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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세계'보다 예측불허한 '모녀의 세계'

친정어머니와 함께 산 지 3년, 시트콤 같은 일상... 그래도 함께 할 수 있어 다행

등록 2020.05.17 20:06수정 2020.05.1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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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이비인후과에 가서 약을 넣고 귀지를 녹이는 처치를 받는다. 여든이 넘고 폐가 약한 어머니는 코로나19 상황으로 외출을 자제하고 있어, 병원에 두 달 넘게 가지 못했다. 귀가 부쩍 들리지 않으니 본인도, 주위 사람들도 불편하다. 한여름 같았던 어느 날, 나는 반려견을 산책시키고 집에 들어오는 현관에서 말했다.

나 : "아휴~ 더워."
어머니 : "뭐라고 그러는 거야?"
나 : "더! 워!"
어머니 : "병어?"


병어는 어머니가 특히 좋아하는 생선이다. 평소에 어머니는 당신이 잘 들리지 않으면, 쉬운 영어 단어로 확인차 되묻곤 한다. 바로 그날 저녁, 어머니가 볼 만한 TV프로그램이 없다고 해서 IPTV에서 영화를 함께 골랐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영국 남자배우 휴 그랜트의 <투윅노티스>를 추천했다.

어머니 : "무슨 내용인데?"
나 : "휴 그랜트가 재벌인데, 여자 주인공 변호사랑…"
어머니 : "간호사?"
나 : "아니, 변호사."
어머니 : "Nurse?"
나 : "아니, lawyer (갑자기 내 발음에 자신이 없어진다) 변! 화장실 갈 때 변! 변! 호! 사!"


어머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얘가 왜 갑자기 소리는 지르고 그래." 나는 조심스럽게 어머니께 보청기를 권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귀지가 딱딱한 문제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노인성 난청이 원인이다.

어머니는 보청기를 한 친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어지럼증이 생겼다더라, 이비인후과에서 난 아직 괜찮다던데 하며 핑계를 댄다. 보청기에 대한 거부감이 큰 듯하다. 어쩌면 노화에 대한 거부감일지도.

나 역시 몇 해 전 안과에서 '노안' 진단을 받았을 때, 신체 노화를 실감하고 얼마나 상심했었나. 내가 최대한 크게 또박또박 말하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조심스럽게 어머니께 보청기를 권했지만, 아직은 괜찮다고 하시는 어머니. ⓒ Pixabay

 
어머니는 드라마는 한 번 보기 시작하면, 그 드라마에 맞춰 시간이 돌아가는 것 같아 노예가 된 기분이라며 잘 보지 않는다. 나는 최근 화제가 된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재밌다고 어머니에게 권했다.

어머니는 지난 드라마 회차를 '몰아보기' 하고, 드디어 함께 본방송을 시청했다. 그런데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어머니는 "뭐가 안 된다는 거니?" "뭘 부탁한다는 거니?" 하며 자꾸 대사를 물어서 드라마에 몰입할 수 없었다.

대답하다가 지친 나는 TV 자막 기능을 찾아 띄웠다. 한글 자막은 미리 입력한 것이 아니라, 대사를 바로 코딩해 띄우는지 두세 템포 느리게 떠서 오히려 더 성가셨다. 하는 수 없이 볼륨을 점점 높였다.

나는 기계 오디오에 민감한 편이라, 소리가 크면 머리가 울리면서 아프다. 그때, 드라마 속 불륜을 저지른 남편이 외쳤다.
 

예측할 수 없는 전개로 인기를 얻고 있는 <부부의 세계> 이태오 ⓒ JTBC

 
"내가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맞아, 엄마가 (노인성) 난청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그래, 음향 빵빵한 극장에 왔다고 생각하자. 안방극장 방구석 1열 A석, B석에 앉은 모녀의 본방 사수.

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예측할 수 없는 전개로 인기를 얻고 있다. 나는 원작인 영국 드라마 <닥터 포스터>를 봤기 때문에 대강 극의 흐름을 알지만, 재미를 떨어뜨릴까 봐 어머니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 번은 입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었다. "엄마, 저 친구한테 접근한 젊은 여자 말이야. 이태오가 복수하려고 보낸 여자인 것 같아. 원작 드라마를 보면 비슷한 설정이 나오거든." 말을 해놓고 나니 괜히 말했다 싶었다. 드라마의 극적 재미를 떨어뜨렸구나! 후회했다. 하지만 엄마의 단 한마디 "뭐?" 엄마의 귀가 스포(일러)를 철저히 차단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 다시 방구석 1열에 앉았다. "떨어져 죽은 사람, 현서가 아니다." 엄마가 은밀히 속삭였다. 응? "저기 현장에 정신과 의사가 가 있다" 으응? "엄마, 어떻게 알았어?" "호호호. 유튜브에서 누가 예측한 거 봤어."

스포를 남발하고 뿌듯해하는 어머니가 귀엽다. 그러고 보니 친정어머니와 함께 산지 삼 년이 넘었는데, 시간을 맞춰 함께 TV 앞에 앉아 드라마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지금까지 어머니는 어머니 방에서 TV를 보고, 나는 내 방에서 조용히 혼자 영화를 봤다.

이번에 어머니와 드라마를 같이 보며 파렴치한 남자 주인공을 함께 욕하고, 우유부단한 주변 인물에 같이 쯧쯧 혀를 차고, 안쓰러운 여자 주인공을 안타까워하며 공감하는 즐거움이 컸다. 사실 연기를 잘하네 못하네, 입고 나오는 옷이 예쁘네 아니네 품평하는 재미가 더 크지만. 이런 것이 삶의 소소한 행복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 기회가 무한정 남지 않았다면 더더욱 그렇겠지. 요즘 어머니가 눈에 띄게 노쇠해진 것을 실감한다. 완만한 내리막길이 아닌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가는 것처럼.

이사 온 첫 해, 어머니는 동네 미장원에서 파마하는 날엔 가까운 시장에 들러 장을 봐왔다. 고작 3년 사이, 약을 먹을 정도로 걷는 것이 불편해진 지금은 내가 미장원 문 앞까지 차로 모시고 갔다가, 모시고 와야 한다. 하얗던 피부에 검버섯이 늘어가고, 꼿꼿한 등은 구부러졌다.

어머니는 마음도 약해져 간다. 집에서 기르는 화분들이 시들거나 죽으면 감정이입을 한다 "네 신세나, 내 신세나." 몸도 마음도 점점 사그라지는 엄마를 가까이 지켜보기란 힘든 일이다. 하지만 매일 곁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 또한 축복이다.  

드라마를 보다가 나는 슬쩍 엄마에게 물었다.

나 : "엄마, 나랑 드라마 보니까 좋아?"
어머니 : "좋지."
나 : "나랑 수다 떠니까 재밌지?"
어머니 : "그보다 같이 보니까 전기료를 아낄 수 있잖아."


아, '모녀의 세계'는 드라마 <부부의 세계>만큼 예측할 수 없는 세계로구나!
덧붙이는 글 https://brunch.co.kr/@monchou31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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