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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욕 먹고, 난 페트병에 용무... 거기도 똑같네"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를 본 택배 노동자들의 반응

등록 2019.12.28 13:52수정 2019.12.28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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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리키의 모습 ⓒ 영화사 진진


"일주일에 6일, 하루에 14시간씩 일하는데 당신이 왜 노동자가 아니야?"

83살의 노장 켄 로치 감독이 은퇴를 번복하고 만든 영화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는 영국의 택배 기사 리키가 처한 현실을 그린다.

사비로 구매한 택배 차량을 몰고 다니면서 '개인 사업자'라는 이름 아래 일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리키에게는 '자율'이 주어지지 않는다. 리키의 아내 애비는 그가 노동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의아하기만 하다. 이른바 '긱(GIG)경제'(필요에 따라 기업들이 단기 계약직이나 임시직으로 인력을 충원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형태)의 어두운 단면이다.

"서명하면 개인사업자가 되는 겁니다. 스스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거죠." (물류창고 관리인이 면접을 보러 간 리키에게 한 말)

하지만 리키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제대로 밥을 먹을 시간도 화장실을 갈 시간도 없이 일해야 했다.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쉬는 날이 생기면 스스로 대리기사를 찾아야 했다.

비록 먼 나라인 영국의 노동 현실을 다루지만 한국의 첨예한 노동 이슈이기도 한 '플랫폼 노동'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한국의 리키'인 택배 노동자들은 "영화의 내용이 우리 현실과 정말 유사하더라. 선진국이라는 영국에도 저런 현실이 있나 의아했다"라고 말한다.

영화 같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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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서울우편집중국에서 우체부와 택배직원들이 가득 쌓인 우편물들을 분류·정리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 연합뉴스


"개봉하기 전에 택배 노동자들끼리 집단상영회를 열어 영화를 같이 봤다. 영국과 한국의 상황이 전반적으로 유사했다. 근로자의 형태로 일하고 있지만 '개인사업자'다 보니 자기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모습이 특히 닮아있었다." (수열 전국공공운수노조 정책기획국장)


영화 초반, 리키는 택배 일을 시작하기 전에 택배차 구매 여부를 두고 고민에 빠진다. 다달이 회사차를 빌리면서 렌트비를 낼지 아니면 자기 차를 살지를 고민하던 리키는 아내 애비의 차를 팔아 물건을 더 많이 실을 수 있는 커다란 택배차를 구매한다.

배달노동자인 라이더유니온의 박정훈 위원장은 "영화에서 렌트비를 낼지 자차를 살지를 두고 고민하는 모습이 마치 라이더들 같았다"며 "라이더들도 처음 배달 일을 시작할 때 오토바이를 살지 아니면 렌트비를 낼지 고민한다"고 말한다.

택배 노동자인 박성기 전국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택배지부 지부장은 영화처럼 가족을 태우고 택배일을 해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리키는 딸을 태우고 택배 일에 나서지만 박성기 지부장은 아내와 함께 일했다. 2007년 한 택배 회사에 입사한 그는 첫 날에만 270여 개의 물량을 받아 아내와 함께 배달을 시작했다. 리키는 딸이 도와준 날 무사히 일을 해내지만 박성기 지부장은 아내가 도와줘도 일을 다 끝내지 못했다.

"초짜가 어떻게 270개를 돌리나. 오후 11시 30분까지숨도 못 쉬고 계속 배달만 했다. 한 남자가 집사람에게 쌍욕을 하면서 '지금 몇 시인데 배달을 왔냐'고 하더라. 집사람은 그런 욕을 처음 듣고 설움이 북받쳐서 울었다. 내가 그만하자고 해서 170개까지만 돌리고 100개를 반납했다."

자차를 구매하더라도 차가 온전히 택배 기사에게 귀속되지 않는 건 영국이나 한국이나 똑같았다. 영화에서 리키는 택배차에 딸을 태웠다가 관리자의 지적을 듣기도 했다. 리키는 "내 차인데 딸도 못 태우냐"고 항의하지만 관리자에게 그 항의가 통하지 않았다.

한국의 경우 택배차를 개인이 구입하더라도 차에 회사 마크를 새기는 등 사비로 도색을 해야 한다. 박성기 지부장은 "'사장'으로 간주하면서 근무복도 반강제로 매매하고 차에 도색하는 비용도 사비로 내라고 한다"며 "택배차를 중고로 300만 원에 팔 일이 있었는데 도색이 돼있다는 이유로 100만 원을 차감하더라. 회사에서 100만 원을 내주는 일은 없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업무 중 발생하는 자질구레한 비용도 모두 사비로 해결해야 한다. 박성기 지부장은 "핸드폰 어플, 스캐너, 운송장, 장갑 같은 일에 필요한 물건은 모두 자비로 해결한다"고 말했다. 영화 속 리키의 관리자도 리키의 과실이 아닌 어떤 사고로 스캐너가 부서졌을 때 리키에게 모든 책임을 물었다. 박정훈 위원장은 "계약할 땐 사장님이고 일시킬 땐 근로자인데 사고가 나면 다시 사장님이 된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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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구입한 택배차 옆에 있는 리키의 모습. ⓒ 영화사 진진


영화 속에서 리키는 화장실 갈 시간이 없어 잠시 주차하고 페트병에 용무를 보기도 했다. 한국에서 택배 기사들은 아파트 대단지를 도느냐 상가를 도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한다. 상가 지역에는 상대적으로 개방된 화장실이 많지만 아파트는 화장실 사용이 어렵다는 것. 박성기 지부장은 실제로 콜라병에 용무를 본 일이 있다.

"한국이 참 술인심도 전화인심도 좋은데 화장실은 문을 잠가놓는 데가 많다. 화장실을 못 가서 콜라병을 갖고 다니면서 용무를 보고 맨홀에 버리기도 했다. 자율적으로 점심시간이나 휴식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택배 배송 현실이 그렇지 않다. 점심을 먹으면 그만큼 일이 늦게 끝난다. 주차해놓고 밥을 먹을 수 있는 곳도 없다. 그러다 보니 같이 일하는 택배 노동자들은 9시 정도에 모여서 아침밥을 먹고 일이 끝날 때까지 계속 굶는다."

영화에서 리키가 택배차를 주차할 곳이 없어 곤란을 겪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적어도 한국에서 택배차를 운행하면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수열 정책기획국장은 "지자체가 하역을 위한 주정차를 약 15분 정도 허용한다"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11월, 서울행정법원은 택배 기사들도 노동자로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처음이었다. '한국의 리키들'은 '노동자'가 될 수 있을까. 이 판결을 두고 박성기 지부장은 "그래도 희망적"이라고 평했다.

"20년 전만 해도 택배 노동자들은 개인 사업자가 아니었다. 원래 사원 채용을 해서 배달을 했는데 나더러 이제 사장이라면서 사업자등록을 하라더라. 처음에는 다들 이게 어떤 의미인줄 몰랐다. 사용자성을 회피하는 체제로 반강제적으로 내몰리는 것이라는 걸 나중에 조금씩 알게 됐다. 있는 자들과 법을 아는 자들이 사각지대로 택배 노동자들을 밀어넣었던 것이다. '우리가 늪지대에서 허덕이고 있었구나'라는 걸 깨달았고 지금은 늪에서 헤어나오는 과정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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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대행 라이더의 모습 ⓒ 라이더유니온

#택배 #미안해요리키 #긱경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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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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