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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왜 만주군관학교에 갔을까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19)] 제5-9대 대통령 박정희 ④

등록 2020.03.12 14:33수정 2020.04.10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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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현대사에 주역을 배출한 옛 만주군관학교, 탐방 당시 중공군 전차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군사지역이라 부대 정문을 찍지 못하고 담과 막사 일부만 촬영했다(2000. 8. 22.). ⓒ 박도

     
1961년 5월 16일

1961년 5월 16일 새벽, 나는 아버지가 켜놓은 라디오 소리에 잠이 깼다. 그날 라디오에서는 예삿날과는 달리 행진곡과 함께 귀에 익은 박종세 아나운서의 떨리면서도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혁명 공약
1.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며,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이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정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후략)"


혁명 공약은 계속 반복됐다. 라디오에서 귀를 떼지 않던 아버지 표정은 금세 납덩이처럼 굳었다. 아버지는 이것은 혁명이 아니라 군사반란이요, 쿠데타라고 단정했다. 그때 나는 '혁명' '군사 쿠데타'가 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날도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책가방을 들고 등교했다. 그해 나는 구미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중동고등학교에 진학한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등굣길에 안국동 네거리를 지나는데 착검을 한 군인들이 20~30미터 간격으로 대로변에 서 있었다. 살벌한 공포 분위기였다. 그 며칠 후 아버지는 쿠데타의 주동자는 군사혁명위원회 장도영 의장이 아니고, 사실상 실권자는 부의장인 박정희 소장이라고 귀띔했다. 바로 그분은 구미역 뒤 각산에 사는 신문사네 시동생이라고 해 깜짝 놀랐다. '신문사네'라고 하면 고향 어른들이 늘 귀엣말하던 박상희 선생의 부인을 말함이 아닌가.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 박정희 소장은 야전 점퍼 차림에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시청 앞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쿠데타의 사실상 실권자로 대다수 사람들은 작달막한 체구에 깡마르고, 선글라스로 얼굴 표정을 가린 그 외모에서부터 오싹한 한기를 느꼈나 보다.
   

옛 만주군관학교 옆 나라툰소학교 정문. 가까운 곳에 옛 만주군관학교가 있었다(2000. 8. 22.) ⓒ 박도

     
만주군관학교


하지만 그 무렵 내게 박정희는 그리고 싶은 작품의 주인공으로, 고향 출신이라는 데 어떤 친밀감을 느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작가들은 당신의 어린 시절과 고향 이야기를 평생토록 작품의 제재로 삼고 있다. 독일의 헤세는 고향 칼브를 <데미안> 등 여러 작품에서 그렸다. 또 영국의 작가 에밀리 브론테도 고향 호워드의 황야에 살면서 불후의 명작 <폭풍의 언덕>을 남겼다.

우리나라의 현기영, 김원일, 박완서 등의 작가들도 당신들의 고향 풍물과 어린 시절에 고향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뒷날 명작으로 남겼다. 그래서 나도 습작기인 고교시절에는 고향 이야기에 더불어 박정희란 인물을 그렸다. 곁에서 지켜보던 아버지는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글은 함부로 쓰지 않는다는 충고를 하셨다.

그러면서 그 무렵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그분의 얘기를 들려주셨을 때 큰 충격에 빠진 채 지냈다. 그런 가운데 1999년 8월 4일, 나는 중국대륙 항일유적지 답사로 헤이룽장성 하얼빈의 동북열사기념관에서 고향 출신의 한 항일명장을 만났다.

그분은 박정희가 태어난 상모동 철길 건너 이웃 마을로 왕산 허위의 당질(사촌 형의 아들)인 허형식(1909~1942) 장군이었다.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쁨이란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의 그것과 같았다. 황홀경에 빠졌다.

그래서 나는 그 이듬해인 2000년 8월 17일 서울을 떠나 하얼빈에 도착한 다음 허형식 열사가 살았던 빈안진 일대와 최후 희생지인 경안현 대라진 청송령 들머리 허형식 희생지에 가서 '들꽃'을 바치면서 묵념을 드렸다. 그런 다음 그 길로 창춘에 있는 상모동 출신 박정희 청년이 청운의 꿈을 품고 찾아간 만주군관학교로 갔다.

역사에서 가정은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독립군 출신이었더라면 우리 현대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만주군 중위였다는 사실은 생전에도 사후에도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그 점이 민족정기 면에서 크나큰 흠으로써 평생을, 아니 사후에도 두고두고 비판받고 있다.

사실 만주군관학교 출신은 그분뿐이 아니다. 우리 국군 창군 주요 인물과 현대사를 주름잡았던 인물 중에 만주군관학교 출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정일권, 백선엽, 원용덕, 김백일, 김일환, 장은산, 이한림, 김동하, 이주일 등등.

이들은 그 어떤 변명을 늘어놓을지 모르지만, 만주군관학교 지원 당시 일제의 선전 문구 '왕도낙토(王道樂土)'니, '오족협화(五族協和)'니 '일만일여(日滿一如)' 따위의 말에 속아서, 또는 집안이 가난하여, 아니면 국권을 잃은 조국보다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학교에 발을 들였을 것이다.

나는 혼자 수륙만리 헤이룽장성 경성현 대라진 마을의 허형식 장군 희생지와 창춘 교외의 옛 만주군관학교를 찾아갔다. 이는 동시대, 같은 고장 두 젊은이의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 자취를 추적해 보겠다는 동향 작가로서의 도리요, 집념이었다.
   

망망대해의 만주 벌판(2000. 8. 19.) ⓒ 박도

   
풍운의 대륙

마침내 2000년 8월 22일 지린성 인민대회상임위원회 부주임 이정문(李政文) 동포의 안내로 창춘 교외에 있는 옛 만주군관학교를 찾아갔다. 애써 찾아간 옛 만주군관학교는 그 무렵 중국군 기갑부대로 쓰이고 있었다. 내가 부대를 촬영하고자 카메라를 꺼내자 안내자 이 부주임은 사색을 하면서 제지했다. 그래서 정문을 지난 곳에서 그 부대 담과 막사 일부 그리고 거기서 가까운 나라툰소학교 정문만 증명으로 찍은 뒤 돌아왔다.

일본이 1931년 9월 18일에 만주사변(일명 9.19사변)을 일으킨 이듬해인 1932년 3월 1일에 청조 마지막 황제 푸이를 꼭두각시로 앉힌 괴뢰만주국을 수립했다. '만주(滿洲)'는 중국 동북삼성인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을 일본인들이 붙인 지명으로 그 면적은 우리나라 전국토의 다섯 배가 넘는 123만 평방미터다. 지난 세기 만주 벌판은 군벌과 마적, 일제 관동군과 위만군 그리고 우리 독립군들이 서로 뒤엉켜 각축을 벌였던 풍운의 대륙이었다.

박정희는 1937년 3월 25일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문경공립보통학교로 발령을 받아 교사가 됐다. 당시 박정희는 시골 교사에 만족치 못한 욕구불만의 청년이었다. 교사로서 당신의 불만을 도저히 잠재울 수가 없었다.

집안의 가난, 식민지 하에서도 양반 상놈을 찾는 구시대적 조선사회, 어렸을 때부터 큰 칼을 차는 군인에 대한 동경심 그리고 초혼 파경에 대한 자괴감 등이 복합된 분노의 탈출구로 만주군관학교 행을 선택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만주행에는 시대상황도 한 몫을 했다. 당시 일제는 만주 침략을 계기로 대륙 병참기지화 정책을 전개했다. 반면 조선에 대해서는 영구통치를 위해 조선인을 완전한 일본인으로 만들려는 이른바 황국신민화 정책을 폈다. 이로써 말도 글도 모두 일본식을 강요했고, 1940년부터는 성과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했다. 이런 사정으로 조선의 젊은이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그 탈출구로 만주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만주는 '동양의 서부'로 일컬어질 만큼 희망과 기회의 땅이었다." - 정운현 지음 <군인 박정희> 79~80쪽

또 다른 분(전 고려대 조기준 교수)는 "당시 만주는 마치 해방 후 미국행과 마찬가지로 조선 청년들의 유일한 탈출구였다"라고 회고했다.
  

만주군관학교 제2기 졸업식에서 우등상을 받는 박정희 생도(1942. 3, 23,) ⓒ 자료사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지난 세기 숱한 조선의 청년들은 서로 다른 복장으로 이 광막한 만주벌판을 누비면서 자기 나름의 꿈을 키웠다. 낙동강 옆 구미 임은동에서 자란 한 소년은 괴나리봇짐을 지고 만주로 망명도생하여 백마를 타고 이 만주벌판을 달리면서 조국 광복을 꿈꾸었을 것이다. 임은동 건너 마을 금오산 산비탈 상모동에서 태어난 한 청년은 긴 칼을 차고 이 만주벌판을 누비며 천하를 호령하려는 청운의 꿈을 키웠을 것이다.

또 평양 만경대에서 태어난 한 소년도 만주벌판에서 대망을 꿈꿨을 것이다. 어디 그들뿐이었으리라. 지난 세기 이 만주벌판을 누비던 모든 조선 청소년들의 꿈이 하나였다면 조국 분단의 비극은 결코 오늘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에게 돌팔매질하기에는 우리 조상은 너무 무지했고, 세계의 조류를 읽지 못했다. 그리고 후손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 이래 70년 동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부화뇌동하고 민족반역의 죄를 저질렀다. 이 오욕의 역사를 그대로 덮어야할 것인가? 누가 저들에게 저주의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나는 망망대해 만주벌판을 바라보며 그런 근원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8;7)."

문득 나 자신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교육자로 청소년들을 제대로 가르쳤는가? 나는 한 작가로서 민족의 양심과 정의를 제대로 글로 썼는가? - 박도 지음 <허형식 장군> 234~235쪽

 

나는 2000년 8월 제2차 항일유적지 답사 뒤 원래는 '네 발의 총성'이라는 허형식, 박정희 두 동향 젊은이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작품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견강부회한 감이 있기에, 이를 분리 먼저 <허형식 장군>을 집필, 출간했다. 위는 그때 망망대해 만주 벌판을 취재하면서 쓴 나의 기행 소감이다.  
  

만주군 소위시절의 박정희 ⓒ 자료사진

 
"친일의 역사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것은 첫째 오욕의 역사라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은폐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영광의 기록만이 역사는 아니다. 오욕으로 말한다면 임란‧호란‧국치와 분단이 전부 오욕이다. 계절에 사계가 있듯이 민족사에도 영욕의 소장(消長, 쇠하여 사라짐과 성하여 자라남)은 있을 것이다. 3.1의 함성이 무성한 여름이라면, 친일은 암담한 동면이다. 동면기를 모르고 건국이라는 맹아기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친일은 결코 은폐의 대상일 수 없다.

둘째 당자나 유족의 체면을 위해서 덮어두자는 인정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私)를 위해 민족사를 파묻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멸공봉사(滅公奉私)한다면 대의(大義)는 어디에서 살고 어디서 숨을 쉴 것인가?" - 임종국 지음 <일제침략과 친일파> '책머리에'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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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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