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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영화를 봐야 하는 단 한 가지 이유

[리뷰]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오>

20.04.25 15:23최종업데이트20.04.25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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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오' 2019년 개봉 당시 영화 포스터 ⓒ 넷플릭스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상상해 보자. 당신은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연인의 얼굴이 도통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심지어 당신은 당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 구원처럼 당신의 지난 모든 인생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누군가 당신 앞에 나타난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절망적인 당신에겐 아마 신의 전언처럼 들릴 것이다. 당신은 그를 온전히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제 당신에게 당신의 인생에 관해, 당신이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하는 그. 당신은, 그의 말이 달콤한 거짓말이라도 괜찮은가?
 
넷플릭스의 <내가 누구인지 말해 주오>(원제: Tell me Who I Am)는 알렉스와 마커스 형제가 2013년 출간한 회고록을 바탕으로 에드 퍼킨스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총 3장으로 구성되어 1장에서는 교통사고로 18세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은 알렉스의 입장에서, 2장에서는 알렉스의 모든 것을 알지만 그것을 달콤한 거짓말로 포장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마커스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마지막 3장에서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참혹한 진실을 관객과 함께 공유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마커스가 감추어 두었던 형제의 삶, 그 어두운 이면을 들여다보는 순간, 관객은 끝없는 분노와 슬픔 속에 빠져든다. 그리고 충격적인 결말 앞에서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만약 알렉스라면? 혹은 마커스라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알렉스가 사고 이후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그 곁에는 그의 쌍둥이 형제 마커스가 있었다. 알렉스는 사고 이전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였지만, 유일하게 자신의 쌍둥이 형제인 마커스의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알렉스의 잃어버린 기억은 오로지 마커스의 입을 통해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부유하고 사교적인 부모님 밑에서 행복하게 지낸 어린 시절. 프랑스 해변에서의 즐거웠던 추억이 담긴 사진을 보면서 알렉스는 마커스의 말대로 자신이 꽤 괜찮은 인생을 살아왔음에 안도한다. 물론 의문스러운 점도 몇 가지 있긴 했다. 왜 알렉스와 마커스 형제는 집이 아닌, 집에 딸린 창고에서 부모와 떨어져 따로 사는 것일까. 왜 어머니는 그들에게 집 열쇠를 주지 않는 걸까. 그러나 간단한 사물의 이름조차 마커스의 도움 없이는 기억해 낼 수 없었던 알렉스는 그것이 그저 평범한 가족의 모습이겠거니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형제의 아버지는 엄격하다 못해 냉담했다. 알렉스가 병원에 있는 동안 한 번도 알렉스를 찾지 않았고, 형제들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췌장암으로 죽어가는 와중에 형제를 불러 그동안 엄하게 대했던 것을 용서해달라 청한다. 물론 용서하겠다고 대답하는 알렉스. 그런데 뜻밖에 마커스가 단호하다. "아니오, 난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알렉스는 당황한다. 왜지? 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마커스는 저렇게 차갑게 구는 거지? 얼마 뒤, 어머니마저 죽음을 맞이하고 알렉스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었다는 슬픔에 빠져 자책한다. 그러나 마커스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그러했듯이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는다. 알렉스는 차츰 마커스가 자신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다시 상상해 보자. 당신 앞에 기억을 잃은 당신의 쌍둥이 형제가 있다. 당신과 그는 어린 시절 내내 부모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학대를 겪었다. 그런데 그는 모든 기억을 잃은 채 당신에게 묻는다. 나는 어떻게 살았어? 행복했어? 당신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당신이 그와 함께 겪었던 그 끔찍한 경험을 그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당신이 혼자 감당할 몫의 고통으로 덮어두고 그에게 아름답고 달콤한 추억을 거짓으로 꾸며 들려줄 것인가.

마커스는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 알렉스에게 거짓으로 꾸며낸 행복한 기억을 심어주는 한편 자기 자신 또한 그간의 고통을 지우려고 애썼다. 그러나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 드디어 들어간 집안에서 알렉스가 발견한 비밀스러운 상자. 알렉스는 기어의 그 상자를 열고야 만다. 사진 안에 든 것은, 얼굴이 잘린 채 나체로 서 있는 자신과 마커스의 사진이다. 게다가 집안 곳곳에서 발견된 셀 수 없이 많은 성인용품과 은밀하게 감춰 놓은 현금 뭉치들까지, 알렉스는 절망한다.
 
알렉스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마커스의 얘기처럼 행복하지 않았던 것을 짐작하고 묻지만 마커스는 형제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학대당했다는 사실만 인정할 뿐, 그보다 깊은 이야기는 해주지 않는다. 알렉스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파헤치고, 마커스는 계속 달아나는 그 묘한 관계는 이십 년이 넘게 지속된다. 이제 두 사람은 쉰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었다. 두 사람 모두 그동안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이어왔다. 그러나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는 그들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전히 형제의 삶은 불안하고 초조할 뿐이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두 사람의 심정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진실을 알고 싶고, 기억 속에 지워진 나머지 인생을 되찾고 싶은 알렉스의 간절함은 물론 진실을 덮고 싶고, 기억 속에 영영 지워지길 소망하는 마커스의 절실함 또한.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면 결국, 두 사람 모두 어쩔 수 없었겠구나, 하는 깊은 연민이 밀려오며 가슴 한편이 울컥해진다.
 

알렉스와 마커스 형제의 현재 모습 ⓒ 넷플릭스

 
"난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몰라요. 마커스가 얘기해 줘야지요. 내 인생의 진실과 거짓이 뭔지 알려면요. 마지막 퍼즐 조각을 받아야 해요. 우리가 살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
 
"너한테 그 얘기를 해 주면 나도 기억이 되살아나니까. 오랜 세월 동안 잊으려고 애썼는데, 꼭꼭 숨기고 묻어 왔다고."

 
마침내 알렉스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기로 결심한 마커스. 알렉스를 보고 직접 말할 용기가 없다는 마커스가 자리를 뜨고 난 뒤, 알렉스는 노트북 속에 담긴 인터뷰 영상을 통해 마커스가 그토록 감추려고 애써온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하다. 형제를 자신의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삼았던 건, 몇 푼의 돈으로 소아성애자 친구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아이들을 팔아넘긴 건, 알렉스가 사랑해 마지않던 그 다정한 어머니였다는 사실이 알렉스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영상에 담겨 있는 마커스의 인터뷰는 소름끼치도록 적나라하다. 무수한 추행과 성폭행, 강간으로 얼룩진 암울한 어린 시절과 그 모든 것의 시작점이었던 어머니에 대해 담담하게 토로하는 마커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비단 마커스와 알렉스 형제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님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는 아직도 전 세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가해자가 부모인 경우도 너무나 많다. 그들을 대변해서 형제는 용감하게 카메라 앞에 섰다. 따라서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함께 분노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을 나는 마커스가 관객에게 남긴 인터뷰로 대신하고자 한다.
 
"분명히 말할게요. 난 여러분을 만난 적도 없고 누군지도 모르지만, 여러분은 우리 어머니를 알죠. 어머니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도요. 그것만으로도 힘이 돼요. 나한테 필요한 거죠. 우리 모두에게요."
 
넷플릭스 실화 바탕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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