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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인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나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홍콩인의 정체성

등록 2019.11.20 10:31수정 2019.11.20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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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참가자에 무기 겨눈 홍콩 경찰 18일 홍콩이공대학에서 시위진압에 투입된 경찰이 도주하려는 시위대를 향해 진압용 무기를 겨누고 있다. ⓒ 홍콩 AP=연합뉴스


홍콩사태가 격화될 대로 격화돼 있다. 시위대와 경찰이 대학 구내에서 내전을 방불케 하는 충돌을 빚고 있다. 18일 이공대에서는 400명 이상이 경찰에 체포됐다. 전 세계를 안타깝게 하는 상황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홍콩사태에 관한 소식이 수시로 업데이트되고 있지만, 한국인들에게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 게 있다. 바로, 홍콩 시위를 움직이는 원동력에 관한 것이다. 한국 고유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이 사태를 민주화 투쟁으로만 바라보는 일부 언론도 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사태의 배후에 홍콩 정체성의 문제가 좀더 짙게 깔려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홍콩의 정체성은 비단 이번뿐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홍콩 정세에 영향을 미쳐왔다. 1842년 난징조약(남경조약)으로 영국에 넘어간 이후, 근 180년간 홍콩을 움직인 원동력 중 하나는 바로 이 정체성 문제였다.

'홍콩 정체성' 문제의 역사

오늘날의 홍콩인들은 청나라가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에 패해 난징조약을 체결할 때 살았던 홍콩 주민들의 후예가 아니다. 지금의 홍콩인 대부분은 1842년 이후에 정착한 사람들의 후예다.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기 1년 전인 1996년, 역사학자인 하마시타 다케시 도쿄대 교수가 쓴 <홍콩 - 아시아의 네트워크 도시>는 이렇게 설명한다.
 
"6백여 만의 인구 가운데 98%가 중국인이지만, 중국 사회의 내부를 세대적으로 보면, (1) 1842년 영국에 할양된 이후 이민 온 초기 세대 및 그 일족, (2) 1898년 중영조약 이후 홍콩에 편입된 신제(新界·신계) 지역에 소속하는 세대, (3) 1941년 일본 점령 이후 특히 49년의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뒤에 이민 온 세대, (4) 위의 (1), (2), (3)의 배경을 가지며 홍콩에서 출생한 세대 등 이상의 4대에 걸친 세대가 제각각 서로 다른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공존하고 있다."
 
하마시타의 책에 1898년이 1899년으로, 1941년이 1945년으로 잘못 적혀 있어서 위와 같이 수정했다. 위 글에 나타나는 것처럼 1997년의 홍콩인은 1842년의 홍콩인과 달랐다. 중국에서 분리될 때의 홍콩인과 중국으로 반환될 때의 홍콩인이 문화적으로는 비슷했지만, 사회학적 측면에서는 달랐던 것이다. 1997년의 홍콩인들은 1842년 이후, 1898년 이후, 1949년 이후 중국대륙에서 이민 온 사람들과 그 후예들이었다.

홍콩인들은 문화적으로는 중국인과 다를 바 없지만, 영국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중국인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정체성을 갖게 됐다. 홍콩인들은 중국과 영국, 중국과 세계의 무역 및 금융을 매개하면서 경제적 성장을 거듭했다. 그래서 중국과 여타 세계,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개자로서 자신들의 역할을 모색했다.

또 그들은 아편전쟁 이후에 청나라가 세계 열강의 착취를 당하는 모습과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대비시키면서, 중국과는 색다른 자신들의 이미지를 정립했다. 중국을 동류로 인식하지 않고 타자화(他者化)하는 태도가 생겨났던 것이다.
 

2010년 7월 홍콩에서 찍은 공산당 반대 구호들. ⓒ 김종성

거기다가 중국공산당의 대륙 석권이 이들에게 상당한 경계심을 줬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축적한 자신들의 번영이 공산당 체제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자명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홍콩에서 중국공산당 반대 구호가 거리에 나붙어도 누구 하나 떼어내지 않는 것만 봐도, 공산당에 대한 홍콩인들의 시각을 가늠할 수 있다.  


이렇게 영국보다도 중국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많이 갖고 있다 보니, 한국인들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갖는 분노의 감정을, 홍콩인들은 영국제국주의에 대해 별로 많이 갖고 있지 않다. 물론 그런 정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평균적 정서에서는 잘 추출되지 않는다. 자기 나라 일부였던 홍콩을 영국에 빼앗긴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쉽사리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일 것이다.

홍콩과 중국의 정체성이 충돌하는 지점

그러나 그렇다고 영국 지배 하의 홍콩인들이 중국을 그저 남으로만 대한 것은 아니다. 자신들보다 못 살고 뒤쳐진 중국을 경원시하면서도, 제국주의에 시달리는 중국을 동정하고 동조하는 기류도 분명히 존재했다. 하마시타는 이렇게 말한다. 아래의 '주권'은 '영향력' 정도로 축소 해석해서 읽어야 한다.
 
"홍콩에서도 지식인들에 의해 중국의 민족주의가 주장되어 왔는데, <순환일보>를 발행한 왕타오와 양무운동을 주장한 허치, 나아가 신해혁명에서 큰 역할을 한 쑨원 등은 홍콩을 거점으로 민족주의를 주장하였다. 이렇듯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라는 이미지가 전부는 아니며, 오히려 다양한 레벨에서 중국의 주권이 줄곧 행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식민지 홍콩 내에 친(親)중국 기운이 상당 수준으로 존재했다는 점은 1967년에 발생한 대규모 시위에서도 확인된다. 영국 식민당국의 일방적 관점에 따라 '67폭동', '홍콩 67좌파 폭란', '홍콩 5월 폭동' 같은 부정적 표현으로 불리는 1967년 시위의 대략적인 모습을, 2018년에 <중소 연구> 제42권 제3호에 실린 이종화 목원대 교수의 논문 '홍콩의 집단 기억과 시위 그리고 정체성 정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위는 중국대륙에서 발생한 문화대혁명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문화대혁명에 영향을 받은 홍콩의 좌파 노동자들이 홍콩의 조기 해방을 주장하며 폭력과 파괴를 동반한 반영(反英)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홍콩의 홍위병들은 반영제국주의 구호를 외치며 돌·염산·화염병 심지어 사제총과 포탄 등을 만들어 홍콩 경찰을 공격하였고 방화 및 반(反)좌파 언론인에 대한 살해도 자행하였다. 1967년 5월 시작되어 8개월 정도 지속된 폭동 기간 동안 51명이 사망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투옥되었다."
 

경찰을 상대로 화살을 쏘는 지금의 시위대보다 훨씬 잘 무장된 세력이 8개월이나 반(反)영국, 친중국 시위를 벌였다. 홍콩 민중의 지지를 어느 정도라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홍콩의 정체성을 친영국적인 데서만 찾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홍콩은 영국에 호의적인 듯하면서도, 그렇다고 중국에 대한 애착이 없지도 않은 모호한 모습을 보여줬던 것이다. 어느 한쪽에 완전히 치우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온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모호하지 않은 확실한 한 가지가 있다. 훨씬 더 큰 권력과의 투쟁을 불사하면서라도, 홍콩인들이 자기들만의 정체성을 사수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 점은 1997~2016년 기간에 발생한 6만 4677건(연평균 3200건 이상)의 시위에서 자주 추출된 정서다.

홍콩인들은 중국과 영국, 그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는 정체성을 희구하고 있다. 1842년 이후의 177년간 구축해온 그들 나름의 역사를 기초로 '홍콩인의 홍콩'을 구축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중국과 완전히 일체화되기를 꺼리는 것이다. 그게 지난 20여 년간 하루 평균 1건에 약간 못 미치게 빈발하는 시위 문화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중국 반환 6주년이었던 2003년 7월 1일, 50만여 명의 홍콩 시민들이 국가안전법 제정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한국의 국가보안법에 상응하는 이 법안은 홍콩 안보가 아닌 중국 안보의 관점에 입각해 있었다.

이 법안은 중국 중앙정부에 유해한 홍콩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하고자 했다. 이 법안에 대한 투쟁은 홍콩이 중국의 여타 지역과 똑같이 취급되는 것에 대한 홍콩인들의 불안감을 반영했다. 결국, 홍콩 당국은 법안을 철회했다.

2007년 7월,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홍콩 청소년들에 대한 국민교육 강화를 추진했다. 이 시도 역시 학생·교사·학부모·시민단체의 저항으로 인해 좌절됐다. 자기 아이들의 의식구조가 중국으로 기울지 않을까 우려하는 홍콩인들의 공포심이 낳은 결과였다.

2014년에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며 일어난 이른바 '노란 우산 운동' 역시 그런 정서를 깔고 있었다. 행정장관 임명에 대한 중국의 입김을 배제하려는 홍콩인들의 열망이 낳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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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시위대가 기둥에 적어놓은 중국 비난 구호 14일 홍콩의 금융 중심가인 도심 센트럴 건물 기둥에 '홍콩을 자유롭게 하라. 차이나치를 멈춰라'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 연합뉴스

홍콩인들이 정체성 문제에 특히 민감하다는 점은 지금 사태에서도 잘 드러난다. 범죄자를 중국으로 송환활 수 있도록 하는 송환법안에 대한 반대투쟁은 홍콩이 중국 땅처럼 취급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을 반영하고 있다. 홍콩 정체성이 중국의 정체성과 뒤섞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반영하는 일이다.

홍콩인들이 한층 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정체성에 대한 자신들의 의지가 중국대륙과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중국 정부로서는 영국에 빼앗겼다가 되찾은 홍콩을 중국의 일부로 간주할 수밖에 없으니, 홍콩인들은 그런 중국과의 대결 속에서 정체성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독립국가의 정체성 투쟁과 비교할 때, 훨씬 더 고된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부 한국인들은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투영해 홍콩사태를 민주화운동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지만, 이처럼 지금 사태의 본질은 홍콩의 정체성이 중국의 정체성과 충돌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인들은 177년 전에 빼앗겼다가 도로 찾은 홍콩을 옛날처럼 중국의 일부로 복원시키려는 애착을 갖고 있지만, 홍콩인들은 중국인들이 그런 애착을 갖는 것 자체를 무섭게 여기고 있다. '우리는 1842년 이전의 홍콩인들이 아니라 1842년 이후의 홍콩인들이야!'라고 그들은 외치고 있다.
#홍콩 사태 #송환법 #홍콩 시위 #난징조약 #아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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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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