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안전할 권리'를 말하다

[좌담] 페미니즘 이슈로 차별금지법을 고민하다

등록 2020.05.15 18:38수정 2020.06.0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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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5일 오후 1시 40분]

페미니즘의 대중화는 페미니즘을 통해 자신을 정치적 권리 주체로 인식하게 된 여성대중의 등장을 통해 가능했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파고든 인종주의와 트랜스젠더 혐오는 '여성의 안전할 권리'를 위한 것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되기도 한다. 다른 사회적 소수자 집단에 대한 배제와 혐오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가시화되는 흐름을 함께 넘어서기 위해 여성운동과 차별금지법제정운동은 무엇에 도전해야 할까?  

지난 4월 23일 이 질문을 함께 고민하고 운동의 과제로서 답하고자 하는 활동가들이 모였다. 지난 2월 여성문화이론연구소와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기획한 <차별금지법과 페미니즘> 강좌가 외국인 혐오와 인종주의, 여성 범주 논쟁과 트랜스젠더 혐오, 진정한 여성 주체를 구획하는 탈코르셋 논쟁을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이번 좌담회는 그 고민의 연장선에서 페미니즘 내부의 배제와 차별 흐름을 어떻게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를 이야기한다. 20-30년의 역사를 가진 장애여성공감과 성폭력상담소, '페미니즘 리부트'로 불리는 흐름 이후 2019년에 창립한 위티와 유니브페미 활동가들이 나눈 고민과 기대를 정리했다.
    

<차별금지법과 페미니즘> 좌담회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 각자 주목하는 이슈와 영역에는 차이가 있지만 네 분 모두 '여성운동'으로 묶일 수 있는 다양한 단체들에서 활동하고 있다. 간략한 단체소개와 함께 최근에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소개를 부탁한다.

양지혜 :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WeTee)는 2019년 6월 스쿨미투 운동을 주도했던 청소년들과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청소년들이 무력한 피해자가 아니라 변화를 만드는 주체로 목소리를 내고 학교의 변화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해왔다. 최근에는 스쿨미투 운동을 청소년 섹슈얼리티 운동과 연결 짓는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성경험이 남성에게는 자랑이지만 여성에게는 수치가 되는 기존의 통념과 피해자가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청소년 성폭력 담론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성 청소년과 퀴어 당사자들이 섹슈얼리티를 논의할 수 있는 주체로 드러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에 '나는 섹스 하는 청소년입니다'라는 대안적 성교육 강연이나, '힐난도 자랑도 수치도 아닌' 콘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노서영 :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인 '유니브페미'는 지난 2019년 9월에 창립했다. 2018년도부터 대학에서 총여학생회가 줄줄이 폐지되면서 여성주의 자치 단위라는 지위와 공간을 잃기도 했지만, 대학에서 페미니즘 정치를 계속 이어가보자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만들었다. 올해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학생의 등록 포기 사건 때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트랜스젠더 혐오가 정당화되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페미니스트의 과제를 논의하기 위한 긴급토론회를 하려고 했는데, 코로나19로 잠정 연기된 상태다.


올해 유니브페미의 중요한 목표가 대학 온라인 익명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에타)에서 벌어지는 혐오에 대응하는 것인데,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공론화되면서 2차 가해와 여성혐오가 더 가시화되고 있다. 지난 4월 7일에 이를 방치하는 플랫폼의 책임을 묻고 게시물에 대한 윤리규정을 마련하라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그리고 최근에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 혐오표현 대응 프로젝트 F5(새로고침)'을 진행중이다."

이진희 : "장애여성공감은 장애여성 인권운동을 하는 단체로, 장애와 페미니즘을 통해 정상성에 도전하는 방식들을 찾아가고 있다. 최근에는 작년 낙태죄 조항에 대한 대법원의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온 이후에 장애여성의 성적 권리와 재생산 권리를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정책을 논의 중이다.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오려면 과거 국가의 과오를 잘 드러내는 것이 필수적인데, 그동안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재생산 권리가 시설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통제되어 왔는지 당사자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작업을 고민하고 있다. 장애여성에 대한 통제가 다른 소수자들이 경험하는 통제와 연결되는지를 계속 질문하면서 해 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코로나19인권대응네트워크에도 결합했는데, 시설이 아니라 필요할 때 지원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를 대안으로 만들어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장애여성공감은 20년 가까이 성폭력상담소라는 현장에서 피해자를 지원하며 반성폭력운동을 해오고 있다. 장애여성 피해자가 피해자로만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성적 폭력으로부터 보호받는 것뿐만 아니라, 연령, 장애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소수자들이 성적인 즐거움을 포함한 성적 권리에서 배제되지 않는 운동이 필요하다. 최근 강간죄 개정, 의제강간 연령 상향 등 논의와 더불어 동의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동의할 수 있는 조건과 역량을 제공하고 지지하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

김혜정 :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여성폭력에 대응하는 운동을 오랫동안 해 온 단체다. 이성애중심주의와 성별이분법, 섹슈얼리티의 위계가 성폭력을 유지시키는 중요한 기제라는 점에서 이에 맞서는 것이 반성폭력 운동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에서 피해자 지원을 담당하고 있다. 지금은 정부가 가해자를 강력하게 처벌하겠다는 메시지만 발표해도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 정부를 신뢰하는데, 엄벌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빈곤 문제와 관련이 크다고 느낀다.

사실 텔레그램 성착취는 기상천외한 방식의 범죄라기보다 오히려 너무 오래되어 온 방식이다. 여러 피해자들을 만나보면 어떻게 이렇게 사회적인 자원이 없는 채로 버텨왔나 싶다. 가해자들의 협박은 두터운데, 그 협박을 막아낼 수 있는 피해자들의 현실은 종잇장처럼 얄팍하다. 작은 위기가 큰 위기가 되는 여성과 소수자들의 삶을 어떻게 두텁게 만들어갈지 고민하고 있다."
  

노서영(유니브페미)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 최근 한국사회는 페미니즘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데, 그 와중에 '예멘 난민 사태'가 있었고 트랜스젠더 여성 군인의 군복무와 여대 입학이 사회적 쟁점이 되기도 했다. 성적 대상화를 거부하는 실천으로서 탈코르셋 운동은 한편으로는 '진정한 페미니스트'를 구분하는 리트머스 역할로 작동한다. 이러한 흐름에서 각자의 운동에서 부딪혔던 구체적인 고민들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트랜스젠더의 여대 입학 건은 대학에서 훨씬 더 격렬한 이슈였을 것 같은데.
 

노서영 : "맞다. 남녀공학에서는 공적인 공간에서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난민이나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것이 오히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가 심하다보니, 페미니즘의 갈래가 생길만큼 동력이 많지 않다.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이다 보니 '래디컬 페미니즘' 자체가 용납되지 않기도 한다. 사회적으로는 페미니즘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기보다 '어떤 페미니즘'인지가 질문되고 중요한 시기였지만, 남녀공학에서는 '너 페미니스트야?'라는 질문이 전부다.

여대에서는 적어도 페미니즘이 상식으로 여겨지고 온·오프라인에서 토론이 활발히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어떤 페미니즘은 환영받고 어떤 페미니즘은 배척된다. 그래서 트랜스젠더 여대 입학 건에 대해서 유니브페미가 환영 입장문을 쓸 때에도 환영하는 이유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명확하게 하되, 여대를 향해 쏟아지는 무분별한 비난에 대해서 어떻게 맞설 수 있을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진희(장애여성공감)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 페미니스트들이 복잡한 숙제를 안고 활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장애여성공감은 최근의 이러한 흐름을 어떻게 겪고 있나. 페미니즘이 확장되는 만큼 장애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을까? 소수자 운동과의 연대가 활발한 만큼 다른 새롭게 하게 된 고민이 있는지.

이진희 : "장애여성공감은 '젠더'라는 용어에 대한 부침을 겪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전 장애 영역을 포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젠더 문제를 고민한다고 말하면 비판을 받았다. '젠더=여성'으로 이해되면서 여성만 지원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 결과다. 장애여성공감에는 부설기관인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이 있는데, 7~8년 전에는 존립 자체가 흔들렸다. 외부기관의 지원금을 받거나 정부기관에서 모니터링을 나오면 '반쪽짜리 센터'이기 때문에 지원을 유지할 수 없다는 평을 들었다.

장애운동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정책 안에서 젠더 개념이 이해되는 방식에 대해 계속 문제제기 해왔고, 동시에 우리도 구조로서 젠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가깝게는 2018년 장애여성공감 20주년 행사 때 마주했던 장면들도 있다. 마침 20주년 슬로건이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였는데, 물리적 장애를 가진 장애인 외에도 어떤 불구의 존재들을 만나야 하는가,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정했다.

그런데 공감이 성중립화장실을 준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SNS를 중심으로 '장애여성공감이 아니라 장애공감이다, 여성은 빼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여성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여성보다 트랜스젠더를 더 우선시 했다는 점이 비난의 핵심이었다.

젠더 관점을 가지고 독립생활센터를 운영한다고 하면 여성만 지원하는 센터라고 비난받았고, 성중립화장실을 만들면 여성의 인권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비난받았다. 두 상황 모두 우리 사회가 젠더 개념을 필요한 상황에 따라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왜 장애와 젠더 관점이 만날 수밖에 없는지, 장애와 젠더가 왜 구조적인 문제인지를 잘 설명하는 것도 운동의 중요한 역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김혜정(한국성폭력상담소)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 최근 페미니즘의 폭발적인 움직임은 주로 여성에 대한 폭력 이슈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여성폭력을 핵심이슈로 다루는 가장 오래된 단체 중 하나인데, 페미니즘의 전진과 함께 소수자를 배제하는 흐름이 더 가시화되면서 조금 더 고민이 깊었을 것 같다.
 

김혜정 :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누가 어떤 언어와 결로 이야기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극우 보수 남성 정치인도 여성 안전을 다 이야기하지만 과정도, 결과도 다르다. 만약 성폭력 불안이나 위협의 원인 중 하나로 난민이나 트랜스젠더가 언급된다면, 그것은 단일하고 명확한 말일까. 망설이고 고민하고 질문하는 목소리 아닐까. 단일한 목소리와 단일한 결로 여성폭력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려는 주장이 등장할 때가 고민이 되는 순간이다.

래디컬 페미니즘 진영이 등장한 이후 여성폭력의 피해나 위험에 대한 이야기가 진영적인 주장들과 부착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기존 여성단체의 운동방향에 대해 비판하고 조롱하는 방식으로 논쟁이 전개된다. 그러나 여성단체들 마다도 입장은 다르다. 그동안 페미니즘 운동에서 부딪혔던 계기마다 제대로 입장을 정리하거나 공식화된 언어로 만드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고, 개입해야 할 국면을 놓치기도 한 것 같다.

그래도 타이밍을 잡아서 이야기하게 된 기회도 있었다. 크게 두 가지인데, 2019년 서울퀴어퍼레이드 당시 대리모 사업에 투자한 기업의 후원 때문에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하는 것이 게이 남성 중심의 퀴어운동을 강화하고 여성인권을 후퇴시키는 행위에 가담하는 것이라는 프레임이 형성되었다. 당시 한국성폭력상담소는 동의없는 성폭력 캠페인 부스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대리모 사업에 찬성한다는 거냐, 반대한다는 거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시험문제 같은 질문의 구도가 생겨나다보니 그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느끼는 단체도 많았다. 그러나 대리모에 대한 진지한 논의의 장은 아니라고 봤고, 상담소는 성별이분법에 맞서는 것은 반성폭력 운동이라는 입장을 냈었다.

다른 하나가 올해 숙대 트랜스젠더 여대 입학 사안이었다. 누가 여성인지를 질문하고 누가 패스할 수 있는지 자격을 심사하는 방식은 사실 성폭력 피해자들이 항상 겪고 있는 싸움과 같은 형식이다. 그 질문에 답할 것인지 그 질문 자체를 문제제기 하면서 갈 것인지를 고민했고, '우리는 자격이 없는 여성들과 세상을 바꾼다'는 입장을 냈다. 입장을 낸 후에 피드백이 많았는데, 여성의 안전에 공감하는 사회적 감수성에 더해 어떤 이야기들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지 문제의식을 더했다고 본다. 쟁점이 생겼을 때 그것이 형성된 지형을 읽고, 거기서 더 필요한 논의를 제시하는 게 운동의 역할이 아닐까."
   

양지혜(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 난민과 트랜스젠더 이슈가 있을 때 우리가 부딪히는 문제는 소수자를 향한 혐오표현 자체는 아니다. 제주도에 예멘 난민들이 도착했을 때 여성은 무슬림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할 수 있는 피해자로 이야기되고, 트랜스젠더 여성이 여대에 입학하게 되면 여성은 언제든 침해당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위험에 놓인 존재로 이야기된다. 이것이 혐오의 실질적인 효과가 아닐까. 스쿨미투 역시 '보호받아야 할 청소년들에게 이런 일이'라는 분노와 함께 사회적 지지를 얻은 셈인데, 당사자 활동가로서 그 국면에서 어떤 고민이 들었나.

양지혜 : "스쿨미투 운동을 하던 시기에 우리와 래디컬 페미니스 모임이 몇 백 미터를 사이에 두고 스쿨 집회를 열었다. 그 모임의 집회가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집회 기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 모임에는 트랜스젠더 페미니스트 구성원이 있었고 트랜스젠더를 향한 비난과 낙인을 보면서 여성에게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단위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당시 우리는 어떤 어떠한 방식으로 안전에 대해 합의할 것인지를 많이 점검하고 고민했다. 우리는 왜 청소년들로 스태프를 꾸리고 교복을 입고 참여하는 방식으로 집회를 여는지 스스로 질문했는데, 그건 스쿨미투 고발자나 청소년들이 보호받아야 할 대상을 넘어서 정치적 요구를 말할 수 있는 존재로 드러나길 바랬기 때문이었다. 사실 래디컬 페미니즘 진영과 다른 문제로 적대했지만, 돌이켜보면 서로 청소년 동료를 바라보는 방식이 굉장히 달랐다고 생각한다.

물론 10대 중에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훨씬 더 많고, 우리도 오랜 시간 호흡을 함께 맞춰가야 한다는 걸 많이 느낀다. 이를테면 래디컬 페미니즘 안에서 4B(비연애, 비혼, 비출산, 비섹스) 운동이 가시화되면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얻기 위해서 성공에 대한 야망을 가져야 한다는 프레임이 존재한다. 그래서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에게 뒤지지 않는 자원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는데, 줄 세우기 입시경쟁이나 서열화에 동조하는 어떤 페미니즘의 흐름들이 신기하다.

그동안 '여성이 승리할 수 있는'보다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을 수 있는' 페미니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왔는데, 누군가에게는 여성이 단일한 소수자 정체성으로 자리 잡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코르셋 운동의 흐름 역시 강한데, 청소년이 학교나 가정에 종속되어 있는 상황에서 탈코르셋은 많은 억압과 고립, 자원의 손실을 경험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서는 어떻게 괴롭힘이나 조롱의 대상으로 남지 않으면서, 학교나 가정 등 실질적인 공동체 내에서 변화의 담론을 만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
   

좌담회-김혜정,이진희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 여성을 단일한 목소리로 드러내려는 힘이 강해지기도 했지만, 페미니즘이 넓혀온 힘 안에서 서로가 다양한 조건에 놓여 있음을 자각하는 여성들도 많아졌다. 그래서 복잡하고 섬세한 운동의 언어와 고민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2016년 강남역 사건 이후 여성혐오에 맞서는 움직임은 한편으로 '여성의 안전'이라는 지향과 목표를 강화해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텔레그램 N번방이라는 디지털 성범죄 역시 여성의 안전 문제를 다시 고민하게 한다. 사회가 분노하는 지점에서 한 발 더 들어가서 살펴봐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양지혜 : "무엇이 위험하기 때문에 무엇을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는 청소년들이 흔히 듣는 이야기인데, 청소년이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위험한 위치에 처하게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네모 칸 안에 있어야만 안전할 수 있다'는 말에는 네모 칸 안에 있을 수 없고 네모 칸 영역 바깥으로 나가야하는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긴다. 특정한 공간이 불안하고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왜 자원이 없는 이들에게 그 공간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공간이었을까.

5만원 기프티콘을 주고 성착취 영상물을 찍었다는 말이 현실성 없게 들리지만 그 얄팍한 제안들이 왜 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성폭력을 경험하면서도 왜 계속 가해자의 집에 머물러야 하는지, 안전 담론에서 네모 칸을 벗어난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말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또한 '네모 칸 안에 있어야만 안전할 수 있다'고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네모 칸 밖에 위치한 다양한 소수자들의 이야기가 충분히 담길 수 있는 네모 칸일까 생각해봐야 한다."

이진희 : "2016년 강남역 사건 이후 국가의 대안이 정신장애인 행정입원과 성별분리화장실로 대표되어 나타났다.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수준이 그때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여성폭력이 더 가시화된 이후에도 대부분 어떤 구조와 환경 속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혐오가 벌어지는지를 살피기보다, 장애여성이 혹은 10대 여성이 취약하기 때문에 성폭력을 경험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피해의 경험을 소수자의 정체성만으로 간편하게 설명하는데, 이런 계속되는 시도들에 대항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노서영
: "유니브페미에서 트랜스젠더 숙대 입학 건에 대한 입장문을 준비하면서 구성원들끼리 우리가 언제 안전한다는 감각을 가지게 되는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공간을 만났을 때', '내가 뭘 입었든 괜찮다고 말해주는 공간에 있을 때'와 같은 순간에서 안전함을 느꼈다는 대답이 많았다.

그런데 이런 공간이 처음부터 편한 것만은 아니다. 모두가 사회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지만 그걸 넘어서자고 함께 약속하거나 신뢰관계를 쌓아가면서 안전하다는 감각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무언가를 일단 떨어뜨려놓는 것이 쉽고 빠른 방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다는 분노와 무력감이 실제로 그 위협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하는 것 같다.

학교가 안전한 공간이 되어야 하는 건 맞지만 '지금까지 학교에서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 트랜스젠더였는가?' 질문한다면 답은 아니지 않나. 배제가 아닌 방법을 통해서 우리가 안전에 대한 감각을 나눌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논의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본다. 학교에서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입장으로 차별금지 원칙을 세우는 과정에서 출발할 수도 있지 않을까."

김혜정 :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정치적 요구로 조직하는 것은 중요하다. 정치적 요구라면 법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교육당국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예산은 어디에 써야 하고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른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와 같이 구조를 호명하면서 그 요구를 구성하게 되지 않나. 그런데 지금 정치적 요청으로 보이는 청와대 청원들도 정치적인 요구보다 경제적인 인식이 바탕에 있는 듯 하다.

대안의 양이 정해져 있고 우선순위가 경쟁이라는 식이다. 안전은 타인의 권리나 몫을 줄이는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없고, 차별을 줄여나가는 것이 서로의 안전을 함께 확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등을 더 키워가야 한다. 그런데도 타자들의 권리가 내 권리를 위협한다거나 빼앗아갔다고 인식하거나, 파이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로 인식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여성 문제도 이렇게 시급한데 무슨 난민까지 받아?' 하는 식으로 소수자 집단 사이에 우선순위를 경쟁하게 만드는 지형은 안전을 정치적인 요구로 만들어가기 어렵게 한다. 사회적으로 차별금지법과 같은 기반을 만드는 일에 투자할 것인지, 아니면 개개인이 경쟁력을 가진 경제적인 주체가 되어서 안전을 확보할 것인지는 페미니즘의 전략적 선택의 문제가 된 듯하다."
  
- 정치적 요구를 조직하는 것은 동시에 집단을 조직하는 것이기도 할 텐데, 페미니즘 운동과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은 어떻게 집단적인 요구를 모아내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해야 할 공동의 과제는 무엇일까?

이진희 : "아무래도 장애여성공감이 발달장애여성들과 같이 활동을 하기 때문에 주체성이나 자기결정권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내가 위험하지는 않은지,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역량 혹은 자원을 가진 사람들만 자기 권리를 찾아가는 것으로 안전 담론이 흐르지 않아야 할 것 같다. 발달장애여성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 난민이나 이주민도 마찬가지일 텐데, 사회적으로 자기결정권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정치적 권리를 어떻게 보장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지가 차별금지법 제정과 페미니즘 운동 모두에서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김혜정 : "최근에 동의 없는 성적 침해가 성폭력 개념이 되어야 한다는 강간죄 개정 운동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동의를 하는 주체가 꼭 신자유주의 능력 담론에서의 개인을 의미하지는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추구하는 삶의 행복과 삶의 질을 위해서 자신의 요구를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은 중요하다고 본다. 문제는 문제의 원인도 개인에게 있고, 결과도 개인이 혼자서 다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로 모든 것을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것이다.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여성폭력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는 사회를 바꿔나려는 공동의 정치적 요구와 결합될 필요가 있고, 정치적 개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역량과 자원을 어떻게 확보해나갈 것인지는 더 폭넓게 이야기되어야 한다."

노서영 : "얼마 전 충격적인 이미지를 보았다. 재판관이 여성혐오 표현을 한 남성에게는 약한 처벌을 내리는데,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이후 '한남충'이라고 말한 여성이 잡혀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오해이자 왜곡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라는 점에서 씁쓸하기도 했다. 수많은 '○○녀'처럼 여성혐오적인 명칭은 오랫동안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에도, 남성집단을 미러링하는 '멸칭'에 대해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야기하니까 말이다.

최근에는 SNS에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차별금지법 자체를 적대시 하거나 여성들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법으로 오해하는 모습을 보곤 하는데, 이러한 오해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이다. 차별금지법이 누구라도 차별받았을 때 구제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이자 모두가 평등한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장치라는 것, 그래서 여성운동에서도 중요한 이슈라는 것을 더 열심히 알려나갈 필요가 있다."
 

좌담회_노서영,양지혜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정치적 존재가 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살피면서 정치적 요구를 함께 조직하는 경험을 페미니즘 운동과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 더 많이 나누게 되기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자신과 서로의 운동에 기대하는 점이 있다면.
 

이진희 : "페이스북에 '누구누구 찾아주세요'라는 글이 올라올 때가 있는데, 탈시설 한 발달장애인들이 늘어나면서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발달장애인 등록을 할 때 DNA 채취를 하자는 대안이 제시되기도 한다. 그런데 탈시설 지원을 열심히 하는 대구 지역의 한 활동가가 DNA 채취는 답이 아니라는 글을 썼다. 발달장애인이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매일 다니던 장소만 다니기 때문에 잠깐 한 눈을 팔고 다른 곳에 갈 수밖에 없고, 결국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넓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안전할 권리,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갈 권리를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글이라서 기억에 남는다. 운동이 지도 위에서 좀 헤매더라도 잘 헤매면서 지치지 않고 계속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노서영 : "대학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오랜 과제가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혐오 대응이다. 그런데 혐오의 지형에 개입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남녀공학에서는 여성혐오로 인해 페미니스트들의 표현의 자유가 많이 제약을 받고 위축되어 있고, 여대에서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가 뚜렷하다. 이러한 혐오 문제를 풀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이 차별금지법에 대한 담론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별금지법은 표현을 규제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직장과 마찬가지로 대학에서도 차별을 시정할 수 있는 절차의 도입, 페미니즘 교육과 운동, 상담 등을 지원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의 자체가 우리 자신을 피해자로서만 이야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요구를 더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페미니스트들과 공적인 자리에서 만나서 대화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해가려고 한다."

김혜정 :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처벌에 매달리게 되고, 그 외에 다른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쉽지 않다. 형사처벌은 해당 죄에 대해서 형사법에 따라 책임을 지는 정도지, 모든 행위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없다.

만약 차별금지법이 있는 사회였다면 어땠을까? 나는 이 사건이 놓인 조건을 볼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트의 관리자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는지, 내가 어떤 정보나 교육 기회에 접근할 수 있었는지, 경제적인 위기 상황에서 긴급한 도움을 받을 때 차별은 없었는지 등 어떤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 혹은 발생한 이후의 일들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이런 사안이 발생하는 차별적인 요소들을 짚을 수 있고, 누가 어떻게 책임지고 함께 복구해 나가야 하는 일인지 책임도 더 입체적으로 두텁게 그려볼 수 있었을 듯하다."

성폭력을 주로 특정 행위로 생각하지만,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은 특정 행위가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기 전과 후로 대략 10년 이상의 시간을 짚어보게 된다. 지금도 텔레그램 N번방 피해자들의 주거 및 경제적 문제들이 있지만, 어떤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 이러한 조건이 안 바뀌고 있는지보다 '피해자니까 위급하다'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게 된다. 사회적으로 어떤 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하는지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다른 방식이 존재했으면 좋겠다. 형사처벌이 정의를 대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양지혜 :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여성이라서 경험하는 착취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빈곤이라는 조건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단일하지 않은 여성들의 경험을 발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 없어도 지금 이 사회에서 살아내고 있는 이들이 경험하는 모순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부조리를 돌파해나가는 건 언제나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위티에서 평등문화 토론을 시작하면서 첫 주제로 당사자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평등을 향한 움직임이 당사자 정체성 담론을 넘어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공통의 장벽에 대한 운동으로 연결되면 좋겠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고, 차별의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복잡한 논의를 시작하는 바탕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진행 : 미류(인권운동사랑방)
참석 : 김혜정(한국성폭력상담소), 노서영(유니브페미), 양지혜(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이진희(장애여성공감)
녹취 : 예정, 지오(차별금지법제정연대)
정리 : 몽 (인권운동사랑방,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격월간소식지 <월간평등업>에도 실립니다.
#페미니즘 #차별금지법 #안전할 권리 #좌담
댓글1

헌법의 평등이념과 포괄적인 차별금지를 실현하는 인권기본법인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자 실천하는 연대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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