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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으로 '스노든 사건급'이 된 러시아 도핑 스캔들

[오래된 리뷰 190] <이카로스>

20.05.31 16:47최종업데이트20.05.31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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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이카로스> 포스터. ⓒ 넷플릭스

 
인류 역사상 유명한 '암스트롱'들이 몇 명 있다. 암스트롱 포를 만들어 병기 산업을 일으킨 영국의 윌리엄 암스트롱, FM 주파수를 만들어 라디오·무선통신 기술 발달에 기여한 미국의 에드윈 암스트롱, 재즈 황제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미국의 루이 암스트롱,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미국의 닐 암스트롱, 독보적 사이클 황제'였던' 랜스 암스트롱이 그들이다. 

이중 랜스 암스트롱이 사이클 황제'였던' 이유는 그가 약물 복용으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한창 성적을 올렸던 20대 젊은 나이에 고환암 투병으로 선수생명은커녕 생명을 계속 끌고갈 수 있을지 알지 못했던 상황에서 기사회생하여 2005년까지 세계 최고 권위의 사이클 대회 투르 드 프랑스 7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가 2010년부터 도핑 논란이 불거지자 2012~2013년에 걸쳐 결국 인정했다. 

개인적으론 역사에 길이남을 황제에서 조롱의 대상으로 추락하였고, 많은 이들의 희망에서 절망이 되었다. 미국의 젊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아마추어 사이클 선수 브라이언 포겔은 이 사건을 다른 시선으로 보았다. 암스트롱이 수백 번의 약물 검사를 통과했다면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실험체 삼아 약물 검사의 실체를 알리기로 마음 먹는다. 그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영상 기록으로 남긴 결과물이 <이카로스>다. 이 작품은 그에게 선댄스(2017), 미국·영국 아카데미(2018)를 안겼다.

약물 검사의 실체를 알리고자 시작했는데...

포겔 감독은 우선 세계 최고 난이도의 아마추어 사이클 대회 오트 루트에 출전하여 14위에 오른 뒤 체계적으로 약물을 주입하여 걸리지 않고 같은 대회에 출전해 더 높은 순위에 올라 증명하고자 했다. UCLA 올림픽연구소 창립자 돈 캐틀린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거절 당하고, 대신 그가 절친 모스크바 올림픽연구소 소장 그리고리 로드첸코프를 소개시켜준다. 

로드첸코프는 특기라고 할 만한 '약물 검사에 걸리지 않는 도핑 프로그램'을 포겔에게 시연한다. 몇 개월에 걸쳐 체계적으로 프로그램을 밟아가는 그들. 처음엔 당사자 포겔이나 보는 우리나 로드첸코프가 왜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지 의아한 건 마찬가지. 그는 약물 검사로 도핑을 잡아내는 세계반도핑기구 인증 기관의 수장이 아닌가. 하지만 곧 밝혀진다. 그는 반도핑은커녕 도핑의 최전선에 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독일의 한 방송국에서 러시아 육상 선수들 태반이 로드첸코프의 약물 검사 통과 도핑 프로그램 수혜자라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한다. 이후 다큐멘터리의 본래 목표와 목적에 따른 과정까지 송두리째 바뀐다. 그들의 실험은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게 된다. 체계적인 도핑 프로그램 이후 출전한 대회에서 오히려 낮은 순위를 마크했다는 사실은 뒷전이 되었다. 작품의 시선은 자연스레 포겔에서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로드첸코프로 옮겨가고, 스케일은 도입부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진다. 도핑 스캔들의 최전선이자 중심이 된 것이다. 

러시아 도핑 스캔들을 가장 깊이 있게 다룬 작품

다큐멘터리는 연출되지 않은 '날것'이란 개념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테다. 하지만 실상 그러기가 힘든 게, 정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를 담아 작품으로 내놓는다면 아무도 보지 않을 뿐더러 '작품'이라고 할 수 없을 게 아닌가. 많은 다큐멘터리들이 날것처럼 보이는 정제품으로 만들어지는 게 그 이유라 하겠다. 와중에 <이카로스>는 촬영 도중 작품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변화를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었다. 

이 작품이 대단한 건, 작품 자체로 보자면 위의 이유라고 하겠고 작품을 들여다보자면 비록 우연이지만 최악의 러시아 도핑 스캔들의 진실을 밝혀낸 장본인이라는 이유라 하겠다. 쉽게 접하지 못할 다큐멘터리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고, 러시아 도핑 스캔들의 키를 쥐고 있는 그리고리 로드첸코프가 이 다큐멘터리 아니었으면 입을 열지 못했을 거라는 점에서 매우 기가 막히다. 

독일 방송국의 의혹 이후 크게 확장된 러시아 도핑 스캔들은 세계반도핑기구 독립위원회의 조사 이후 사실로 확인된다. 모든 시선은 로드첸코프로 향하는데, 그 배후에 누가 있는가가 중요해지기 시작한다. 당시 러시아 체육부 장관 비탈리 뭇코와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국가' 주도의 도핑 스캔들을 강하게 부인하며 '개인'의 책임을 물을 것을 강력히 시사한다. 당연히, '개인'은 모스크바 올림픽연구소 소장 그리고리 로드첸코프였다. 

로드첸코프는 포겔과 제작팀의 지원에 힘입어 <뉴욕타임스>에 대대적 폭로 기사를 보내고, 이후 목숨에 위협을 느껴 역시 포겔과 제작팀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망명한다. 전 미국국가안보국 요원 에드워드 스노든이 무차별 개인정보 수집하는 프리즘 프로젝트의 실체를 폭로하고 러시아로 망명한 것과 비슷한 급의 사건이 된 것이다. 덕분에 <이카로스>는 러시아 도핑 스캔들에 가장 근접해 깊이 있게 다룬 작품이 되었다. 

여전히 반목 중인 국가와 개인의 관계

어찌 보면, 작품의 제목을 바꿔야 했는지 모른다. '이카로스'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중 한 명으로, 아버지 다이달로스와 함께 밀랍으로 된 날개로 에게 해를 탈출하는 도중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태양에 밀랍이 녹아 추락하고 만다. 포겔 감독의 우상이자 영웅이었던 랜스 암스트롱이 가장 높이 올라갔다가 추락하고 만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어야 하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물론, 탁월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랜스 암스트롱 대신 러시아를 넣어도 얘기는 충분히 통하기 때문이다. 역사상 미국과 더불어 최고의 스포츠 강국 러시아가 최악의 도핑 스캔들로 추락한 게 아닌가. 작품이 세상에 나온 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러시아 당국은 강력히 부인하고 있고, 그리고리는 비록 증인 보호 프로그램으로 보호받고 있지만 평생 숨어다녀야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지만 말이다.

지난해 12월, 세계반도핑기구는 결국 러시아 선수들의 국제 스포츠 대회 출전 금지 4년을 결정하였다. 이로인해 러시아 선수들은 올해 있을 예정이었다가 1년 뒤로 미루어진 도쿄 올림픽은 물론 2022년 카타르 월드컵도 못 뛰게 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올림픽 헌장에 위반한다며 제소를 시사했다. 다만, 개별선수들은 국가 주도 도핑 스캔들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면 출전할 수 있다. 그들 개개인 모두는 인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이 작품으로 들여다볼 또 다른 중요 시사점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반목 중인 국가(조직)와 개인의 관계이다. 국가 주도의 책임에 개인이 자유로울 수 있는가, 국가의 힘 앞에 개인이 할 수 있는 게 있는가. 작품은 보다 개인의 시선에 다가가 개인을 옹호하고 응원하는 차원에 있다. 거기에 완벽한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 사안에서는 국가에 명백한 잘못이 있을 테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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