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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저항했다 되레 옥살이, 56년 만에 재심 청구

'혀 절단 사건' 최말자씨의 억울한 삶... 여성단체들 “정당방위, 사법부 응답해야”

등록 2020.05.06 15:44수정 2020.05.0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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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성폭행을 시도하려던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가 중상해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최말자(74) 씨가 6일 오후 56년 만에 부산지법으로 재심을 청구했다. ⓒ 김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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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성폭행을 시도하려던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가 중상해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최말자(74) 씨가 6일 오후 56년 만에 부산지법으로 재심을 청구했다. ⓒ 김보성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가 상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오히려 옥살이를 한 여성이 56년 만에 용기를 냈다. 올해 74세가 된 그는 여성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법원에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를 인정해 달라며 재심을 청구했다.

피해자-가해자 뒤바뀐 한 여성의 삶

최말자(74)씨가 18세였던 1964년 5월 6일. 경남 김해의 한 마을 골목에서 A씨와 마주친 최씨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당시 20대였던 A씨가 성폭행을 시도했고, 최씨는 이 과정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저항했다. 그리고 자신의 입에 A씨의 혀가 들어온 순간, 혀를 힘껏 깨물었다. 그렇게 A씨의 혀가 1.5cm 가량 잘려 나갔다.

그는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였지만 수사에서는 되레 죄인으로 내몰렸다. 검찰은 최 씨를 구속하고, 중상해죄 혐의를 씌워 피의자로 몰고 갔다. 성폭행을 시도했던 A씨에게는 강간미수 혐의가 아닌 특수주거침입, 특수협박 혐의만 적용했다.

사건 이후 A씨는 최씨 집을 찾아가 행패를 부리거나 결혼을 요구하는 등 억지를 부렸다. 수사기관과 재판부도 결혼을 권유하는 등 황당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최씨는 6개월간의 구치소 수감을 거쳐 재판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최씨의 행동이 법의 허용 범위를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이후 최씨는 세상의 따가운 시선에 시달려야 했다. 이웃들은 손가락질을 했고, 가족과도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다. 힘든 세월을 보낸 그는 뒤늦게 입학한 방송통신대학 동기의 도움을 받아 70세가 되어서야 여성단체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뭘 해야 할지 생각도 못했고, 너무나 억울한 마음이었어요.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했죠."


2018년 미투 운동을 보며 힘을 얻었다던 최씨는 6일 여성단체, 변호사들과 함께 부산지방법원을 찾았다. 이날 재심청구서를 든 그는 "억울함을 풀고 정당방위가 받아들여져 무죄가 내려지길 원한다"며 "사법부가 달라져 우리 후손들한테는 이런 아픔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법부 재심 결정으로 사건 바로 잡아야"

이날 최씨 곁에 선 한국여성의전화, 부산여성단체연합 등 384개 여성단체들은 "재심 결정으로 피해자 인권 회복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대표는 "오늘은 그 사건이 일어난 지 56년이 되는 날이다. 긴 세월 동안 겪었을 상처를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프고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사법부는 재심 개시로 이에 응답해야 한다"며 "피해자분이 외롭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최씨를 응원했다.

석영미 부산여성단체연합 대표는 "참담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피해자가 왜 가해자로 둔갑하고, 왜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하느냐"며 "사법부는 용기를 낸 피해자에게 응답을 늦추거나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죽을 것 같은 공포와 위압에서 한 행동은 정당방위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인 김지은씨도 최 씨를 응원하는 글을 보냈다. 김씨는 글에서 "56년 전 일어난 부조리는 재심 청구 이후 더는 반복되지 않으리라 믿는다"며 "여자라는 이유로 고통받지 않는 세상을 위해 함께 싸우겠다"라고 밝혔다.

기자회견을 마친 최씨와 여성단체들은 재심청구서를 부산지법 민원실에 접수했다. 이번 재심 사건의 변호를 맡은 김수정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는 "저 또한 형법 교과서에서 처음 접했던 사건"이라며 "수사 과정의 위법성을 확인했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피해자의 상황상 정조는 가해자의 혀보다 가볍게 취급될 것이 아니었다"고 청구 내용을 전했다.

그는 "피해자는 이 사건으로 평범한 삶이 뒤바뀌었다. 56년 만에 억울함을 풀고자 용기 있게 나선 만큼 법이 재심의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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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성폭행을 시도하려던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가 중상해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최말자(74) 씨가 6일 오후 56년 만에 부산지법으로 재심을 청구했다. ⓒ 김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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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성폭행을 시도하려던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가 중상해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최말자(74) 씨가 6일 오후 56년 만에 부산지법으로 재심을 청구했다. ⓒ 김보성

#혀 절단 성폭행 사건 #재심 #가해자 #56년 만의 미투 #부산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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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보성 기자입니다. kimbsv1@gmail.com/ kimbsv1@ohmynews.com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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