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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수관에서 '삿갓조개' 긁으며 죽어가는 사람들

[서평] 배지영 소설집 '근린생활자'

등록 2019.12.19 16:05수정 2019.12.1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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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력발전소에서 도수관은 발전에 필요한 물이 유입되는 통로다. 이런 도수관에 이물질들은 수력을 방해, 발전량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쓰레기 같은 것들을 걸러내는 장치를 한다. 문제는 작디작은 알로 부유하다 도수관으로 흘러들어 서식하는 조개나 해초 같은 바다 생물들.

삿갓조개는 특히 골칫덩어리였다. 순식간에 번질 정도로 생명력이 강했다. 도수관을 부식시키는 데다 다른 생물들이 원활하게 부착될 수 있도록 매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엄청난 비용으로 특수 코팅했지만 얼마 못 가 삿갓조개들이 번식했고 결국 돈만 낭비한 꼴이 된다.


배지영 단편 소설집 <근린생활자>(한겨레 출판 펴냄) 네 번째 작품 '삿갓조개'는 그래서 고용한, 도수관의 삿갓조개를 긁어내는 일을 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근린생활자> 책표지. ⓒ 한겨레 출판

 
시설관리인. 그를 포함한 서른 명의 직책이기는 했지만 외부에선 도수관을 청소하는 사람들이란 걸 잘 몰랐고 알려져서도 안 됐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관리인'으로 불렸고 그들의 하는 일이 밖으로 상세히 알려진 건 아니었다. 서른 명의 관리인이 365개의 도수관을 관리하기란 쉽지 않았다. 아무리 노련한 관리인일지라도 몇 시간이고 도수관 안에서 일할 수는 없었다. 작업은 밀물이 오기 전 열 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그동안, 작업이 진행되는 15개의 도수관은 철저하게 차단된 상태였기에 익사할 염려는 없었지만 질식할 경우의 수는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300미터 길이의 도수관 안 산소량은 희박했다. 사실 그들 노동규칙 메뉴얼엔 45분 노동에 15분 휴식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일해서는 하루 열 시간 작업 시간을 도저히 채워나갈 수 없었다. - 202쪽
 
도수관 하나는 높이 4m, 폭 17m, 300m 길이로 거대하다. 햇빛 한 줌 들지 않아 축축하고 어두컴컴했다. 산소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곳에서 그들은 매일 오로지 혼자, 헤드 랜턴과 산소통에 의지하며 10시간 넘게 삿갓조개를 긁어낸다. 그런 그들이 그처럼 한 달 꼬박 일하고 쥘 수 있는 돈은 이백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이에 시급 900원 인상을 요구한다. 그러나 5만 원을 인상하는 대신 일주일에 두 개씩 지급해오던 산소통을 직접 사서 쓰라며 보급을 중지하고 만다. 다른 것도 아닌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산소통을 말이다. 산소통 하나는 2만 5천 원, 되려 20만 원이 깎인 것이다. 도수관 노동자들의 목숨 건 파업은 이렇게 시작된다.

'삿갓조개'는 주인공인 '그'가 파업에 가담, 도수관으로 숨어들어 삿갓조개를 긁어내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온 지난날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위태롭고 부당한 노동 현실을 이야기한다.

발전소는 그동안 도수관 관리인들을 수치스러워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전혀 쓰지 않는 문만 이용하게 하거나, 다리를 건너야만 갈 수 있는 곳에 컨테이너 몇 개로 그들만을 위한 식당을 만들어 이용하게 하는 등, 최대한 감추려고 해왔다. 그런 그들이 파업으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거짓 사실들을 유포한다.

산소가 부족한 데다 습하고 어두운 곳에서 몇 시간씩 일하기 때문에 점심을 먹자고 지상으로 올라오면 어지럼증이 발목을 잡아 잠시라도 누워 햇볕을 쫴야만 했다. 말하자면 휴식이 아닌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휴식이었다. 노동자들은 밥을 먹는 전후, 틈만 나면 식당 주변 잔디에 눕곤 했고,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회사는 도수관 노동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동안 감시해왔다. 이와 같은 모습들도 매일 촬영되었고,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하자 CCTV 영상을 근거로 제시하며 몰상식하고 태만한 노동자로 몰아간다. 이에 언론들까지 가세한다. 어떤 언론도 진실 가까이 가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도수관 노동자들이 하는 일과 부당한 대우 등은 철저하게 은폐된 채 부정한 쪽으로만 보도된다.

그리하여 도수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사소한 이익을 위해 시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전기를 담보로 파업하는 파렴치한 자들로만 세상에 알려진다. 

산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도수관에 최루탄을 터트리는 것은 살인행위이다. 그럼에도 진압대(발전소)는 최루탄을 터트리고 만다. 그들의 그와 같은 오만과 무자비함은 어떻게 가능할까. 권력(힘)에 편승한 언론과, 겉에 드러나는 것만으로 누군가 또는 어떤 사건을 판단하거나 간과한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삿갓조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는 부당한 노동 현실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언론의 바람직한 역할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누군가에 대한 당연한 관심을 묻는 소설이다. 
 
사실 이것은 '직업'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있고 전문성도 가지고 있음에도 야박한 대가와 고된 환경을 이겨내야 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혹은 조금 더 노력하지 않은 자신을 탓하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래야 해서가 아니라 그래야 하는 줄 알고 살아왔던 이들입니다. 그렇게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  한겨레 출판 블로그 작가 인터뷰'중에서.

'내가 당연하게 쓰는 전기를 위해 그 존재조차 생각 못한 그 누군가 그처럼 비참하게 사는구나' 생각에 더욱 슬프게 와 닿았던 '삿갓조개'였다. 수록된 6편 소설 모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라 흥미롭게, 그런데 삿갓조개 노동자처럼 너무나 안쓰럽고 비참한 그들의 이야기라 비릿한 슬픔으로 읽은 소설집이다.

외에 ▲반지하와 월세를 전전하다 불법건축물(근린생활시설)을 내 집으로 마련한 상우(근린생활자) ▲북한 부동산에 노후를 투자한 태극기 부대 할아버지 순병(우리의 소원은 통일) ▲폐기물 드럼통을 묻는 일을 하는 산림청 하청업체 직원 그(그것) ▲대형마트나 백화점 행사장에서 물건을 훔쳐 살아가는 나와 산(山)에서 영감들에게 몸을 파는 미자 언니(사마리아 여인들) ▲동네 마트 구석진 곳에서 기술과 유행이 지난 중소기업 청소기를 파는 외판원 길씨(청소기의 혁명) 등, 하나 같이 안타깝고 안쓰러운 여러 비정규직 삶들을 다룬다.
#근린생활자 #삿갓조개 #비정규직 #수력발전소 #도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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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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