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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왜 "나처럼 불운한 군인"이라고 말했을까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23)] 제5-9대 대통령 박정희 ⑧

등록 2020.03.25 19:04수정 2020.04.10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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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사를 낭독하는 박정희 대장(1963. 8. 30.). ⓒ 자료사진

 
박정희 대장 전역사
 
[철원군 지포리] 이만섭, 유혁인 특파원 = 박 의장의 지방여행과 비는 거의 불가분 관계처럼 따라다녔다. 1963년 8월 30일 아침 철원군 지포리에서 열린 그의 예편식에도 비가 축축이 내려 도열한 수많은 장병을 흠뻑 적셨다. 박정희 육군대장은 군사혁명 후 2년 동안 그 스스로가 두 개의 별을 더 달았다. 이날 박정희 대장은 부인 육 여사와 함께 예편식에서 시종 침통한 표정이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중략) 21발의 예포가 이제는 잡초 우거진 옛 싸움터 골짜기에서 메아리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는 혁명공약이 오랜만에 낭독되었다. "일반 명령, 육군대장 박정희의 예비역 편입" 김성은 국방장관의 일반명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낭독됐다.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

17년 전 7사단장으로 복무한 바 있는 철원군 지포리, 초연이 사라진 2913부대 지역 내에서 박 의장은 이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17년간의 긴 군대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현역 육군대장 직만 물러난 박  의장은 대통령 권대행, 최고회의의장 및 그에 따르는 공직을 지닌 채 오는 10월 15일 대통령선거에 나설 예정이다. - <동아일보> 1963. 8. 30. 석간 7면 
 

1963년 8월 30일자 동아일보 7면 ⓒ 동아일보

 
그날 박정희 대장은 "친애하는 60만 장병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연설문을 읽다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기도 했다. 이날 박정희 대장이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고 한 말은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나도 그와 같은 불운한 군인이 되고 싶다'는 풍자만화까지도 쏟아졌다.

이 연설문 초안을 직접 쓴 비서관(동훈, 전 남북평화통일연구소장)에 따르면 애초에는 그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이 원고를 검토한 당시 최고회의 이후락 공보실장이 '불운한'이라는 단어를 추가했다는데, 박 의장이 이를 허락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군을 떠난 대장 박정희는 왜 '나처럼 불운한 군인'이라고 말했을까? 
  

최고회의 의장 시절의 박정희 대장 ⓒ 박도

 
박정희와 군

박정희는 상모동에서 원평동 구미보통학교(현 구미초등학교)까지 20리 길을 걸어 다녔다. 등하굣길 중간에는 광평동 평야가 펼쳐졌다. 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들판에서 이따금 대구 주둔 일본군들이 동계 기동훈련을 했다.

어느 날 하교길에 박정희는 선산경찰서장이 일본군 부대장에게 말채찍을 맞으면서도 '하이(네)!' 하이!'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당시 일본 순사만 해도 조선 사람들은 슬슬 기었다. 그런데 경찰서장이 군 부대장 앞에서 벌벌 떨면서 말채찍을 맞는 걸 본 어린 박정희는 그때부터 군인이 가장 센 사람으로 머리속에 각인됐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강한 사람이 되고자 군인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박정희의 본보기 인물은 나폴레옹이었다. 초등학교 재학 중 나폴레옹 전기를 읽었다. 소년 박정희는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구해 벽에 붙여놓기도 했다. 1932년 구미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집안의 가난은 계속돼 기숙사비조차 제때에 낼 수 없어 학기 중에도 고향집에 와서 지내기도 했다. 그래서 학업성적은 점차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교련 점수만은 월등히 우수했다. 당시 교련 교관 아리카와 대좌(현 대령)로부터 각별한 총애도 받았다.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1일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3년여 교사생활을 했으나 어린 시절에 열망했던 군인에의 꿈과 게다가 초혼 실패에 대한 자굴지심 등으로 현실을 탈출하고 싶었다. 박정희는 그 탈출구로 만주군관학교에 지원코자 했으나 연령 초과로 자격미달이었다.

그러자 박정희는 혈서와 함께 입학을 호소하는 편지를 만주군관학교로 보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1940년 만주국 신경(현 창춘)에 있는 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하여 마침내 그가 바라던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1940년 무렵, 일제는 황국신민화정책으로 창씨개명을 강력히 펼친 바, 우리나라 사람의 성(姓)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했다. 만주군관학교 재학 중인 박정희는 1주일의 휴가를 받아 귀향해 상희 형과 상의해 고령박씨(高靈朴氏)에서 고목(高木)을 취해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을 했다. 당시 조선 백성들의 대부분(약 80% 이상)은 창씨개명을 했다고 전한다.

1942년 3월 23일 만주군관학교 박정희 생도는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리하여 그 특전으로 그해 10월 일본 육사 57기에 편입한 뒤 1944년 4월에 졸업했다. 졸업 때 그는 300명 가운데 3등이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수습사관 시절을 거쳐 1944년 7월에 만주 열하성 주둔 만주군 보병 8단에 배속, 그해 12월 23일에 정식으로 만주군 소위에 임관됐다.
  

만주군 장교 시절의 박정희 ⓒ 자료사진

 
일본군 장교

박정희의 괴뢰만주군(곧 일본군) 장교생활은 8개월도 되지 않아 일본의 패전으로 끝났다. 갑작스러운 일본의 패전으로 박정희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그는 베이징을 거쳐 1946년 5월 8일 초라한 일군 패잔병 몰골로 귀향했다.

긴 칼을 차고 일본 육사로 떠날 때는 고향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송했다. 하지만 해방 후 귀향 때는 밀짚모자에 헌 지까다비(일본군 작업화)를 신은 초췌한 몰골로 보는 이들의 냉소를 자아냈다. 그러자 형 박상희조차도 면박을 줬다.

"교사로 지낼 것이 왜 씰데없는 만주로 가서 거지가 돼 돌아왔냐?"

박정희는 다시 교사가 되고자 옛 스승(배 아무개 교장)을 찾아갔다. 그는 박정희를 보고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친일을 했기에..."

박정희는 말없이 자리를 떴다. 그는 속으로 뇌까렸다.

'자기도 친일하면서 그 자리를 유지해 놓고는…'

그 교장은 측은히 뒤돌아서는 박정희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도 학무국에 가서 알아보게."

그야말로 오십 보 도망친 자가 백 보 도망친 자를 비겁자라고 탓하는 격이 아닐까. 박정희는 고향에 머무는 4개월 남짓 동안 술에 절어 살았다. 이따금 대구로 가서 친구들도 만났다. 하지만 왠지 교단에 복직하기는 싫었다. 그런 차 미군정에서 남조선경비사관학교를 창설했다는 모집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런데 서울로 가는 여비가 없었다. 마침 큰 누님 집 선반 위에 상희 형님의 카메라가 보였다.

"누님, 나 이것 가지고 갈 테니 형님한테는 내가 기차를 탄 뒤에 이야기하세요."

1946년 9월 24일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그로서는 세 번째 사관학교 입교였다.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후일 그의 저승사자였던 동향 선산 출신의 김재규와 같이 상경하여 동기생으로 입교했다. 3개월 교육과정을 수료한 뒤 30세의 나이에 국군 육군 소위로 다시 군인의 길을 걷게 됐다.

첫 부임지는 춘천 8연대였다. 연대 단위 기동훈련을 초안한 공로를 크게 인정받아 중위 계급을 건너 뛴 대위로 진급하는 행운도 누렸다. 하지만 그 행운은 잠깐이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발했다. 이 사건 진압되자 군은 곧 군 내부 남로당원 색출작업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당시 육사교관이던 박정희는 남로당 핵심인물로 지목됐다.

박정희가 왜 남로당에 연루됐는지 그에 관한 정설은 아직도 분명치 않다. 셋째 형 박상희의 피살 때문이라든지, 해방 직후 혼란기의 보신책이라든지... 혹자는 그 무렵 한반도의 운명이 어느 쪽으로 기울든 그는 어떻게든지 살아남겠다는 양다리를 걸친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아무튼 박정희는 남로당 군사책 혐의로 군 수사기관에 체포돼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남로당 군사책 조직도 죄다 불었다. 그는 그와 같은 대담한 배신과 전향으로 사형 구형에 무기 선고로, 10년 감형에 다시 형집행 정지의 혜택을 받고 풀려났다.

만군 인맥이었던 백선엽의 선처로 육군 정보국 문관에 특채됐다. 문관 재직 중 6.25 전쟁 발발로 현역에 복귀했다. 한국전쟁은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다시 군인의 길을 걷게 됐으니 말이다. 
  

육군 대장 계급장을 윤보선 대통령과 송요찬 내각 수반이 달아주고 있다(1961년). ⓒ 자료사진

 
국군 대장 진급

전쟁 발발 세 달만인 1950년 9월 육군 소령으로 진급하고, 1953년 11월에는 마침내 별을 달았다. 1957년 9월 1일, 박정희 준장은 육군 제7사단장에 임명됐고, 1958년 3월 1일에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1군 참모장, 6관구사령관, 군수기지사령관, 제1관구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2군 부사령관 등으로 전전하다가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감행했다.

1961년 8월 11일 육군 중장에 진급했고, 진급 3개월 만인 1961년 11월 1일에는 초고속으로 육군 대장에 진급했다. 1963년 8월 30일,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에 입후보하고자 육군 대장에서 예편했다.

그의 군 생활을 스스로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라고 표현한 데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그 해석은 이 기사를 읽은 독자 몫으로 넘긴다. 나는 역사 비평가가 아닌, 역사적 사실(팩트) 전달자인 기자이기 때문이다.

(* 다음 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재경 편저 <박정희실기> / 정운현 지음 <군인 박정희> / 박영규 지음 <대한민국 대통령실록> / 조갑제 지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동시대에 살았던 여러 고향사람들의 증언으로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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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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