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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고 분통한 김개남장군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2회] 전봉준과 손화중 등 동학혁명 지도자들은 형식적이나마 사법절차에 따른 재판을 받았으나, 김개남의 경우는 한양 압송 도중에 즉결 처형되었

등록 2019.12.13 16:27수정 2019.12.13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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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장군 ⓒ 박도

좌절된 혁명가 치고 억울하고 분통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지만, 동학혁명기의 김개남(金開南, 1853~1894) 장군과 같은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동학혁명은 전봉준ㆍ김개남ㆍ손화중의 3대 지도자에 의해 전개되었다. 여기에 김덕명과 최경선을 더하여 5대 지도자로 일컫기도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동학혁명 관련 역사책과 연구서는 전봉준에만 집중한다. 드라마나 연극 등 예술 작품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동학혁명=전봉준'이라는 등식이 생겨나고 일반화되었다.   

물론 동학혁명의 총지휘자는 전봉준이고, 그의 개혁사상과 비범한 능력, 출중한 인품은 동학혁명을 이끈 지도자로서 모자라지 않는다. 우리 역사에서 그만한 민중의 영웅도 찾기 어렵다.

전북태인 출신인 김개남은 동학혁명의 준비와 진행과정에서 특출한 역할을 하였다. 본명이 김영주(金永疇)인 그는 동학에 입문하여 활동하면서 신분 노출을 피하고자 기범(箕範)이란 가명을 사용하고,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개남(開南)이란 두 글자를 손바닥에 써서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름을 '개남'으로 고쳤다고 한다. "남쪽에서부터 개벽한다"는 뜻이 담긴다.

김개남은 동학의 2세 교주 최시형이 1890년 초기 전라도 일대를 순행하며 포덕할 때 그를 만나 동학에 입도하고 접주로서 사회개혁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전봉준 ⓒ wikimedia commons

 
동학혁명 진행과정은 많이 알려진 그대로이고, 여기서는 먼저 전봉준과 김개남의 시국관과 대처방안의 차이점을 살펴본다.

전봉준은 조선왕조체제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먼저 '권귀(權貴)' 즉 부패한 탐관오리들을 척결해야 한다는 편이고, 김개남은 곧바로 한양으로 진격하여 부패무능한 왕조를 타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전봉준의, 농사철이고 농민들이 많이 지쳐 있으니 기회를 봐가면서 입경하자는 전략에도 충분한 의미가 담기고, 쇠뿔은 단김에 빼야 한다는 김개남의 노선도 틀리지 않았다.

차차 정리하고 분석하겠지만, 다소 거칠게 정리하면 전봉준은 근왕주의적인 입장이고, 김개남은 봉건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반봉건ㆍ반외세'를 기치로 내걸면서도 현실대처 방법과 진행속도에서는 큰 차이를 보인 셈이다.

부패 무능한 조정을 뒤엎고 틈새를 노리는 왜적을 물리치면서 만민이 평등한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봉기했던 두 영웅은 그러나 꿈을 접은 채 배신자들에 의해 밀고되고 붙잡혀서 처형되었다.

김개남은 청주병영의 공격에 실패하고 화문산의 깊은 산골(현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의 매부집에 은신했다가 아랫 마을의 옛 친구 임병찬에 의탁하려다 그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전봉준이 체포된 마을에서 20리 안팎에서 그도 붙잡힌 것이다.

관군은 붙잡힌 김개남을 황소달구지 위에 태운 뒤 열 손가락에 대못을 박고, 달구지는 소나무 서까래로 삥 둘러 엮어놓아 탈출하지 못하게 짚둥우리를 서까래 위에 덮어 씌웠다. 한양으로 압송하는 길목마다 백성들이 몰려나와 외쳤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만군사 어디다 두고
 짚둥우리가 왠말이냐!


전봉준과 손화중 등 동학혁명 지도자들은 형식적이나마 사법절차에 따른 재판을 받았고 공초록(供招錄)이라는 판결문 등을 남겼으나, 김개남의 경우는 한양 압송 도중에 즉결 처형되었다.

그가 압송되어 가는 길목마다 관헌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구름같이 백성들이 몰려들자 전주감사 이도재는 1894년 12월 3일 전주 남문 싸전다리 건너 초록바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효수하였다.

제2의 동학혁명이 두려워 법률에도 없는 짓을 한 것이다.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김개남의 최후를 이렇게 기록한다.

이도재는 난리를 불러오게 될까 두려워 감히 그를 서울로 올려보내지 못하고 즉시 목을 베어 죽여버렸다. 그리고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냈더니 큰 동이에 가득하여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다투어 내장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머리는 상자에 넣어서 궁궐로 보냈다.

김개남은 미친 듯한 행동과 포악하고 잔인함이 여러 적 가운데 가장 심하여 사람들이 마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였다.

김개남의 머리는 서울 서소문 밖에 여러 날 동안 효시된 후 다시 전주로 보내졌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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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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