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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본 손학규, 비판 뛰어넘을 수 있을까?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홀로 선 손학규 앞에 놓인 가능성들

등록 2020.01.30 08:11수정 2020.01.30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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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자청한 손학규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가 2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정계에 복귀한 안철수 전 의원이 그동안 바른미래당을 이끌어온 손학규 대표에게 대표직 사퇴를 요구했다. 또 당의 ‘비상대책위원회 체제’ 전환을 요구한 뒤 비대위원장은 자신이 맡겠다고 했다. 이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기 위해 손 대표는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이날 오후 자청했다. ⓒ 남소연


바른미래당 창당의 양대 주역인 안철수계와 유승민계에 힘입어 대표가 됐지만 양쪽 모두와 갈등을 일으키다가 유승민계의 이탈 및 창당을 지켜봐야 했던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그는 이제 나머지 한 쪽인 안철수계와도 갈라서게 됐다. 안철수 전 의원이 29일 오전 탈당 의사를 천명했기 때문이다. 

미국 생활을 마치고 1년 4개월 만인 지난 19일 인천공항으로 귀국한 안철수 전 의원은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지지자들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인천공항 기자회견에서 안 전 의원은 자신과 바른미래당의 관계를 비중 있게 언급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영호남 화합과 국민 통합이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바른미래당을 만들었지만, 합당 과정에서 국민의당을 지지해 주셨던 분들의 마음을 충분히 다 헤아리지 못했습니다"라면서 "무척 서운하셨을 것입니다, 늦었지만 죄송하단 말씀 드립니다"라고 한 뒤 "바른미래당이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 역시 제 책임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바른미래당 일원인 자신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면서도, 이 당의 대표인 손학규에게는 귀국 6일 뒤인 설날에야 전화를 했다. 또 손학규를 만난 27일에도, 당을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자신이 비대위원장을 맡겠다고 함으로써 손학규의 퇴진을 사실상 종용했다. 독자 기반이 없는 손학규를 대하는 안철수의 시선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손학규는 독자적인 인적·재정적 기반이 취약하지만, 두 계파에 밀리지 않고 대표직을 꿋꿋이 지켜왔다. 하지만 결국 두 계파의 분당을 막지 못했다. 홀로 서게 된 손학규, 이제 그는 중대 결단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손학규의 정치인생

1947년 지금의 서울시 금천구인 경기도 시흥군에서 출생한 손학규는 경기고등학교 재학 당시부터 반정부 투쟁에 가담했다. 굴욕적인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당시의 이슈였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1965년 이후로는 서울대 문리대 학생운동의 중심이 됐다. 2학년 때는 반재벌 시위에 참가했다가 무기정학을 받았다. 비료공장 건축자금을 만들려는 삼성 이병철과 정치자금을 만들려는 박정희 정권의 합작으로 일어난 사카린 밀수 사건을 규탄하는 시위에 나섰다가 징계를 받은 것이다.


무기정학 기간에 그는 강원도 함백탄광에 가서 노동일을 했다. 정치권과 그 밖을 수시로 넘나드는 훗날 손학규의 행동 패턴이 이때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학생운동뿐 아니라 노동운동과 빈민운동에도 참여하며 박 정권 시절을 보낸 손학규는 세계교회협의회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1988년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되고 1990년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됐다.

위기에 빠진 보수정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이 생존전략의 일환으로 운동권 출신을 대거 영입하던 시절인 1993년, 그는 운동권을 이탈해 이 당에 들어가고 그해 4월 23일 경기도 광명시 국회의원(14대) 보궐선거에 당선됐다. 이렇게 해서 직업 정치인의 길에 뛰어든 그는 15·16·18대 총선 때도 당선됐다.

손학규는 김영삼 정권 후반기에는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하고, 2002년에는 경기도지사에 당선됐다. 대통령선거가 있던 2007년에는 한나라당(민자당의 후신) 이명박·박근혜와의 대권후보 경쟁 도중 탈당한 뒤 열린우리당 탈당파 등과 합세해 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들고 2008년 1월 대표가 됐다. 다음달에는 민주당과 합당해 통합민주당을 만들고 공동대표가 됐다.

그러나 2012년 대선후보 경선과 2014년 수원병 재보궐선거에서 연달아 패한 뒤 정계를 은퇴하고 칩거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2016년 촛불혁명 직전에 '제7공화국 개헌'을 외치며 정계에 복귀한 뒤 안철수·유승민과 정치 활동을 함께했다.

노무현이 본 손학규
  

2007년 8월 5일 대통합민주신당은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중앙당 창당대회를 갖고 `새정치의 지평을 열어갈 정당`의 출범을 선언했다.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창당대회장에서 손학규 전지사가 연설하고 있는 모습. ⓒ 오마이뉴스 이종호


손학규는 오랜 정치 경력과 지도자 경험에 비해 조직력이나 자금력이 크게 떨어지진다. 하지만 두고두고 자부할 만한 성과물들이 있다.

경기도지사 시절에는 대규모 외자 유치 및 일자리 창출로 유능한 행정가의 면모를 남겼다. 정치통합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대통합민주신당 창당 과정과 통합민주당 창당 과정에서 여러 세력을 묶어내는 능력을 보여줬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는 민주노동당과의 연대도 이뤄냈다.

때때로 위기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대학 시절 그랬던 것처럼 무대를 잠시 떠나는 식으로 위기를 벗어나곤 했다. 하나의 조직을 오랫동안 이끄는 데 필요한 조직력과 자금력이 취약한 그로서는 이 방식이 에너지를 보존하는 지혜로운 대처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같은 특장점들이 있는 반면, 신뢰를 떨어트리는 행적도 있었다. 당내 경선에 불복해 당적을 옮긴 행적, 그것도 민주 진영과 보수 진영을 두 번(1993년·2007년)이나 넘나든 행적은 신뢰도를 낮추는 요인이 됐다. 그의 이런 문제점을 누구보다 강렬히 비판한 이가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와의 대담록인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 따르면, 노무현은 손학규를 기회주의적 정치인으로 인식했다. 이 책에 따르면, 노무현은 2007년에 손학규와 함께 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든 정치인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옛날에 YS의 3당 합당을 그렇게 입에 거품을 물고 비판하던 사람들이 지금 손학규 뒤에 가 줄 서 있는 거 보면, 그거하고 이거하고 뭐가 다릅니까? 나는 그런 것을 쳐다보고 이제 속이 타는 거지요."

손학규에 대한 노무현의 부정적 시선은 유시민이 정리한 자서전 <운명이다>에도 나타난다. 노무현은 손학규의 개인적 역량만큼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리더십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을 드러냈다.

손학규와 더불어 고건·정운찬·문국현을 함께 묶어 비판하는 대목에서 노무현은 "권력투쟁의 현실에 과감하게 뛰어들어 비전으로 타인을 설득하고 국민을 감동시키는 능력을 입증해 보여야 비로소 국민이 그 사람을 지도자로 신뢰하고 정치인들이 따르게 된다"면서 "높은 대중 인지도나 호감도만 믿고 밥상이 다 차려지기를 기다리는 자세로는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밥상이 다 차려지기를 기다리는 자세'라는 표현에서 손학규에 대한 노무현의 인식이 묻어난다. 새로운보수당과 안철수계 내에도 이런 시각으로 손학규를 바라보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손학규의 좌우명

손학규의 젊은 시절을 만화로 정리한 책이 있다. 김인수가 쓰고 김성주가 그린 <젊은 날, 거기 분노가 있었다>란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1969년 군에 입대한 손학규는 보직이 행정병이고 중대장의 배려가 있는데도 사격훈련에 빠지지 않았다.

만화 속 대사에 따르면, 상관은 "임마, 그래도 중대장님한테 말만 잘하면 훈련 제끼기 쉽잖아"라며 손학규를 애정 어린 태도로 나무랐다. 그러자 "전 싫습니다, 훈련은 훈련답게 받고 싶지 말입니다"라고 만화 속의 손학규는 답했다. 만화는 손학규의 책임 의식을 보여주는 이 장면에서, 손학규의 좌우명을 배경 설명으로 소개한다.

"손학규의 좌우명은 수처작주(隨處作主). 어느 곳에 있든 주인공이 되라는 말이었다."

작(作)은 '만들다'뿐 아니라 '~이 되다(become)'나 '~이다(is, are)'의 의미도 있다. 어느 곳에 가든 주인이 된다는 수처작주 정신이 예전부터 그의 좌우명이었다. 노무현의 눈에는 손학규가 '남의 밥상'에 관심을 갖는 정치인으로 비쳐졌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손학규 자신한테는 '내 밥상'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27일 안철수한테서 퇴진 요구를 받은 손학규는 28일 기자회견에서 "개인 회사의 오너가 CEO를 해고 통보하는 듯" 했다며 불쾌감을 토로했다. 바른미래당에서도 수처작주를 실천해 왔을 손학규의 입장에서는, 오너처럼 비쳐지는 안철수의 모습이 못마땅했을 수도 있다.

뛰어난 역량과 오랜 경험에다가 행정과 정치통합의 성과를 기반으로 바른미래당 안에서 수처작주를 실천해 왔을 손학규에게, 안철수계와 유승민계는 당내 기반과 수적 우세를 무기로 퇴진을 압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손학규는 '오너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마음을 수없이 다졌을지도 모른다.

손학규, 이민우의 벽 넘으려면...

지금의 손학규와 유사한 처지를 경험한 정치인이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민우(1915~2004) 전 신한민주당(신민당) 총재다. 손학규만큼의 역량을 증명하지는 못했지만, 이민우 역시 1958년 이래로 5선 의원의 경력을 쌓으며 정치활동과 민주화 투쟁에서 성과를 축적했다.

전두환 정권의 야당 탄압이 극심하던 1985년 1월 18일, 이민우는 동교동계 및 상도동계의 지원을 받아 신한민주당 총재가 됐다. 자기 기반이 아닌 김대중·김영삼의 기반으로 총재가 된 것이다.

지금의 손학규처럼 이민우도 김대중·김영삼과 갈등을 일으켰다. 관리자형 총재로 만족할 수 없었다. 이민우 역시 수처작주의 정신을 발휘했다. 대표적인 예가 김대중·김영삼의 의견을 무시하고 전두환 정권의 내각제 개헌 움직임에 동조하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임의로 발표해버린 일이다. 국민들이 직선제 개헌을 원하는 상황에서, 당원들은 물론이고 당의 실질적 리더인 '양김'까지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신한민주당이 혼란에 빠졌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당을 나간 것은 동교동계와 상도동계였다. 이 상황을 <노태우 회고록> 상권은 "이민우 총재의 타협적인 노선에 위기감을 느낀 양김 세력이 집단 탈당해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는 말로 설명한다. 지금의 손학규처럼 이민우도 홀로 당을 지키게 됐다. 

이민우가 아니라 김대중·김영삼이 당을 나갔으므로, 결과적으로 이민우가 최후의 승자가 됐다. 하지만 오래갈 수 없는 승리였다. 자기 기반이 없는 이민우가 독자적으로 당을 끌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이듬해 11월 6일, 이민우는 정계은퇴 선언을 했다.

손학규와 이민우의 처지가 꼭 같은 것은 아니다. 이민우가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시대 흐름을 읽고 기민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손학규는 많이 보여줬다. 그렇기 때문에 손학규가 이민우와 다른 결과에 도달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하지만 첩첩산중이다. 유승민·안철수와 헤어지고 홀로 된 손학규가 이민우의 벽을 넘으려면, 오는 4월 21대 총선에서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그것을 통해 자기 기반을 어느 정도라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공직선거법 하에서 소수의 의석이라도 확보하면 차기 국회 하에서도 지위를 유지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단독으로 그런 성과를 얻어내기는 쉽지 않다. 유승민계에 이어 안철수계까지 떠난 상황에서, '손학규의 당'은 대중의 관심에서 자칫 완전히 멀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1987년 이민우의 전철을 그도 밟을 가능성이 있다. 손학규 입장에서는 일대 위기가 아닐 수 없는 이 상황,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가 묘수를 찾아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손학규 #안철수 #바른미래당 #유승민 #이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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