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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롱 신자'가 될 뻔했는데... 아이고, 감사합니다

[예비신자의 교리수업 이야기] 또 미뤄진 세례식, 달리 생각해보면 보이는 것들

등록 2020.05.24 11:45수정 2020.05.24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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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증, 첫 번째 인간의 원죄


길을 나서 본 사람들은 안다. 한번이라도 가 봤던 곳과 처음 가는 곳의 거리감은 다르다는 걸. 같은 거리라도 초행길이 훨씬 멀게 느껴진다. 같은 곳이라도 갈 때와 돌아 올 때가 또 다르다. 똑같은 길로 가고 오지만 갈 때보다는 올 때가 훨씬 빠른 것 같다. 갈 때는 한참 걸린 것 같은데 집에 돌아올 땐 금방이다.

간절하게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약속 된 기다림과 그렇지 못한 것과의 간극은 너무 크다는 걸. 미리 약속한 것이라면 우린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하루도 좋고 한 달도 괜찮다. 설렘으로 시간은 금방금방 간다. 하루가 지나는 게 즐겁다. 하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은 견디기 힘들다. 불안하고 초조하다. 하루는 너무 길다. 시간은 달팽이보다 더디다.

물론 그건 착각이다. 거리나 시간이 제 맘대로 줄거나 늘어나진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느낄 뿐이다. 온전히 심리적인 거다. 모두가 가야할 길이 한 치라도 짧아지기를, 기다려야 할 시간은 일초라도 줄어들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그래봐야 아무 소용없다. 그걸 잘 알면서도 우린 부질없이 성화를 부린다. 조급함이다.

우리는 그렇다. 매사가 바쁘다. 빨리빨리가 입에 뱄다. 조바심을 낸다. 조금이라도 일찍 끝을 보려 든다. 하나도 느긋하지 못하다. 기다림은 그 자체로 고통이라서다. 결국 성급하게 나댄다, 요란하게 부산을 떤다. 일 처리는 전혀 꼼꼼하지 않다. 엄벙덤벙, 대충대충이다. 그러다 탈이 나고 만다. 황금알을 낳던 암탉은 한 순간에 고깃덩어리로 변하고 만다. 참 어리석다.

프란츠 카프카는 그게 인간의 원죄라고 했다. 그 때문에 인간은 추방 당했고 돌아가지 못하는 거라고 했다. 하루빨리 신이 되려다 받은 형벌이었다. 그릇된 욕망이었다. 가장 깊은 속에는 조급함이 있었다. 단순한 호기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금도 형벌은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조급함을 버리지 못해서다. 이건 병이다. 아주 고약한 불치의 병이다.


물론 서둘러야 할 일도 많다. 지체되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위기들이다. 이를테면 코로나19다. 녀석은 최초 발견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잦아들 기미조차 없다. 오히려 다양한 변종을 낳으며 기세가 등등하다. 인류의 존망이 걸려 있지만 백신과 치료제의 개발은 난망하다. 하지만 성급하게 굴면 안 된다. 냉정과 이성을 지켜야 한다.

세례식이 미뤄진 이유
 

남들은 다 제때에 받는 세례인 줄 알았다. 이게 하필 내 차례에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다. ⓒ Pixabay

 
말은 그리 하지만 지금 난 잔뜩 화가 나 있다. 또 세례식이 연기 돼서다. 벌써 두 번째다. 물론 코로나19 때문이다. 불가항력이란 걸 알면서도 이런다. 조급증이 인다. 아무런 기약이 없어서 더 그렇다. 모든 게 안개속이다. 시점은 고사하고 성사 여부조차 모른다. 뭐라도 예측할 수 있다면 이리 화 낼 이유가 없다. 영원히 세례를 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 불안하기조차 하다.

일종의 두려움이다. 자신의 의도나 의지 따위는 깡그리 무시되는 상황이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의욕은 앞서지만 대안은 없다. 말하자면 을의 처지다. 더욱이 이런 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게 왜 이리 됐고, 앞으로 어디로 갈지 전혀 알지 못한다. 적용할 만한 DB가 없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무서운 거다.

답은 있었다. 지난 17일, 주일 미사에서 그걸 찾았다. 그 날 두 번째 성경독서인 베드로전서였다. 반석처럼 든든한 예수님의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두렵게 하여도 두려워 말고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다만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하게 모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 14~15)."
 
이보다 더 명쾌할 순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멀었다는 거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누가 물어도 속 시원한 대답을 내 놓지 못할 수준이라는 거다. 준비가 덜 됐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자격조차 없다는 거다. 더 공부하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참으로 준엄한 말씀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입이 열 갠들 무슨 할 말이 있을까. 그동안 나는 게으름에 빠져 있었다. 자주 의무를 소홀히 했다(고백기도문 중 인용). 성당은 늘 열려 있었는데, 가 볼 생각도 안 했다. 성경은 들춰 보지도 않았다. 묵상이나 기도를 등한시했다. 곧잘 외우던 기도문조차 가물가물해질 정도다. 그러면서 뭘 믿고 세례 운운했을까.

그랬다. 나는 그렇게 나태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를 핑계 삼았다. 거짓말이다. 게으름에 거짓을 보탠 거다. 그러면서 세례는 받고 싶었다. 욕심이다. 탐욕이다. 제 분수도 모르고 이 정도면 받을 만하지 않냐고 감히 생각했다. 이만저만한 교만이 아니다. 그쯤 했으면 다행인데, 나중엔 화까지 냈다. 분노다. 별 짓 다했다. 죄란 죄는 몽땅 다 저질렀다. 이 정도면 천벌이 모자라다.

만약 이 지경으로 세례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분명 '나이롱 신자'가 되었을 터다. 겉만 번드레하고 속은 형편없는, 일찍이 그렇게는 되지 말자고 다짐했던 그것 말이다. 어쩌다 받은 처지에 온갖 '척'은 다했을 거다. 뿐일까. '세례? 그게 세상에서 젤 쉬웠어요' 하며 시건방을 떨었을지도 모른다. 끔찍하다. 생각도 싫다. 그러지 말라는 계시다. 세례식이 이리 미뤄지는 데는 그런 뜻이 있었다.

생각을 바꾸면 달리 보이는 것들

늘 내 자신이 불운하다고 생각했다. 지지리 재수도 없다고 여겼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길까 궁금하기조차 했다. 뭐 하나 시원하게 풀린 적이 없었다. 사방이 적이요 팔방에 지뢰였다.

급기야 세례마저 이 지경이 됐다. 남들은 다 제때에 받는 세례인 줄 알았다. 이게 하필 내 차례에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교단에서조차 한 번도 없었던 '사태'라지 않던가. 그래서 더 기가 막힌다.

그런데 바꿔 생각하니 재미지다. 나는 2천 년 천주교 역사상 가장 긴 교리 수업을 받는 중이다. 가장 신중하게 선택 되어질 사람이다. 전무(前無)는 물론이고 후무(後無)도 충분히 가능한 기록이다. 물론 이 시기에 교리수업 받는 모든 이가 그렇다. 게다가 받을 수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받게 된다면 그 의미는 참 각별할 터다. 오래도록 추억할 거리다. 신나기까지 하다.

우리의 세례가 너무 미뤄지다보니 교단에서는 먼저 세례를 받고 나서 나머지 공부를 하고자 했다. 선(先)세례, 후(後)수업이다. 반갑고 고마운 처사셨다. 근데 조금 찜찜했다. 미리 자격증 받아 운전부터 하고 시험은 나중에 보자는 것처럼 들렸다.

주님께선 그러니 그러지 마라고 말리신 거 같다. 조급해 하지 않고 느긋하니 더 기다리라는 뜻이었을 거다. 그렇게 제대로 자격 갖춰 받으라는 게 분명했다. 그게 마땅하다. 그래야 우리도 떳떳하다. 그리고 기다림의 끝은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세례 #연기 #생각바꾸기 #재수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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