도 고성까지 DMZ를 따라가 보자'. 우리나라의 서쪽 끝 강화도에서 동쪽 끝 고성까지, 국토를 횡단해보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날 밤에 잠을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강화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걸어서 가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렜습니다. 그 길은 DMZ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걷는 길이기도 합니다.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큰 꿈을 꾸는데 잠이 웬 말이란 말입니까. 컴퓨터를 켜고 검색을 해봤습니다. 강화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강의 길을 머릿속에 그렸습니다.

DMZ 평화의 길

알아보니 경기도 김포에서 출발해 연천까지 가는 '평화누리길'이 있었습니다. 강원도 구간 역시 길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행정안전부는 강화에서 고성까지 걸어서 한반도 동서를 횡단하는 501㎞ 길이의 'DMZ 평화의 길'을 2022년까지 만들겠다고 지난 2019년 12월에 발표했습니다.

이 길이 만들어지면 국토 횡단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 같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DMZ를 따라 걸었습니다. 각자 꿈꾸는 바는 달랐겠지만 걷는 내내 따라오는 분단의 현실 앞에 마음이 숙연해졌을 것 같습니다. 

사방에 전화를 돌렸습니다. 같이 걷자고 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며 강원도 고성까지 가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코로나 19로 답답해하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로부터 5일 뒤 우리는 대장정의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함경남도에서 시작한 임진강은 남으로 내려와 한강과 하나가 되어 서해로 흘러듭니다. ⓒ 이승숙

#DMZ평화의길 #임진강 #임진각 #평화누리길 #DM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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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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