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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4.15총선1510화

김부겸을 응원했던 선배는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주장] 여전히 변하고 있는 대구, 김부겸을 다시 지켜보려 합니다

등록 2020.04.18 15:46수정 2020.04.18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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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을 하는 친한 선배의 호출에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 네 명이 한 곳에 모였다. 각자 준비해온 음식을 상에 차려놓고 TV를 켰다. 일찌감치 식당 영업은 끝낸 참이다. 식당을 하는 선배는 오후 내내 돼지고기 수육을 준비했고, 다른 사람은 잘 삭힌 홍어를 주문해서 테이블에 곱게 놓아뒀다. 나는 지난 주말 산에서 채취한 엄나무순(개두릅)을 준비했다. 그렇게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 개표방송 파티 준비가 끝났다. 

선거 기간 내내 분위기가 좋았기 때문에 이젠 환호성 지를 일과 축하주를 진탕 먹으면 되겠다 싶었다. 참고로, 이 파티에 모인 네 사람 모두 더불어민주당원은 아니지만 여권이 총선에서 승리하길 바라는 사람들이다. 대구에도 이런 사람들 많다. 진짜다.

오후 6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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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6시 15분 이후, 대구 수성갑의 출구조사 발표 당시. ⓒ KBS갈무리

 
방송3사의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종합적으로 민주당의 압승이라 서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선배 둘이 하이파이브하다가 술잔을 엎질렀다. 이 자리의 막내인 47살의 내가 행주로 테이블을 닦았다. 벌써 술이 모자랐다. 역시 막내인 내가 다시 편의점으로 출동. 소주 몇 병을 사온 뒤 식당 문을 여는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하이파이브하면서 환호하던 그 분위기가 아니다.

"에이씨, 출구조사가 발표됐는데 김부겸이가 진다네. 주호영이 61.2%고 김부겸은 37.8%밖에 안 나온대. 설마 했는데 뭐 이래."
"설마요. 여론조사는 안 좋았지만 막판에 많이 추격했다고 하던데? 너무 차이가 나잖아요. 그래도 현역 의원인데…"
"아냐! 출구조사가 저렇게 나오면 가망 없어. 김부겸도 떨어지고 홍의락도 떨어진단다. 진짜 대구에 사는 게 싫다."


식당을 하는 선배는 김부겸의 지역구인 수성갑에 산다. 틈틈이 김부겸의 유세에 참석해 응원했던 사람이었다. 그 선배는 조용히 담배를 꺼내 밖으로 나가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선배 둘은 어느새 술에 취해 욕설과 함께 격정적인 정치 비평을 술잔과 함께 주거니받거니 했다. 개표방송 시작 때의 흥분은 어느새 사라지고 욕설과 분노가 식당 안에 가득 찼다. TV에 집중하던 시선은 어느새 한 잔, 두 잔 마신 소주에 집중력을 잃고 희미해져갔다.
 

시민들과 함께 해온 김부겸 김부겸은 대구 곳곳에서 시민들을 만났다. 대구 시민에게 김부겸은 수성갑 국회의원이 아닌 대구 정치의 상징이다(2019년 오마이뉴스에서 주최한 평화통일염원 밤길 걷기대회 당시 필자와 찍은 사진). ⓒ 조명호

 
민주당 압승으로 끝난 총선, 그러나 대구는

선거는 끝났다. 민주당은 21대 총선에서 180석에 달하는 압승을 거뒀다(더불어시민당 포함). 언론에서는 민주당의 역대급 승리이니 미래통합당의 궤멸적 참패니 갖 가지 평가를 내놓고 있다. 

정권심판론을 외쳤던 통합당은 비례위성정당을 포함해 103석을 거뒀다. 그중 대구는 12개 지역구 가운데 홍준표 무소속 후보가 당선한 수성을을 제외하고 11개 지역구를 석권했다. 경북은 13개 지역구 모두 통합당이 가져갔다. 통합당이 얻은 84개 지역구 당선자 중 24명이 대구·경북 후보다. 부산·울산·경남도 통합당이 압승했으나 민주당 당선자가 몇 명이라도 있긴 있다. 그에 반해 대구·경북은 그야말로 통합당이 '싹쓸이'했다. 그 물결에 김부겸이라는 정치인도 힘없이 무너졌다.

대구 수성구는 학력이 높고, 금융자산이 전국 1~2위를 다투는 곳이다. 김부겸은 자신의 지역구 수성구를 두고 "서울 강남을 아래로 보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자존심이 세고 스스로 보수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 곳이니 6공의 실세 박철언이 3선을 했고, 김만제·이한구 등 보수 유력 정치인이 당선되며 TK 정치 1번지라는 명성을 갖고 있다. 자부심이 있는 지역구란 이야기다.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대구 수성갑 국회의원 후보 선거사무실 현수막. ⓒ 조정훈

 
그곳에 김부겸은 민주당의 깃발을 들고 19대 총선에서 출마해 40% 넘는 득표율을 보이고, 20대 총선에선 62.3%라는 득표율로 당선됐다. 그는 전국적으로 지역주의의 아성을 무너뜨린 인물로 주목을 받았고, 문재인 정부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대구 사람의 특징인지 우리나라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인지는 몰라도 범진보 정치인에 대한 평가 기준은 유독 엄격하다. 이번에 김부겸과 맞붙은 주호영은 수성갑 지역구도 아니었다. 김부겸을 낙선시키기 위해 통합당이 수성을에서 수성갑으로 '자객공천'했다.

주호영을 포함한 통합당 사람들이 코로나19를 '우한 코로나'라고 불러야 한다고 떠들고 다닐 때 김부겸은 중앙정부와 대구를 오가며 뛰어다녔다. 하지만 대구 사람들은 그런 김부겸에게 '장관한다고 지역구는 나 몰라라 했다'고 비난했다. 그런 사정을 아는 김부겸은 21대 총선을 맞았다. 그는 동 단위 간담회를 통해 주민들을 만나고, 대구에 있는 각종 행사에 나타나 특유의 스킨십을 보여주며 시민들과 소통했다.

제발 대구 사람에게 욕하지 마시라

주호영 59.8%, 김부겸 39.2%

그렇게 김부겸은 떨어졌다. 다른 지역에 사는 지인들이 '대구는 왜 그러냐'며 전화가 왔다. 페이스북 같은 곳에서는 대구·경북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글들이 넘쳐난다. 각종 언론에선 지역주의의 벽이 여전히 강고하다고 떠들지만 그건 지금의 현상만 보고 변화의 흐름을 보지 못하는 단편적인 분석일 뿐이다.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수성갑 지역구 득표율은 6.66%였다.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했지만 범진보 계열의 득표율은 꾸준히 상승해왔다. 대구·경북은 퇴조하는 지역주의 정치의 마지막 증거일 뿐이지 강고한 지역주의의 본거지는 결코 아니다. 김부겸이란 정치인이 그 증거 아닌가.
 

대구 수성갑 지역구 범진보계열 정당의 득표율 추이 지역주의가 강고하다고 분석하지만 지역주의는 점점 약해져 간다. 김부겸이 당선하고 낙선하는 역동성이 그 증거이다 ⓒ 조명호

   
소셜미디어에서 어떤 유명인사는 '대구는 독립해서 일본으로 가라'고 하고, '대구 시민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조롱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뭐가 달라지는가?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니 좌빨이니 욕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대구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선거운동원도 아닌데 파란 점퍼 사 입고 유세에 참가하는 식당 주인 선배도 있고, 김부겸 낙선 소식에 밤새 술을 마시며 울분을 토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무엇보다 대구라는 곳에서 열심히 '밭'을 일구는 김부겸이 여전히 있다. 그런 김부겸을 당선시켰던 사람도 대구사람이고, 이번에 낙선시킨 사람도 대구사람들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 김부겸은 오늘의 패배를 제 정치 인생의 교훈으로 삼겠습니다. 그러나 대구에 바쳤던 제 마음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지역주의 극복과 통합의 정치를 향한 제 발걸음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저 김부겸은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오늘은 비록 실패한 농부이지만, 한국 정치의 밭을 더 깊이 갈겠습니다. 영남이 문전옥답이 되도록 더 많은 땀을 쏟겠습니다." - 김부겸 낙선 인사 중

 

김부겸의 단골 돼지국밥집 김부겸과 우연히 국밥집에서 마추쳐 소주 한잔 하고 싶다. 김부겸은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 김부겸 의원실 블로그

 
바라건대 김부겸이 자주 가는 돼지국밥집에서 우연히 김부겸과 마주쳐 소주 한 잔 마시고 싶다. 다른 정치인은 몰라도 김부겸은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소주 한 잔 할 사람이 있다. 내가 졸업한 대학교 과 선배도 이번에 대구에 출마했다. 그 선배도 파란 점퍼를 입고 김부겸과 같은 번호를 달고 달구벌 서쪽 끝에서 선거운동을 했다. 그 선배도 물론 떨어졌다.
#김부겸 #수성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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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에 행복과 미소가 담긴 글을 쓰고 싶습니다. 대구에 사는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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