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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 퇴진" 외친 MBC 해직 PD는 왜 클래식 책을 썼을까

[서평] 이채훈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 흔들리는 삶을 붙잡아준 음악의 힘

등록 2020.04.19 11:34수정 2020.04.19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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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운동장 귀퉁이에서 고무줄을 팔짝팔짝 뛰고 있는데, 구령대 앞에서 엄마가 나를 불렀다. 그땐 엄마가 학교 오는 것이 왜 그렇게 부끄러웠던지. 친구들이 "너희 엄마 또 왔다" 할 때마다 양보심 없는 언니, 오빠를 원망했다.

당시 언니는 6학년, 오빠는 5학년이었는데 이 남매들은 맨날 무슨 상을 그렇게 받았다. 아마, 그날도 둘 중 누군가 경시대회 같은 데서 상을 받은 모양인데, 엄마가 위풍당당하게 한복을 차려입고 학교에 왔다. 마지못해 불려간 자리에서 엄마는 나를 무용 선생님께 소개했다. 그날로 나는 학교 발레부가 되었다.


수업이 끝나면 놀아야 하는데, 연습실에 붙잡혀서 다리를 찢었다. 내 마음도 찢어졌다. 그렇게 몇 달 연습을 하고 본격적인 동작에 들어갔다. 선생님은 우리가 할 무용의 음악이라며 테이프를 틀었는데, 그 순간 '숨멎'.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였다.

이후, 연습실 가는 게 즐거웠다. 그 우아한 음악에 우아한 동작을 하니 진짜 백조가 된 듯했다. 발레부라고 전문적인 무용을 했다기보단 학예회 수준의 공연을 몇 번 하고 문을 닫았다.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이런 음악은 뭘까?

내게 깊숙이 뿌리 내린 음악

나는 피아노 학원에 보내 달라고 했다. 엄마는 '무르기 없기'라는 근엄한 표정으로 내 손목을 잡고 당장 학원으로 갔다. 모차르트는 그렇게 내게 왔다. 모차르트 '소나타'는 천방지축 내 성정과 잘 맞았다. 밝은 가운데 뭔가 감성을 자극하는 그의 곡이 좋았다.

그렇게 친절하던 선생님이 시간이 흐를수록 무서워졌다. 30㎝ 자를 들고 옆에 앉아 조금만 틀려도 손등을 때렸다. 다른 아이들은 옆방에서 떠들면서 피아노를 치는데 선생님은 화난 얼굴로 내 옆에만 있었다. 그때부터 음악이 공포로 다가왔다. 나는 시름시름 앓았다. 진짜 배가 아프고 두통이 왔다.


딸이 자꾸 아프자, 엄마가 피아노를 끊어줬다. 난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런데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왔다. 선생님은 내가 재능이 있으니, 자기를 믿고 나를 달라고 했다. 이건 무슨 최진사 집 셋째딸을 달라는 건넛마을 총각도 아니고. 나는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맞는 게 무서워서 열심히 친 거라고 속으로 울부짖으며, 엄마가 나를 보낼까 봐 문 뒤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엄마는 나를 보내지 않았고 나는 피아노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음악은 이미 내게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처음 쇼팽의 '녹턴'과 '발라드'를 들었을 때의 충격, 이건 천상의 소리 같았다.

동네 아줌마 파마머리를 한 베토벤은 비주얼부터 무서워서 손이 가지 않았지만, '월광'을 듣고 한 방에 케이오(KO) 당하고, '열정 3악장'을 듣고는 알 수 없는 열정에 사로잡혀 밤마다 허공에 대고 연주하며 몽유병 걸린 아이처럼 별이 빛나는 마당을 서성였다. 마치, 빈속에 에스프레소 5잔 마신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엘가의 '첼로 협주곡'에 빠져 비련의 여주인공인 양 정처 없는 눈동자로 하염없는 몇 달을 보내기도 했다.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 속 진짜 아름다운 이야기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 ⓒ 혜다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란 책이 나왔다. '사연 있는 클래식'이란 제목으로 클래식 글을 연재하고 있는 내게 이런 책이 눈에 들어오는 건, 당연한 일.

근데, 이 책은 조금 특별하다. 클래식 책이니 클래식에 관련된 정보는 기본이다. 또, QR코드가 찍혀 있어 스마트폰만 대면 유튜브와 연결되어 설명하는 곡이 흐르고, 곡마다 연주자들도 추천되어 있다. 이탈리아에서 열린 AI 피아니스트와 사람 피아니스트의 대결도 자세한 번역과 함께 링크라 걸려 있으니 보면 흥미로운 점이 많다.

하지만 이 책이 진짜 특별한 이유는 '소년, 클래식을 만나다'란 소제목의 글이다. 각 챕터 사이 있는 저자의 고유한 이야기다. 그의 삶이 클래식과 버무려지며 오묘한 화음을 만들어 내는데, 이 화음이 대단히 울림이 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공지영은 "한 사람을 알고 나면 그 사람 글이 다르게 읽힌다. 글에서 음성이 들리고 모습이 보이게 되니까. (중략)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음악에서 육체가 느껴지고 감각이 생생해져서 그만 음악 듣기가 어떤 사건으로 변해버린다"라고 썼는데, 완벽한 표현이다.

저자가 열두 살 때 21살의 누나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클래식 기타를 쳤던 누나는 돈을 버는 대로 클래식 LP 음반을 보물처럼 간직했었는데.
 
누나가 모은 LP 음반 중 브루노 발터가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을 듣고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은 건 누나가 죽은 뒤였다. (중략) 살아있는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려 한 한 인간의 선택에 대해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누나의 외로움을 나는 지금도 상상할 수 없다. 누나는 내게 음악을 남겨주고 떠났다.

(중략) 그런데, 이 곡의 제목이 운명이라니! 누나의 운명, 나의 운명. 인간의 운명이란 게 도대체 뭘까. (중략) 빰빰빰빰~ 이 처절한 외침은 인생이 엄숙하다고 내게 얘기하고 있었다. (p115~117)
 
"살아있는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려 한 한 인간의 선택에 대해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라는 문장에 마음이 묶여 한참을 머물렀다. 시린 맘으로 이 곡을 다시 듣는데... 육체를 가지고 온 '운명'은 역시나 다르게 들렸다.

음악으로 만나는 새로운 친구

베토벤과 운명적으로 만난 저자는 모차르트와도 사랑에 빠지지만, 왠지 베토벤을 배신하는 것 같은 죄책감을 품는다. 이 감정은 누구보다도 나도 잘 안다. 리스트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괜히 나 혼자 쇼팽에게 미안해지는 그 심정이랄까? 무슨 상관이라고!
 
모차르트와 사랑에 빠진 것은 분명했지만 드러낼 수는 없었다. 베토벤을 숭배하는 내가 모차르트를 사랑한다는 게 왠지 부도덕하게 느껴졌다. 모차르트는 인생의 고뇌를 모르는 작곡가로만 보였고 달콤한 그의 음악에 마음을 맡긴다는 것은 베토벤에 대한 배신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중략) 당시 대학생이던 형은 내게 저 하늘의 별처럼 드높은 지성인이었다. 모차르트에 대한 은밀한 사랑을 고백할 사람은 형뿐이었다. 그런데, 내 표현은 이랬다. "모차르트 음악은 거지 같아!" 어떤 여자애를 좋아하면서 그 마음을 숨기려고 "그 애는 못생겼어!"라고 둘러대는 사춘기 꼬마의 치기였다. 형의 대답은 이랬다. "거지 같은 것도 못 만드는 주제에 웬 건방진 소리냐?"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p147~148)
 
음악가의 길을 가고 싶었던 저자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대신 클래식 기타를 조금 배워 고등학교 졸업반 때 '문학의 밤'에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주했는데.
 
"이 곡을 연주하다가 트레몰로 소리가 이빨 빠진 듯 덜덜거려서 쫄딱 망했던 기억이 난다. 같은 무대에서 훗날 록밴드 '마그마'의 리드싱어가 되는 조하문이 비틀스와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를 멋지게 불렀는데, 그가 열렬한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면, 나는 뜨거운 위로의 박수를 받았다." (p199~200)
 
1984년 MBC에 입사한 저자는 다큐멘터리 피디가 되었고, 1995년 그에게 본격적인 음악 다큐멘터리를 만들 기회가 왔다. <광복 50주년 특별 기획 - 21세기 음악의 주역,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가 그 시작이었다. 르네상스의 중심지 피렌체 베키오 궁전에서 베를린 필하모니 유러피언 콘서트가 주빈 메타의 지휘로 열렸는데, 협연자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장영주)이었다. 연달아 모차르트 250주년 특집, 쇼팽 200주년 특집 등 많은 음악 다큐멘터리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

2012년 저자는 MBC 사장 퇴진을 요구하다 해고되었다. 이후, 그와 가족들은 생활고를 겪으며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그 와중에 그를 지탱해 준 것은 주변의 손길과 음악이었다. 재단법인 '진실의 힘 음악 여행 - 마음에서 마음으로'를 진행했고,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가 주도하는 '힐링 톡'에도 참여했다.
 
"나 자신이 상처를 입고 나니 다른 이들의 상처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치유한다는 건 가당찮은 일이었다.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그 시간, 정작 위로받은 이는 나 자신이었다." (p352)
 
한편의 휴먼 드라마를 읽은 듯 마음이 뭉클했다. 문득 인생이 넓은 오선지라면, 소년과 소녀가 다른 악장, 다른 센텐스에서 사분음표, 팔분음표, 때로는 십육분음표로 머물다 40년이 지난 어느 벚꽃이 휘날리는 봄날, 한 마디 안에서 이음줄로 연결된 느낌이 들었다.

그가 말한다. 음악에 대해 글을 쓰고 강연을 하는 것은 필시 새로운 음악 친구를 만나기 위해 손을 내미는 행위라고... 그래서 나는 오늘 그가 내미는 손을 기꺼이 잡았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 - 모든 언어가 멈췄을 때- 음악 한 줄기가 남았다

이채훈 (지은이),
혜다, 2020


#소설처럼아름다운클래식이야기 #사연있는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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