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의 숨결이 느껴지는 신라 천년 고찰

[삼국유사 발자취를 따라서] 경주 분황사 1

등록 2020.01.25 18:05수정 2020.01.2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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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동북쪽. 신라 천 년의 찬란했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고찰이 하나 있다. 바로 분황사다. 분황사는 경주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다. 지금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겉보기엔 조그마한 사찰로 보인다. 그러나 경주 분황사는 신라시대 최고의 사찰로 명성을 날린 황룡사와 견줄 정도로 유명했던 사찰이다.

분황사 하면 선덕여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분황사는 선덕여왕 즉위 3년(634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그리고 신라의 승려 자장과 원효가 머무르면서 불법을 전파했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분황사는 창건 후 현재까지 몸이 불편하고 아픈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절로도 유명하다.
  

선덕여왕이 창건한 국보 제30호로 지정된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모습 ⓒ 한정환

 
당 태종이 보낸 모란꽃 그림과 씨앗


신라 최초의 여왕의 자리에 오른 선덕여왕. 여왕으로 즉위(632년)해 16년 동안 나라와 백성들을 다스린 한반도 최초의 여왕이다. 선덕여왕은 재임하는 동안 예지력이 뛰어난 여왕으로 후세에 전해진다. <삼국유사> 기이편에는 선덕여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일이 기록돼 있다. 그중 하나가 분황사와 관련한 모란꽃 이야기이다.

당 태종이 선덕여왕 앞으로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꽃씨 석 되를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당 태종이 보낸 그림의 꽃을 보고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 꽃은 정녕코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왕의 말이 무슨 뜻을 내포하는지 모르는 신하들이 의아해하며 여왕을 바라본다. 그러자 여왕은 신하들에게 함께 보내온 꽃씨를 바로 앞 뜰에 심도록 한다. 꽃씨를 심은 후 신하들이 그 꽃이 피고 지는 동안 여러 번 꽃의 냄새를 맡아보니 꽃에 향기가 없다. 과연 여왕이 처음 했던 그 말과 같았다.

당시 여러 신하들이 여왕에게 "어떻게 그렇게 될 줄 아셨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꽃을 그렸는데도 나비가 없었으므로 그 꽃이 향기가 없었음을 알았다, 이는 당 황제가 나의 배우자가 없음을 빗댄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여왕의 깊은 뜻과 예지력을 알고 모두 뛰어난 지혜에 감복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보다 136년 뒤에 쓰인 게 <삼국유사>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모란꽃 설화를 새로 썼다. 내용은 같으나 <삼국유사>는 선덕여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로 시기가 바뀌어 있었다.


신라불교를 진흥시키고, 불력으로 외침을 막으려고 했던 선덕여왕이다. 선덕여왕은 분황사를 향기로울 분(芬)에, 임금 황(皇)을 넣어 향기가 나는 임금의 절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향기로운 여왕 선덕여왕의 숨결이 느껴지는 분황사. 해마다 분황사 앞에는 유채꽃, 메밀꽃 등 계절별로 아름다운 꽃을 심어 선덕여왕의 영혼을 달래주고 있다.
  

경주 분황사 보광전 모습 ⓒ 한정환

 
분황사의 천수대비가 눈먼 아이의 눈을 뜨게 하다

<삼국유사> 탑상 편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신라 경덕왕 때 한기리에 희명(希明)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살고 있었다. 여인의 아이는 태어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시각장애인이 됐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를 찾았다. 분황사 왼쪽 전각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대비 앞으로 갔다. 거기서 아이에게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됐다고 한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무릎 꿇으며/두 손바닥을 모아/천수관음 앞에/축원의 말씀 올리나이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졌으니/하나를 내놓아 하나를 덜기를/눈이 둘 다 없는 저에게/
하나만 주어 고쳐 주시옵소서,/아아, 저에게 끼쳐 주시면/그 자비심 얼마나 크시나이까."


 
여기서 한번 아이의 어머니 희명이라는 이름을 풀이해 보자. 바랄 희(希)에, 밝을 명(明)은 자식이 시각장애인이 되자 더 함축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눈을 밝게 해주소서'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희명이라는 이름은 자식이 눈이 먼 아이가 될 걸 알고, 예지력이 풍부한 사람이 지어준 이름 같다.

눈먼 자식이 눈을 뜨자 희명은 분황사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대비를 다음과 같이 찬양하며 기렸다고 한다.
 
"대나무 말 타고 파피리 불며 거리에서 놀더니 / 하루아침에 푸른 두 눈이 멀었네.
보살님이 자비로운 눈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 헛되이 버들꽃을 보냄이 몇 번의 봄 제사나 될까."


 

경주 분황사 입구에 세워진 원효성지 분황사 비석 모습 ⓒ 한정환

   
원효는 얽매이지 않는다

원효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특이하여 스승 없이 혼자 공부를 했다. 원효는 소수 귀족들의 전유물처럼 생각하던 불교를 인간의 고뇌를 해결하기 위한 대중불교로 방향을 전환시킨 대중불교의 선각자다.

원효는 저잣거리로 내려가 <화엄경>을 설파하고 백성들과 눈높이를 맞추어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을 하나하나 실현해 나갔다. <삼국유사> 의해편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예법을 중히 여기고 숭상하던 대사가 어느 날 이상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려는가 /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보련다."

사람들은 모두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 무열왕이 이 말을 듣고는 "대사가 아마 귀한 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것 같구나, 나라에 위대한 현인이 있으면 이로움이 막대할 것이다"라고 말했단다.

하루는 왕이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불러오게 했다. 궁리는 원효를 찾던 중 남산에서 문천교로 내려오는 원효를 만난다. 원효는 궁리를 만나자 일부러 물속에 빠져 옷을 적셨다. 하는 수 없이 궁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고 그곳에서 머물다 가게 했다. 이때 원효대사가 과부가 된 요석공주와 세속 인연을 맺어서 태어난 아이가 설총이다.

설총은 태어나면서부터 지혜롭고 영특하며 민첩했다. 경서와 역사 책에도 널리 통달하여 신라의 10 현(賢) 중 한 사람으로 불린다. 원효는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후부터 속인의 의복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불렀다. 원효는 일찍이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와 사십회향품소(四十廻向品疏)를 지었다.

원효가 입적하자 설총이 유해를 잘게 부수어 찰흙으로 빚은 소상(塑像)을 만들었다. 소상을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며 예를 표했다. 설총이 매번 옆에서 예를 올리자 소상이 고개를 돌리며 계속 돌아보았다고 전해진다. 이 소상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던 고려 말까지 분황사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일찍이 원효가 거주하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설총은 다음과 같이 찬양하며 기린다.

"각승(角乘)은 처음 삼매경(三昧經)의 축을 열었고/표주박 들고 춤추는 것은 마침내 온 거리의 풍습이 되었네/달 밝은 요석궁에 봄 잠이 깊더니/문 닫힌 분황사엔 돌아다보는 그림자 비었다."(각승(角乘) ; 삼매경을 풀이한 법사를 말함)
 

분황사 바로 앞에 있는 경주 황룡사지 모습. ⓒ 한정환

   
* 찾아가는 길
주소 :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주차료 : 무료
입장료 : 어른 1,300원, 청소년 및 군인 1,000원, 어린이 800원

* 참고문헌
- 삼국유사 <최광식·박대재 옮김>
- 상처 입은 봉황 선덕여왕 <김용희>
-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 <고운기>
- 삼국유사 <김원중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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