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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잃은 아들의 증언 "이승만, 대통령으로 인정 못해"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4)] 1~3대 이승만 대통령 ④

등록 2020.01.20 10:29수정 2020.01.2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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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1948. 7. 20.) ⓒ 눈빛출판사

  
무투표 당선이라니

1948년 5월 10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우여곡절 끝에 제헌 국회의원을 뽑는 첫 번째 총선거가 실시됐다. 이승만은 서울 동대문갑 지역구에서 출마했다. 그러자 독립운동가 최능진은 이승만과 대결하고자 같은 선거구에 입후보했다.

하지만 최능진 후보는 이승만 측의 방해공작으로 후보자 등록무효 선고를 받았다. 이로써 이승만은 무투표 당선됐다. 이후 최능진은 이승만에게 미운털이 박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전쟁 중인 1951년 2월 경북 달성에서 처형당했다.

5.10 총선거는 200개의 선거구 중 4.3항쟁이 일어난 제주도 두 곳을 제외한 198개 선거구에서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좌익과 중도세력 그리고 남북협상을 추진했던 세력은 불참했다. 아무튼 이 선거로 구성된 제헌 국회는 3권 분립과 대통령제, 국회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규정한 헌법을 1948년 7월 17일에 공포했다.

사흘 뒤인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광복 3주년을 맞는 1948년 8월 15일,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그해 8월 25일에는 38도선 이북에서도 선거가 치러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선출됐다. 또한 9월 9일에는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는 이전에 그 누구도 상상치 못한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진, 곧 분단국가가 됐다. 그리하여 올해로 72주년을 맞고 있다.
  

5. 10 총선거에서 투표하는 유권자들(1948. 5. 10.). ⓒ NARA

 
반민특위 와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국회의원들은 일제강점기 친일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법을 제정해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반민특위 워원장에는 임시정부 요인 출신의 김상덕, 부위원장에는 김상돈이 각각 선출됐다. 이들은 1949년 정초부터 본격 반민특위 활동에  특위 활동에 들어갔다.


그해 1월 8일에는 화신재벌 친일기업가 박흥식 검거에 이어서, 일본군 첩자로 활동한 이종형, 강우규 열사를 체포한 김태석, 중추원 부의장 박중양, 임전보국단장 최린,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 고문경찰관 노덕술, 공주 갑부 김갑순, 사학자 최남선, 문학가 이광수, 밀정 배정자 등을 속속 체포했다.

하지만 반민특위가 활동을 시작하자 곧장 방해공작이 잇따랐다. 피압박 민족이 독립하여 나라를 세우면 가장 먼저 부역자들을 청산해야 할 대통령이 반민특위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이승만은 애초부터 반민법 제정 자체를 반대했다.

그는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하자 "반민자 처단에 신중을 기하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은 우선 신생국가의 조직을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로 이를 위해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또한 그의 권력을 지탱해주는 세력이 친일분자로 친일세력 척결은 곧 자신의 권력을 약화키는 결과로 판단했던 것이다.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비롯한 친일경찰 간부들을 체포하자 이승만은 특위위원들을 불러 이들을 석방하라고 노골적인 압력을 가했다. 그 방해공작의 압권은 1946년 6월 6일,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사건이었다.

당시 김태선 시경국장의 지시를 받은 윤기병 중부경찰서장은 부하를 이끌고 6월 6일 아침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했다. 이들은 출근하던 특위 요원 35명을 불법 체포했다. 이는 정권의 비호 아래 이뤄진 일로, 쿠데타와 마찬가지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반민특위는 사실상 와해됐다.

그 결과 해방 7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는 친일파 처벌 논의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 특위 방해로 친일파들을 척결치 못하고 문제를 희석시킨 결과다. 이로써 우리 사회의 도덕성과 민족정기에 크나큰 상처를 입혔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한, 곧 첫 단추를 잘못 꿴 것과 같은 오점은 이후 우리 사회에 정의감과 양심의 훼손 그리고 기회주의자들을 양산케 했다.
 

투표하는 이승만 대통령 부부 ⓒ 국가기록원

   
4․3항쟁과 여순사건

제주 4.3항쟁은 1947년 3.1절 기념 시위에 경찰 발포로 6명의 도민이 사망했다. 제주도민들은 이에 대한 항의로 그해 3월 10일 관공서 관리까지 가담한 총파업을 일으켰다. 이에 미군정은 육지 경찰과 서북청년회를 파견해 무자비하게 파업을 진압했다. 무차별 검거, 부녀자 겁탈, 재물 약탈과 횡포가 발생하자 그해 4월 3일 한라산에 봉화가 오르고, 무장대가 경찰서와 서청 등을 습격하면서 본격적인 항쟁이 시작됐다.

정부수립 후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대규모 진압작전이 이뤄진 결과, 항쟁은 거의 진압됐다. 이 기간 동안 제주도 169개 마을 가운데 130개 마을이 불타고, 제주도민의 약 1/9에 가까운 2만5000명~3만 명 정도가 살해됐다. 그 가운데 1/3이 어린이나 노인 그리고 여성들이었다.

후일 나는 4․3항쟁 당시 희생된 한 공무원의 유복자를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만난 바 있었다. 그는 당시 재미사학자 고 이도영 박사로 내게 울먹이면서 말했다.
 

4.3 항쟁 희생자의 유복자로 태어난 고 이도영 박사(2004. 2.) ⓒ 박도

  
"저희 아버지는 그 당시 대정면사무소 서기였습니다. 한밤중에 군인들에게 불려나가 학살이 된 후 젓갈 담듯이 암매장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게 대통령의 첫 번째 책무 아닙니까? 그런데 하물며 국가공무원인 저희 아버지를 한밤중에, 그것도 군인이 불러내  몰래 학살할 수 있습니까?

제주도민이 정부시책에 따르지 않는다면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을 교회시키는 게 올바른 정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제 나라 백성을, 그렇게  재판도 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끌고가서 학살해도 됩니까? 학살된 자 가운데 어린이들이, 노인과 부녀자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나는 이승만을 도저히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승만은 대통령에 취임한 뒤 제주 4․3쟁을 진압하고자 군대 파견을 명령했다. 그런데 출병 명령을 받은 14연대 내의 남로당계 군인들이 1948년 10월 19일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 반란군은 순식간에 여수 시내를 장악했고, 이승만 정부를 불신하던 좌익세력이 이에 호응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정부군은 육해공군 합동작전으로 여수 시가지를 잿더미로 만들고 탈환했다.

여수사건은 진압됐지만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지리산 등지로 숨어들어 빨치산이 됐다. 이들 지역에서는 한때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정부의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진압됐다.

여수사건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이승만 정권은 일제가 만든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1948년 12월 1일 공포했다. 이 국가보안법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치 및 사상 그리고 문화 예술의 표현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백범 김구 장의 행렬이 남대문로를 지나고 있다(1949. 7. 5.) ⓒ NARA

 
김구 암살 연루설

1949년 1월 18일, 김구가 다시 외국군(미군) 철퇴와 남북협상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정부는 즉각 남북협상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회에서는 소장 개혁파 의원들이 외군철퇴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이 제안은 민국당의 반대로 부결됐다. 이 문제에서만은 이승만과 민국당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외국군 철퇴문제는 1949년 6월 미국이 철수를 선언함으로써 해결됐다. 하지만 김구는 그해 6월 26일 한낮에 경교장 거실에서 현역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됐다. 안두희는 이승만 정권 아래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4.19 이후에는 계속되는 진상공개 요구와 테러 위협으로 마치 두더지처럼 숨어 지냈다.

나는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간 끈질기게 추적한 권중희 선생을 2003년 11월에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분이 내게 들려준 긴 인터뷰 가운데 이승만 연루설 부분이다.
 

김구 암살범 안두희 추적자 고 권중희 선생이 옛 경교장 앞에서(2003. 11.). ⓒ 박도

 
백범 암살 1주일 전인 1949년 6월 20일 무렵, 장은산 포병사령관이 안두희를 사령관실로 불렀다. 안 소위가 사령관실로 갔다. 그러자 장 사령관은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안 소위를 부른다고 전했다.

안두희가 지프차로 삼각지에 있는 참모총장실로 갔더니 그 자리에는 신성모 국방장관도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채 참모총장이 안두희의 내방 인사를 받고 "우리 경무대 구경 갈까?" 했다.

그러자 신성모 국방장관이 "마침 나도 보고할 것이 있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나중에야 안두희는 그것이 사전에 짜놓은 각본임을 알았다고 나에게 말했다. 일개 육군소위를 이승만 대통령이 하찮은 일로 접견할 리가 있을 수 있나?

그날 경무대로 가니까 미리 전화로 연락이 된 듯, 비서가 맞아주면서 곧바로 대통령 집무실로 안내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각하, 이번 사격대회에서 상을 받은 안두희 소위입니다"하고 소개하니까, 이 대통령이 안두희의 손을 잡으며 "국방장관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어. 높은 사람 시키는 대로 일 잘하고, 말 잘 들어"라고 격려조로 말했다.

경무대를 나와서 곧장 부대로 직행하여 보고했더니, 장은산 사령관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 봐, 내 말이 맞지?" 하면서 엄지 손가락(대통령을 암시)을 세우면서 거사 후 모든 것을 보장할 테니 안심해도 된다고 회유를 했다.

안두희는 노회한 정객들의 하수인이 된 셈이다. 영웅심에 젖은 안두희는 나에게 "그 말이 그 말이지 뭐. 우리 정보하는 사람(안은 월남 후 한때 미군정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은 '척'하면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는다"고 그게 바로 암살 세계의 이심전심의 화법이라고 말했다.


암살 조직은 통상 점조직이며, 극비 지령은 암시나 이심전심의 화법으로 내리는 게 불문율이다. 그래야 증거를 인멸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오리발을 내밀 수 있다. 한마디로 이심전심의 화법은 암살 세계의 ABC이다.

안두희는 그 이튿날 나에게 고백한 말을 "권중희의 강압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고 번복했다.

하지만 1992년 9월 23일 안두희가 나에게 털어놓은 그 자백만은 진실에 가깝다고 확신한다. 그 첫째로는 안두희가 입을 연 후로 나는 일체 위해를 가하지 않았고, 자유스런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 둘째는 내가 묻지도 않은 <시역의 고민> 대필이나 경무대 방문을 안두희는 아주 세밀하게 얘기했다.

내가 경무대에서 무슨 차를 마셨느냐고 묻자, 안두희는 주스를 마셨다고 대답했다. 수십 년 전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커피를 좋아하는데, 그날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스가 나와서 똑똑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안두희가 제 입으로 털어놓은 사실을 번복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엄존하는 보이지 않는 무서운 세력을 의식해서 더러운 제 목숨을 잇고자 발버둥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암살 배후자는 자기들 정체가 드러날 듯하면 가차없이 암살자를 처치해 버린다. 미국에서 케네디를 암살한 자도, 필리핀에서 아키노를 암살한 자도 현장에서 다 죽여버렸다. 그것이 그네들 세계다. 안두희는 그런 그들의 세계 불문율을 잘 알기 때문에 번복한 것이다.

 
 
나와 권중희 선생은 여러 독자들의 후원금으로 김구 암살의 진상을 알고자 2004년 1월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으로 갔다. 하지만 미국 국익에 해치는 문서는 별도로 분류, 아직도 공개치 않아 씁쓸히 돌아왔다. 김구 암살 배후를 시원히 밝혀줄 사람은 모두 고인이 됐다. 그 진상 규명은 이제 후세 역사가와 언론인의 몫이다.
 

이승만과 김구 ⓒ 백범기념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임영태 지음 들녘 발간 <대한민국사>외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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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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