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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입가경 '부부의 세계'... 그래도 기대 갖게 만든 이 사람

[TV 리뷰]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

20.04.13 18:56최종업데이트20.04.13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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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한 장면 ⓒ JTBC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 속 선우(김희애 분)는 분명 '태오(박해준 분)에게 과분한' 여자였다. 선우가 마침내 숨겨온 칼날인 이혼을 들이대자, 태오의 비루한 남성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으니...
 
선우가 새벽에 귀가하자 외도를 의심하며 휴대폰을 뒤지고, 그 의심을 들키자 아들을 방패삼아 "준영이한테 신경 좀 쓰라"며 모성을 빙자한 분풀이를 하고, 선우가 제혁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폭로하자, "니가 어떻게 딴 새끼랑 잘 수 있냐"며 작렬하는 '내로남불' 코스프레에, 덤으로, 자신을 먹여 살린 선우의 전문의 자격증에 자신의 지분을 요구하는 몰염치까지, 부실한 남성성을 집대성했다고 해야 할까.

하긴 이해할 수 없는 건 어찌 보면, 평생을 능력 있는 마누라의 우산 속에서 소나기를 피해왔던 태오가 아니라, 오히려 저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도 저토록 못난 남자와 살아온 선우이지 않을까.

'더 이상 비열할 수 없다'로 모드를 완전히 바꾼 태오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한 장면 ⓒ JTBC

 
이제 더 이상 이혼의 비수를 숨길 이유가 없어지자, 선우가 서늘히 뽑아 든 칼날은 마치 망나니의 춤사위와도 같다. 망나니의 몸짓을 따라가기에 벅찬 시청자는, '선우가 좀 과한 거 같은데' 하며, 선우의 응징이 다분히 히스테리컬 함을 감지한다.

그녀의 격발을 납득시키기 위해 내비치는 선우의 어릴적 트라우마는, 그의 정상가족에 대한 집착이 단지 사랑만이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부모 동반 교통사고가 어쩌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외도한 아버지를 응징하기 위한 엄마의 처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과도한 설정으로 선우의 히스테리에 이유 있음을 증명하긴 하지만.
 
선우의 이혼 통고와 함께 '더 이상 비열할 수 없다'로 모드를 완전히 바꾼 태오는, 이혼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선우의 가장 큰 약점인 부모 사고의 미스터리를 끄집어낸다. 허나 아들 양육권을 뺏기 위해 선우에게 정신 감정을 받아야 한다는 모함을 서슴지 않는 태오 역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자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들키고 말았다.

아버지 없이 자란 자신에게서 아들을 뺏는다는 울분을 토해내는 태오 역시, 부모의 동반 사망 사고 현장에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선우처럼, 아버지 없이 자란 서러운 '어린 사내애'에 머물러 있었음을. 하지만 분노에 눈이 먼 태오는 너무나 부주의했다. 선우에게 그 일을 발설하는 것이 판도라의 상자를 활짝 열어젖힌 일인 것을 알아채지 못했으니, 태오는 선우의 지옥행 열차에 동반될 수밖에 없다. 어리석은 데다 위험한 짓까지 하고 만 태오는 선혈이 낭자한 망나니 춤판에 동시 입장되고 말았다.

가부장제 가족제도에 인질이 된 여성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한 장면 ⓒ JTBC


가정을 지키려는 선우의 노력이 정상가족에 대한 집착이었음은 이미 내비쳐졌다. 부모 죽은 "불쌍한 기집애"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한 알리바이에 완벽한 화룡정점이 바로, 성공한 결혼, 정상 가족이었던 것이다. 의사라는 완벽한 커리어만으로 성에 차지 않았던 이유는, 파국으로 끝난 부모의 불행한 결혼을 절대 상속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을 것이다. 아이에게 부모는 더할 수 없는 배경이다. 아이는 배경을 절대 선택할 수 없지만, 사회는 이를 자연처럼 받아들인다. 불행한 부모에게, 나쁜 부모에게, 비정상 부모에게 제대로 된 아이가 나올 리 없다는 유구한 미신은 평생토록 인간을 옭아맨다.

부모가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아이가 구성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나쁜 부모에게도 선량한 아이가, 불행한 부모에게도 행복한 아이가 존재하는 예는 연구로도 실체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부모와 자식만으로 구성된 혈연 가족만이 정상 가족이며, 부모만이 아이를 온전히 양육할 수 있다는 공고한 가족주의는 사회가 승인한 판타지일 뿐이다.

저토록 유능한 커리어우먼조차 근대 이후 여성을 집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고안된 가부장의 가족제도에 인질이 된 셈이다. 선우에게서 '부모 잃은 불쌍한 기집애'라는 낙인을 지우지 않았다면, 가족만이 정상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사회가 강요하지 않았다면, 선우는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다경(한소희 분)은 어떤가? 다경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상식적이지 않은 캐릭터다. 드라마는 다경을 통해 대체 뭘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한 젊은 여자, 게다 맨손으로 자신의 명예를 쌓아올린 선우와 달리, 부자인 아버지의 명망과 부라는 든든한 배경을 노력 없이 거머쥘 유일한 상속녀인 다경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저토록 지질한 남자 태오와 사랑에 빠진단 말인가.

드라마는 다경이 혼외 임신이라는 악수를 두어가며 태오에 집착하는 이유를 전혀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다. 가진 것이 많아 잃을 게 없는 상속녀의 사랑이라면 보다 거침없던가, 차라리 악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작 태오 따위의 남자에게 "확실히 내조할게"라며 순애보를 쓴다고?
 
앞선 세기의 여성들은 결혼 하지 않을 권리가 없어 결혼을 해야 했다. 결혼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지킬 아무런 수단이 없었기에, 결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물론 지금도 이성애 가족주의는 여전히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강력하게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적지 않은 여성들이 이 공고함에 균열을 내기 위해 용감히 다른 길을 내고 있다. 하물며 모든 자원을 갖춘 다경과 같은 여성이 고작 내조하는 삶을 염원한다고 드라마는 우겨대고 있는 것인가? 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되어있는 새가 날개 죽지를 고이 접고 새장에 갇히겠다면, 그것도 사랑이라면, 드라마는 기만적 순애보에 기대지 말고, 그 사랑에 납득할 근거를 대야 한다.
 
이쯤 되면 드라마는 다경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선택을 젊은 여자의 '순수한' 사랑이라고 생떼를 쓰며, 무책임한 태오를 키다리 아저씨라 우기는 격이다. 든든한 부모라는 더할 나위 없는 빽을 둔 젊은 여성이, 고작 유부남과의 불투명한 미래에 온 몸을 투척한다는 설정은 너무나 비상식적이다. 네거리에 서서 물어보자. 어떤 여자가 다경과 같은 선택을 하겠는가. 뭐 혹시 다경도 저런 못난 남자에게 집착하는 트라우마가 있다고 뒷 얘기를 설정한 셈인가? 오호, 무리수다. 모든 여성을 트라우마에 끌려다니는 노예로 설정하는 드라마라면, 진짜 막장이라는 혐의를 지우기 힘들 텐데.

현서가 다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한 장면 ⓒ JTBC


모든 인간이 트라우마에 갇혀 사는 것은 아니다. 깊은 상처는 사람을 망가지게도 하지만, 상처를 도약해 그 한계를 뛰어넘게도 한다. 그렇다면 삶이 위기이고 상처인 현서(심은우 분)는 어떻게 자신의 상흔을 디디고 일어설까? 나의 관심은 다시 이 드라마에서 가장 자원이 취약한 존재인 현서에게로 향한다. 오히려 잃을 것이 없는 현서는 지킬 것이 많아 저리도 애면글면하는 선우나 다경과 다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으면서.
 
데이트폭력을 일삼는 인규(이학주 분)는 마침내 현서가 선우에게 공모한 결정적 단서를 잡는다. 단서를 틀어쥔 인규는 선우를 더욱 몰아치며 압박한다. 고작 애인이나 갈취하며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인규는 나름 계산이 빠르고 영악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계산기를 잘 두드렸다고 생각하며 선우에게 들이댄 청구서에 오차가 있다. 선우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하지만 비장의 무기이기도 한 트라우마를 계산에 넣지 못했다. 선우의 분노에 걸림쇠가 풀린 방아쇠의 표적에 인규 역시 걸리고 말았다.
 
선우는 인규의 모진 구타로 현서가 입은 상해 진단 기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현서에게 건넨다. 작정한 것은 아니지만, 서로의 복수에 공범이 되어버린 선우와 현서. 죽도록 맞으면서도 고통을 호소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현서의 처지를, 선우는 졸지에 부모를 잃고 천애 고아가 되었던 자신의 어린 날로 이입할 것이다. 그래서 이 이입은 단순한 동정이기 어렵다. 공모의 시작에 선우의 필요가 개입된 것은 분명하지만, 공모의 과정은 고통을 경험한 선배 여성이 후배 여성의 고통에 함께하려는 거래 그 이상이다. 현서가 인규를 폭행으로 고소하고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며, 선우에게 "어떻게 벗어나는지 직접 보여주"었다는 오마주는, 그들의 공모가 연대의 정서에 기반을 두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선우에게나 현서에게나 '나쁜 남자' 격퇴기는 아직은 미완일지 모른다. 어쩌면 인규는 감옥에서도 개과천선하지 못하고 미련한 복수의 시나리오를 개작할지 모른다. 선우의 응징 또한, "이혼이 끝이 아니"라는 일성처럼, 태오의 고산시 컴백과 함께 다른 국면으로 나아갈 조짐을 보인다. 그렇다면 선우와 현서의 공모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점입가경의 현장을 본방사수해 보겠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부부의 세계 트라우마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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