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처럼 바람타고 성북구 장수마을을 거닐다

등록 2019.11.17 11:43수정 2019.11.1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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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 시간인 아침 산책만큼 행복한 것이 없다. 오늘은 성북구 삼선교에 자리한 '장수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적기(메모)보다는 걷기 습관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말처럼 성공을 위해 무작정 걸어본다. 난 걷는 것을 즐기고 좋아한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4번 출구를 나와 150m정도 걸어가면 바로 '한양도성'이 보인다. 오늘은 이 낙산(駱山) 도성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해 낙산 동편 언덕 아래에 있는 장수마을을 둘러볼 생각이다.


서울 도심에 있는 장수마을은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고, 한양도성 인근에 있는 관계로 개발의 손길이 살짝 비켜간 곳이다. 사유지보다는 국유지가 많고, 주로 70세를 전후한 어르신들이 많이 거주하는 관계로 장수마을이라 불린다.

마을 동쪽으로는 한성대학이 자리하고 있고, 서쪽으로 낙산의 한양도성이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육지 속에 있는 섬처럼 외진 곳이고,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 특별히 볼 것도 즐길 것도 없어 더 마음에 드는 곳이다.
  

성북구 장수마을 마을 공동 주민 카페 ⓒ 김수종

 
기껏 있는 것이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가 한곳 있고, 최근 마을 주민들이 공동운영하는 카페 겸 갤러리가 하나 더 있다. 한동안은 도시가스는 물론 도로포장도 허술하다가 2~3년 전에 정비된 오지마을이다. 어르신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고 문화재인 한양도성으로 인해 고도제한까지 걸려있어 쉽게 개발할 수 있는 곳도 아니다.

한양도성 바깥 길을 따라서 걸으면서 오솔길 옆에 있는 많은 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에 서울시 도움을 받아 마을주민들이 공동관리하고 있는 작은 가정집을 개조한 '마실 갤러리 겸 카페'가 보인다.

이른 시간이라 내부를 살펴볼 수 없었지만, 열린마당을 잠시 거닐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조만간 해질 무렵에 와서 그림도 보고 차도 한 잔 하면서 쉬어가고 싶은 곳이다. 요즘 같은 가을날씨에는 저녁 산책으로 최상의 코스다.

이곳에는 도성을 바라보면서 대문이 있는 작은 집들이 많다. 마당이 좁아도 전혀 좁지 않은 푸른 하늘과 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는 집이다. 도시공원으로 소풍을 오거나 귀농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느껴진다.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다가 언덕 아래 작은 봉우리인 망월산에 있는 비구니 사찰인 '정각사'로 갔다. 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정목스님'이 주지로 있는 50여 년 된 작은 사찰이다.
  

성북구 장수마을 정각사 경내 ⓒ 김수종

 
지난여름 '태허당 광우스님'이 입적했을 때 다녀왔으니 3개월 만의 방문이다. 대웅전 앞에 있는 백송 두 그루가 멋지고, 백송 사이에 조성된 미래탑이 유명한 곳이다. 작은 크기의 천불상이 조각을 감상하는 것처럼 예쁘게 조성되어 있다.

연전에 어느 유명 건축가가 절 리모델링을 도운 사찰로, 아담한 별장 같은 멋스러움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자주 방문하게 된다. 꽃구경을 잠시하고는 스님에게 인사드리고는 돌아서 나왔다.

그리고 마을 아래쪽에 있는 '삼군부총무당(三軍府總武堂)' 건물로 갔다. 구한말에 구성된 군사조직인 삼군부의 관아 건물로 요즘으로 보자면 육군본부와 같은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으로 왔다고 하니 역사가 제법 되는 곳이다.
  

성북구 장수마을 삼군부총무당 ⓒ 김수종

 
일제강점기에도 일본군 군영으로 쓰이던 곳이라고 한다. 내부를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곳은 나무도 많이 있고 북쪽에는 어린이집이, 남쪽에는 작은 공원이 있어서 주변을 거닐며 쉬어가기에는 멋진 곳이다.

가끔 이곳에 오면 인근에 있는 집을 하나 구해 이사 오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조용하고 나무가 많고 공원이 있어 쉼의 공간으로 마음에 드는 곳이다. 너무 고즈넉하다. 다시 언덕을 올라본다.
  

성북구 장수마을 한성대 인근 재미난 상층집 ⓒ 김수종

 
골목이 너무 많지만, 대체로 길을 따라 오르면 도성길과 만나게 된다. 중간에 한성대학 인근에 있는 3층 가옥을 발견한다. 1층은 상점으로 쓰고 2~3층은 주택으로 보이는데, 외부수리를 하면서 철판을 두르고 도색을 했다.

그냥 보면 철판 집으로 보이지만, 나름 방수는 물론 방풍에도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인다. 재미난 집이다. 다시 언덕 끝까지 올라 사방을 조망한다. 남쪽으로 동묘역 인근의 큰 빌딩이 보인다.

동쪽의 한성대학, 북쪽의 북한산과 성북동의 집들, 돈암동의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서쪽은 당연히 한양도성 성곽이다. 이제 다시 길을 따라 마을 중심부의 아래로 조금 내려간다.
  
골목 우측에 작은 집이지만, 지붕과 마당, 담벼락 등에 화분을 400~500개 정도 올려둔 집을 방문한다. 월남전에 다녀왔다는 주인 어르신은 "전국의 야생화를 채집하여 이곳에 옮겨와서 키우시는 것이 취미"라고 한다.
  

성북구 장수마을 지붕에 수백개의 야생화가 있는 집 ⓒ 김수종

 
"국립수목원에도 없는 것이 이곳에 있지만, 분양하면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줄 수 없는 것이 자식 같은 이곳 야생화"라고 하신다. 엄청난 무게로 지붕이 주저앉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이 들기는 하지만 수년 째 작은 집은 잘 버티고 있는 중이다.

다시 골목을 따라 마을 안쪽을 둘러보니, 작은 카페가 있다는 표지판에 보인다. '예전에 망했던 카페를 다시 열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가 보았지만, 표지판만 남은 카페는 아직도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골목길을 따라 아래로 더 내려가니, 골목 사이에 미용실도 있고, 방수공사를 전문으로 하는 가게며, 작은 슈퍼도 보인다. 그런데 아침이라 그런지 인적도 없고, 도성길 순례를 하는 사람들만 간간히 보인다.

물도 좀 마시고 잠시 쉬기 위해 벤치에 앉아 있으니 고추를 말리기 위해 분주한 할머니부터 빨래를 널고 쓰레기를 버리는 할머님들이 간간히 보이기는 한다. 고양이가 생각보다 많다. 자꾸 나를 따라 다니는 놈까지.

그 아래에 개인이 하는 작은 카페인 '성곽마루'로 가 보았다.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마당에 있는 감나무며 해바라기만 멋지게 대문을 지키고 있다. 입구에 있는 피아노와 옆에 있는 텅 빈 개 집이 카페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나는 주변의 야생화며 가을꽃을 구경하면서 조금 더 거닐었다. 지붕 위에 있는 화분이며, 호박넝쿨, 가지 화분 등이 멋지게 보인다. 낡아서 비가 스며들 것 같은 슬레이트 지붕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성북구 장수마을 한양도성이 멋진 곳이다 ⓒ 김수종

 
고향처럼 정겨운 곳이지만, 이제는 너무 낡고 허물어져가는 풍경이 안타까운 곳이다. 그렇다고 돈을 들여 부수고 다시 개발하는 것도 쉽지 않은 곳이고, 수리하거나 개조하는 것도 어렵고 불가능(?)한 환경을 가진 마을이다.

한때는 젊은 사람들이 자주 방문하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벽화도 왕창 그리고, 카페를 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지워버리고 폐쇄하여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런데 놀랍게도 외국인을 위한 게스트하우스가 하나 생겼다.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에게는 이런 풍경이 먹히지!

나는 어느 건축가의 '도시재생은 잘 모르고 대책이 없을 때는 그냥 두는 것이 최선의 방안'이라는 말을 가슴 속에 다시 새기면서 마을 속을 거닐 뿐이다. 오전 햇살이 너무 좋은 날이다.
  

성북구 장수마을 가을에는 해바라기 ⓒ 김수종

 
적당한 바람과 시원한 공기가 행복감에 빠져들게 하는 시간이다. 이런 공간에서 건강한 두 발로 천천히 느리게 거닐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 장수마을 산책은 나에게 '너도 열심히 걷다보면 오래 살아남을 수 있어'라고 가르쳐주는 배움과 사색의 길이다.

이곳에 살고 있는 많은 어르신들은 매일같이 해발125m 낙산을 오르내리면서 산책을 즐기는 관계로 장수하시는 듯 보인다. 나는 오늘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햇살을 가르며 새처럼 바람을 타고 낙산 아래 장수마을과 성곽 길을 둘러보았다.

이제 이웃한 창신동과 동대문 지역을 살펴보기 위해 정상에 올라 잠시 "야호"라고 크게 소리를 질러 본 다음 다시 길을 나섰다. 인생길은 참 멀고도 긴 나그네 길인 것 같다.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 골목이 있고, 사람이 있고, 튼튼한 두 다리가 있기에 편히 걸을 수 있어서.
#성북구 장수마을 #장수마을 #한양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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