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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 지정, 전봉준·최시형의 항일투쟁은 왜 안 됩니까

일제에 맞서 싸운 것이 분명한데... 또 포상 대상에서 탈락

등록 2020.05.14 14:09수정 2020.05.14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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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올해 3월 2일에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로부터 황당한 통보를 전달받았다. 요지는 필자가 2019년 6월 28일에 110장의 증빙자료를 첨부하여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 공적심사를 요구한 전봉준(1855∼1895)과 최시형(1827∼1898) 선생이 포상대상에서 탈락했다는 내용이었다.

공훈발굴과는 포상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두 분 모두 똑같이 "활동내용이 독립운동 성격 불분명하다"라고 한 줄로만 기재했다. 너무도 납득할 수 없는 답변이었다. 전봉준과 최시형의 활동 내용을 독립운동 성격으로 규정하여 재단한 것이었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공훈발굴과가 주도하는 독립유공자 공적심사가 대단히 부실하기에, 이런 답변이 나왔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
 

전봉준 장군의 모습 전봉준 동상 ⓒ 박용규

전언에 의하면, 담당 공무원과 심사위원들이 "1895년 을미의병부터 독립운동으로 본다. 포상 범주가 을미의병부터다. 포상 범주에 동학운동은 해당하지 않는다. 동학운동은 독립운동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강변했다고 한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을미의병 참여자가 포상되는 것은 맞다.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항거·순국했기 때문에 포상했다. 을미의병이 식민지 이후에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포상한 것이 아니다. 을미의병은 독립운동이 아니라, 일제의 침탈에 맞선 국권 수호 운동이었다.

포상 범주가 1895년 을미의병부터라는 것도 국가보훈처가 내규로 정한 것일 뿐이다. 일제의 국권침탈을 1895년 경복궁 점령과 민비 시해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아 1895년부터로 잡은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국권침탈 시기를 1895년부터로 잡은 것도 현재의 한국사학계의 학문 연구 성과를 무시한 것이다. 일제의 국권 침탈은 1894년 7월 23일에 일어난 일제의 '경복궁 점령 사건'에서도 이루어졌다. 일제는 경복궁을 점령하고서 고종 임금을 포로로 삼고 친일정권을 세웠다. 명백한 국권 침탈이었다. 이러한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전봉준과 최시형이 2차 동학농민혁명을 진두지휘했고, 그로 인하여 체포되어 순국했다.

1895년부터를 일제의 국권침탈로 본 것은 1980년대까지의 상황에서는 이해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 연구가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들어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사학계의 연구가 쏟아져 나왔다. 이후 2000년대 이후 지금까지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방대한 연구가 나왔다.

국가보훈처의 내규는 내규일 뿐이다.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약칭:독립유공자법)에 규정된 법률대로 심사하면 된다.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라고 되어 있다. 어디에 "1895년부터"라고 규정하고 있는가.

1894년에 일어난 일제의 '경복궁 점령 사건' 이후, 일제가 우리의 국권을 강탈한 행위를 했고, 이에 맞서 동학농민군이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봉기하여 싸웠고, 이로 인해 순국한 행동이 있었다면 "1894년부터"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1895년부터"가 신설불가침의 금과옥조인가. 해당 법률대로 심사하면 된다.

동학운동은 독립운동 아니라고?

"동학운동이 독립운동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황당하다. '독립유공자법'의 내용 중,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항거하다가 그 반대나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는 독립유공 포상자 조건에 포함된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항거·반대·순국했으면 독립유공 포상자 조건에 해당한다. 을미의병 포상자와 동일한 잣대를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해서도 적용하라는 것이다.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항거하다가 순국한 자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유공자로 서훈했다. 식민지 이전에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한 1895년의 을미의병 참여자 이소응·유인석, 을사늑약에 항거한 민영환·최익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에게 독립유공 서훈을 했다. 너무도 지당한 조치였다. 식민지 이후 국권회복에 나선 독립운동가들에게 추서한 독립유공 서훈도 당연했다. 김구 이하 수많은 분들이 항일투쟁 즉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서훈되었다.

그렇다면, 공훈발굴과의 담당 공무원이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에 참여하는 심사위원들은 1895년의 을미의병 참여자들과 동일하게, 전봉준과 최시형이 식민지 이전에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했는지, 항거하다가 순국했는지 여부를 가지고 심사했어야 했다. 두 사람이 1894년과 1895년에 걸쳐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선 행적이 있는지 여부를 가지고 판정했어야 했다.

그런데 공훈발굴과의 담당 공무원이나 독립유공자 심사위원들은 전봉준과 최시형의 행적을 식민지 이후의 독립운동과 연관을 지었기 때문에, "독립운동 성격 불분명"으로 판정을 내렸던 것이다. 납득할 수가 없는 결정이다.

또 다른 전언에 의하면, 독립유공 심사위원들이 "동학 농민 운동은 그 동기가 반봉건 성격이 크다. 2차 봉기도 1차 봉기의 연속선에서 일어났다. 동학 농민 운동을 민족운동으로는 보나 적극적 독립운동으로는 보지 않는다. 국권회복을 위한 적극적 독립운동이 아니었다. 항일이라고 해서 다 포상하지 않는다.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해 학계의 의견이 일치되어 있지 않다"라고 강변하며, 전봉준과 최시형의 포상을 반대했다고 한다.

심사위원들의 강변에 대해서는 2020년부터 새로 사용하는 고등학교 8종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 내용을 통해서 반박이 가능하다. 교과서는 한국사학계의 정설을 반영하여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8종 교과서 전부가 2차 동학 농민 운동이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재봉기를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1차 봉기의 반봉건 투쟁의 연속선상에서 2차 봉기가 일어난 것으로 서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독립 유공 심사위원들은 의병운동을 '국권회복을 위한 적극적 독립운동'으로 보고, 동학 농민 운동은 국권회복을 위한 적극적 독립운동으로 보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런 주장이 타당한지에 대해 살펴보자.

지면 제약 때문에 사례를 간략히 들겠다. 지학사 한국사 교과서는 의병 운동을 "일제 침략에 직접 맞서 싸운 국권 수호 운동이었다"(131쪽)고 기술하고 있다. 비상교육과 미래엔 교과서는 2차 동학농민운동이 "외세의 침략을 물리쳐 나라를 지키려 한 반침략적 성격을 지닌 운동이었다"(각각 111쪽과 113쪽)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운 국권 수호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동아출판 교과서에서는 2차 동학농민운동이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반외세 운동이었다"(101쪽)라고 기술하고 있다. 두 운동은 국권 수호 운동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2차 동학 농민운동과 의병 운동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미래엔 교과서는 2차 봉기에서 "농민군이 항일 구국 투쟁을 전개하였다"(112쪽)고 기술하고 있다. 지학사 교과서는 을미의병에서 "양반 유생들이 항일 운동을 주도하였다"(129쪽)라고 서술하고 있다.

필자는 심사위원들이 '항일이라고 해서 다 포상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궤변이라고 단언한다. 의병운동은 항일투쟁이어서 포상이 되는데, 2차 동학농민운동이 항일투쟁인 것은 맞으나, 포상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런 심사위원회는 폐기되어야 한다.

2차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의 공통점은 적극적인 국권 수호 운동, 항일무장투쟁, 일본의 침탈에 맞선 반침략·반외세 민족운동이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차이점은 항일 투쟁의 주체가 농민이냐, 양반 유생이냐에서 갈렸다. 의병운동에 참여한 양반은 서훈이 되고, 2차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항일 농민은 서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게 우리역사의 민낯이다. 이런 불공평과 모순은 시정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학계의 의견이 일치되어 있지 않다"는 심사위원들의 주장에 대해, 필자는 한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들어 반박한다.

신영우 교수는 일본군의 경복궁 습격 사건 이후, 동학 조직들이 일본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판단, 전쟁 준비에 나섰다고 논증했다(<한국사>39,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1. 동학농민군의 재기」, 국사편찬위원회, 1999, 434쪽). 배항섭 교수는 일본의 경복궁 강점과 내정간섭 등으로 일본의 침략의도가 노골화되자, 전봉준이 폐정개혁에서 '척왜'로 급선회하였고,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여 국가가 멸망한다면, 생민이 하루도 편히 살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기에, 재봉기를 하였다고 논증했다(위의 책,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2. 반일투쟁의 전개」, 448쪽).

정창렬 교수는 1894년 9월 재봉기의 목적이 일본세력을 몰아내려는 것이었다고 하며,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한국군의 무장을 해제하며 친일 정권을 성립시키고, 농민군을 진압하겠다고 나섰기에, 농민군들이 일본군의 침략을 '아국 병탄'으로 간주하여 국가와 자신의 운명을 일체화시켜 재봉기를 했다고 논증했다(위의 책,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3.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 502쪽, 504쪽, 507쪽). 위의 세 역사학자는 모두 동학농민혁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한국사학계는 2차 동학농민운동이 항일 구국 투쟁이었고, 국권 수호 운동이었다는 점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학계의 연구 성과가 반영된 8종 한국사 교과서 서술은 2차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에 대해서도 의견이 모아졌다.

국가보훈처의 담당 공무원들과 독립유공 심사위원들의 판단은 일본의 동학농민혁명 전공 학자들의 그것보다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학자들은 2차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높게 평가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양심이라고 하는 역사학자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와 역사학자 이노우에 가쓰오 교수는 2차 동학농민혁명을 "조선의 항일투쟁"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다. 2차 동학농민혁명을 항일투쟁의 성격으로 분명하게 논증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필자는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가 전봉준·최시형에 대해 기재한 '포상되지 못한 사유'가 타당하지 못함을 낱낱이 제시하였다. 이 글로써 전봉준·최시형에 대해 재심을 하여 주기를 정중히 요청한다.

첫째, 전봉준이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여, 1894년 10월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2차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고, 일본군에 맞서 항거하다가 체포되어 순국했기 때문이다. 그는 2차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총사령관이었다.

올해 5월 11일 국가기록원이 복원하여 공개한 '전봉준 판결선고서 원본'에는 전봉준이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고군분투하며 국권을 수호하는 활약상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전봉준의 활동에 대해서는 필자의 글(링크)을 참조하기 바란다.
 

전봉준 판결선고서 원본 복원된 판결선고서 원본 ⓒ 국가기록원

둘째, 최시형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소식을 듣고, 항일전에 나서고자 충북 옥천 청산에서 동학 북접 간부회의를 소집했고, 1894년 10월 16일에 전국의 동학교도에게 일본군을 몰아내라는 총기포령을 내렸다. 그는 손병희를 통령에 임명하고, 손병희에게 통령기를 주어 항일 전선에 나서게 했다.

그와 손병희가 지휘한 동학농민군은 충북 영동군의 '용산', 충북 보은의 '북실(종곡)', 충주 외서촌의 '되자니'에서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그는 2차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였다. 최시형의 활동에 대해서는 필자의 글(링크)을 참고하기 바란다.

역사학자들도 서훈 촉구... 보훈처는 답하라
 

최시형 선생의 모습 최시형 선생 ⓒ 박용규

2차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에 대한 독립유공 서훈을 촉구하는 연구는 역사학자 박맹수·이이화 선생에 의해 진즉 나왔고, 최근에는 필자도 제기했다. 역사학자 고석규, 한국근대사 연구자인 김삼웅도 서훈을 촉구했다.

필자가 만나본 대다수 역사학자들도 적용을 "1895년부터" 하기 때문에 그렇지, 1894년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도 항일 구국 투쟁에 나섰다가 순국했기에, 당연히 서훈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필자의 주장과 의견이 다른 국가보훈처의 담당 공무원과 독립유공 심사위원은 언론 매체를 통해 반론을 펴기를 바란다. 필자는 반론을 환영한다.
덧붙이는 글 다른 매체에 송고한 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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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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