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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성 공격, 일본군에 패배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61회] 참담한 청주성 패배의 주원인은 일본군의 화력이었다

등록 2020.02.10 17:02수정 2020.02.10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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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장군 ⓒ 박도

김개남은 삼례의 2차 봉기에 합류하지 않고 남원에서 머물다가 10월에 전봉준이 북상하자 14일 5만 병력을 이끌고 임실을 거쳐 16일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전주성에서 새로 부임해 임지로 오던 남원부사 이용헌을 처형하고 고부군수 양필환과 순천부사 이수홍을 처벌하였다. 이들은 탐관오리로 지목돼 처형되거나 처벌을 받았다.

김개남 부대는 이후 금산으로 직행하여 금산과 용담을 차례로 점령하고 곧 진잠현으로 이동하여 진잠현을, 11일에는 회덕과 신탄진을 점령한데 이어 청주성으로 진격하였다. 계속 북상하여 전봉준 부대와 합류하고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청주성의 점령은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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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양 토비 사적비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과 맞서 싸워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오른편 위 모서리가 떨어져나간 것은 동학농민전쟁이 역사적 정당성을 얻게 되면서 한때 수난을 당한 흔적입니다. ⓒ 서부원

 
김개남은 그런 뒤 11월에 들어와 북상을 시도하였다. 김개남군이 늦게 출진한 것은 적절한 기회를 놓친 것을 의미했다. 경군과 일본군은 이때 삼남을 목표로 남하하면서 각지의 동학 근거지를 수색하고 집결했던 동학농민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바로 그 한 가운데로 대군을 움직여서 행군해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곳에서든 일본군과 조우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군량을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운반 수단이 적절하지 않았다.

민간과 관아에서 징발한 소와 말에 싣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이동 속도도 느리고, 대규모 인원에게 매일 끼니마다 밥을 해줄 수가 없었다. 전쟁준비에 노력은 했지만 무기와 군량 공급이 부족한 위에 대군을 동원해서 전면전을 벌이려고 했던 생각은 실전 경험이 없는 계획일 뿐이었다.

가장 문제가 컸던 결정은 겨울철에 군사활동을 하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들판에는 곡식을 수확해서 넓은 개활지처럼 되었고, 산에도 초목의 무성한 잎이 떨어져서 황량한 상태로 변했다. 원거리에 사격이 가능한 신식무기로 무장한 상대와 전투를 벌이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시기였다. (주석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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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우측에 자리한 '동학농민군 출진상'. ⓒ 안병기

 
김개남이 청주성을 공격한 것은 11월 13일 새벽이다. 이 전투에서 그는 패배하였다. 그것도 일본군에 의한 패배였다. 김개남은 일본군이 청주성에 들어와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청주성의 공격과 패배 과정을 한 연구자료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일본군이 청주에 들어온 것은 농민군이 청주성을 공격하기 전날인 11월 12일(양 12월 8일)이었다. 일본군은 처음에 청주성 안에서 농민군을 맞아 싸우려 했으나 지형을 살피고는 무심천 건너 청주성 남쪽 언덕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청주성에서 600m 거리이며 남문에 집결한 군사를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는 지점이었고 병력은 40명 정도였다.


청주 병영군 50~60명이 남석교까지 나와 진을 쳤으나 농민군에 밀려 성안으로 퇴각하자 농민군이 청남문을 에워싸게 된다. 그러자 일본군이 배후에서 공격하게 되고 당황한 농민군은 10여 분의 교전에 10여 명의 전사자를 내게 되자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농민군은 은폐할 지형을 찾아 신탄방면으로 10리 가량을 후퇴하여 망일산 산자락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저항을 시도한다. (주석 9)

  

황룡전적지 기념탑에 조각된 동학농민군들. 장태를 굴리며 관군에 맞서는 모습이다. ⓒ 이돈삼

 
전쟁의 승패는 화력이었다. 일본군은 무라타 소총 등 현대식 병기로 무장을 하고 있어서 동학농민군이 상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동학혁명기 동학군과 일본군의 화력은 1대 250 수준이었다고 분석된다.

사정거리 50m 정도의 화승총으로 무장한 농민군은 우수한 화력으로 공격하는 일본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농민군의 반격은 8시쯤 시작되었으나 결국 일본군 40여 명의 화력을 극복해내지 못하고 10시 40분경 다시 파군(坡軍)까지 후퇴하게 된다.

일본군과 전투를 치러보지 못했던 김개남군은 일본군의 화력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었던가를 알수 없었으며 수적으로 월등하게 우세했던 점과 화승총이 제일 좋은 무기였던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따라서 작전이란 계획을 수립하지도 않은 무모한 전투를 감행했던 결과였을 것이다. (주석 10)

 

관군에 맞서 싸우고 있는 동학농민군들. 황룡전적지 기념탑에 새겨진 부조물이다. ⓒ 이돈삼

 
결과론이지만 김개남이 동학농민군의 본류와 합류하지 않고 별도의 행동과 청주성 전투의 패배는 그 자신과 제2차 봉기의 진행에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동학농민혁명 주도자의 일익으로서 이때의 '판단착오' 또는 '전략착오'가 몰락을 가져온 실책이 아니었을까, 그런 판단의 배경을 다시 한 번 짚어 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제2차 봉기를 즈음하여 전봉준과 의견을 일치하지 못하고 다른 노선을 걷기 시작했던 김개남은 남북접이 연합하여 사활을 건 공주전투를 치열하게 전개하는 동안에도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과는 다른 진격로를 통해 북상하다가, 마침내 청주성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처럼 재봉기 및 북상과정에서 김개남이 보여준 독자적 행동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김개남의 이러한 독자적 노선이 전봉준의 세력을 스스로 질투하여 먼저 서울로 올라가려는 의도에서였으며, 이러한 갈등과 분열이 동학농민혁명의 좌절을 가져온 한 배경이 되었다는 인식이 대체적인 평가가 되어왔다. 실제로 2차 봉기를 앞두고 전봉준과 김개남 사이에 오고 갔던 의견과 인식의 차이나 상황은 이러한 평가를 설득력 있게 하는 바탕이 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공주전투를 즈음해 이루어진 김개남의 독자적 노선이 전봉준과의 심화된 대립적 관계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구체적인 점검을 요구하고 있고, 근래 들어서는 이러한 평가를 새로운 차원에서 조명해 보아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석 11)


김개남은 자신이 거느린 부대를 이끌고 새벽에 청주성을 공격했으나,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주원인은 일본군의 화력이었다.


주석
8> 신영우, 앞의 책, 63쪽.
9> 『남원의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54쪽.
10> 앞의 책, 54~55쪽.
11> 박맹수, 「동학농민전쟁기 일본군의 무기」, 『한국근현대사연구』제17집, 18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동학혁명 #김개남장군 #동학혁명_김개남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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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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