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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잘한다? 편견입니다

[코로나19에 지친 당신을 위한 책 처방] 제마 하틀리 '남자들은 항상 나를 잔소리하게 만든다'

등록 2020.03.30 08:07수정 2020.03.30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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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은 뭐 먹을까?"

며칠 전이었다. 느지막이 아침을 먹는 아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이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엄만 왜 아침 먹는 사람한테 점심 메뉴를 물어봐? 지금 이렇게 배부르게 먹고 있는데 먹고 싶은 게 생각나겠어?"

아이의 말에 뜨끔했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후 삼시 세끼 집밥이 일상이 되어 버린 내게 '식사 메뉴 정하기'는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왔다. 아침 한 끼를 해결하고 나면 점심은 뭐 먹을까 고민이 됐고, 점심을 먹을 때면 저녁 메뉴가 걱정됐다. 그렇게 세 끼를 무사히 해결하고 저녁 설거지를 마친 후엔 잠시 안도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잠자기 전 나는 식구들에게 다시 묻는다.

"내일 아침엔 뭐 먹을래?"

코로나19로 반 자가격리 생활에 접어든 지 6주 차. 돌아보니 나의 하루는 온통 '뭐 먹을지' 고민하고, 요리하고, 치우는 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특히 식사 메뉴에 대한 고민은 내가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내가 일하는 상담센터들이 모두 쉬고 있고, 다니던 대학원 역시 온라인으로 개강한 터라 여유 있을 것 같았던 나의 하루는 쏜살같이 지나갔다. 책을 읽지도, 온라인 강의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그냥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그러던 중 제목에 이끌려 제마 하틀리의 책 <남자들은 내게 잔소리를 하게 한다>(2019, 어크로스)를 집어 들었다. 책에는 나와 같은 여성들이 가득했다.

왜 남편은 식사 메뉴를 고민하지 못하는 걸까
     
하틀리는 책에서 자신의 남편을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한다. 가사분담에 이의를 달지 않으며, 육아에도 적극 참여하는 그녀의 남편은 한국 사회의 기준으로 보기엔 무척이나 이상적인 아빠이자 남편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남편과 불평등하다고 느낀다. 하틀리의 남편은 가사를 분담하지만 저자가 알려주지 않으면 언제, 어떤 집안일을 시작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아이들을 함께 돌보지만 저자가 말해주지 않으면 아이들의 스케줄을 기억하지 못한다. 가족과 지인의 생일도 아내인 저자가 귀띔해주어야 하고, 선물 준비도 대신 해주어야 한다.

하틀리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에게 필요한 돌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오직 여성인 자신뿐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한다.
 
'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아채는 사람이 언제나 나여야 하는가? 그 일을 누구에게 시키거나 내가 직접 해야 하는가? 왜 내가 같은 대화를 하고 또 해야 하는가?' (261쪽)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남편과 가사분담을 실천한 후 남편은 많이 바뀌었다. 식사 준비할 땐 늘 주방에서 거들고, 설거지도 하며, 청소기도 돌린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내가 나서 "오늘 뭐 해 먹을까?" 묻기 전에는 식사 때가 다 되어가도 메뉴 고민을 하는 법이 없다. 남편이 설거지를 하기로 되어 있을 때도 남편은 종종 식사를 마친 후 싱크대가 아닌 텔레비전 앞으로 가 앉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민한다. '설거지를 하라고 말해야 하나? 말하면 기분 나쁘지 않을까?' 그리곤 기다리다 도무지 참기 어려울 때쯤 남편의 기분을 살피며 묻는다. "설거지 할 거지?" 청소도 마찬가지다. "오늘 청소기 한번 돌리자!" 말을 꺼내는 건 늘 아내인 나다.

회식과 모임이 사라진 요즘, 남편은 오후 5시면 귀가해 함께 집안일을 한다. 하지만 나는 전혀 편하지가 않았다. 나는 할 일이 줄어든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저자 역시 이렇게 반문한다.
 
"왜 남편이 집에 없을 때가 훨씬 더 편하지?" (57쪽)
 
감정노동은 여성이 더 잘한다는 오해
 

제마 하틀리 지음, 노지양 옮김 <남자들은 항상 나를 잔소리하게 만든다>(어크로스, 2019) ⓒ 송주연

 
저자는 이 모든 것들이 '감정노동'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감정노동'은 1983년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가 사용하면서 세상에 알려진 단어다. 혹실드는 감정노동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해 공적으로 요구되는 말투나 표정을 교환가치로 만들어 상품으로 파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리베카 에릭슨, 제스 짐머만 등은 가정에서의 불평등한 가사노동을 감정노동과 연결시켰다. 저자는 이런 학자들의 계보를 이어 감정노동을 "내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대가 없이 하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라고 정의한다.

저자의 정의에 따르면, 남편에게 가사분담을 요구하는 일, 식구들이 늦지 않게 시간관리를 하는 일, 친척들의 생일을 챙기고 집안 행사 일정을 조정하는 일, 가족의 병원이나 미용실을 알아보고 대신 예약하는 일, 가족들이 학교와 일터에서 돌아와 편안할 수 있도록 나의 감정이나 기분을 삭이는 일, 이 모든 것이 감정노동에 해당했다.

딱 정말 내가 이랬다. 요즘 나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수입이 전보다 줄어든 남편이 퇴근 후 편안하도록 기분을 살핀다. 종일 집에 있는 아이가 지루하진 않은지 늘 살피고, 조금이라도 힘들어 보이면 함께 산책하러 나가거나 보드게임을 해주며 기분을 풀어준다. 내가 써야 할 원고와 대학원 온라인 수업듣기를 미루면서도 나는 식구들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 애쓴다. 식사 메뉴에 더욱 집착하게 된 것도 이런 이유였다. 힘든 시기에 식구들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 말이다.

이 모든 것이 '감정노동'이었다. 여자들끼리 모이면 종종 "혼자가 제일 편해"라고 푸념을 늘어놓곤 했는데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감정노동의 고단함'이었다. 돌아보니 내가 아는 많은 여성들도 타인과 함께할 때 그들을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저자는 '감정노동'이 여성들의 에너지를 갉아먹는 주범이라고 단언한다.

하틀리는 감정노동이 상대적으로 여성에게 더 부과된 것은 사회화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여성은 생득적으로 남을 잘 돌본다는 가부장적 사고는 여성들로 하여금 주변을 살피는 데 과도한 에너지를 쏟게 한다. 반면 남성들에게 감정노동은 '안 해도 되는 것'이 되고 말았다.

하틀리는 다양한 연구결과와 문헌들을 예로 들어 자비, 공감, 이타심과 같은 감정노동에 필요한 심리적 요소를 남성과 여성이 같은 수준으로 가지고 있음을 밝혀낸다. 즉, 남성에게 타인의 기분을 배려하고 돌보는 능력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은 편견일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편견이 "남자들은 다 그렇지"라는 '나쁜 말'을 만들어 냈다고 강조한다. 돌봄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남성들의 성향을 '남자니까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태도는 여성들의 감정노동을 더욱 당연한 것으로 만들 뿐이다.

나아가 저자는 사회의 이런 태도가 현재의 '강간문화'에도 일조했다고 주장한다. 폭력을 죄악으로 보지 않고 '남자들은 다 그렇다'는 식으로 넘어가려는 태도, 남성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해 폭력을 피하려는 태도 모두가 '감정노동'의 불평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나쁜 생각' 버리기

하틀리가 '감정노동'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제안하는 해결책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즉, '남자들은 다 그렇지'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책에서 언급한 많은 예들이 보여주듯, 남자들이 '감정노동'을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기 위해 저자는 우선 여성들이 이 '나쁜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남자들은 원래 그래'라는 생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남자들이 고민하고 생각할 영역을 침범해 들어간다. 그리고 결혼한 부부의 경우 남편들의 배려하고, 생각하며, 돌보는 능력을 앗아간다. 실제로 저자는 자신의 경험담을 예로 들어 '남편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를 존중하고 믿어주었을 때 그는 '감정노동'을 함께 짊어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하틀리의 이런 통찰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가중된 돌봄노동으로 헤매던 나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홀로 감정노동을 짊어지고 힘들어하면서도 남편을 믿지 못해 내려놓지 못했던 모습이 분명 있었다. 하틀리는 감정노동이 평등해졌을 때 다음과 같은 삶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감정노동의 균형을 맞추면 우리 모두가 더 충만하고 더 진정성 있게 살아갈 기회를 얻는다. 짐을 덜게 된 여성들은 정신적 에너지와 시간을 되찾을 수 있고, 직업적인 면에서 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으며 진정한 평등 속에서 파트너와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남성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인간성과 인간애를 찾는다. 유해한 남성성을 거부하며 사람들과 유대감을 나누고 더 평등한 세상을 위해 싸우는 우리를 지지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40쪽)
 
이런 삶이 가능하다는데, 남편이 식사 메뉴를 고민하도록 기다리는 것쯤이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주말엔 남편이 먼저 "우리 뭐 먹을까?"라고 질문을 던져올 때까지 나서지 말고 기다려봐야겠다. '남편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남자들은 항상 나를 잔소리하게 만든다 - 여자들에게만 보이는 지긋지긋한 감정노동에 대하여

제마 하틀리 (지은이), 노지양 (옮긴이),
어크로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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