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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판 돈을 들고 내내 울었다는 작가

[서평] 이은정 지음 '눈물이 마르는 시간'

등록 2019.11.18 09:01수정 2019.11.18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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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사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내 서재에 읽지 않은 책이 쌓여 있는 것은 책을 사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읽는 속도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 것도 있지만 일단 사는 즐거움을 누렸으니 더 이상의 용도가 없어져서 그냥 아무렇게나 내 팽겨 둔 이유가 더 크다.

좋은 책은 사두면 언젠가는 읽게 되겠지라는 기대는 별로 없다. 유혹하는 책을 발견하고, 주문하고, 택배를 기다리고, 도착한 택배를 열어서 새 책을 만지작거리는 몇 분 정도까지가 책과 관련된 나의 즐거움은 거의 끝난다. 철이 없는 것은 알겠는데 호사스러운 취미는 아니다. 한 달에 40만 원 정도의 투자로 상위 1% 안에 들어가는 취미 생활이 책 사재기 말고 또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은정 작가가 쓴 <눈물이 마르는 시간>은 사는 즐거움, 읽는 즐거움, 읽은 보람을 모두 만족시키는 희귀한 책이었다. 표지가 너무 예뻐서 유난히 책을 사는 재미가 뛰어났고, 도착한 책은 '손맛'(적당한 크기, 재질, 재본 상태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이 탁월했다. 표지는 화사한데 제목은 '멜랑꼴리'하다. 
 

표지 사진 표지 사진 ⓒ 마음서재

 
평소대로라면 잡은 물고기를 통에 휙 던져 넣는 것처럼 내 서재나 책상 구석에 꾸겨 넣어야 하는데 이 책은 시선을 잡아끌었다. 읽기 시작했는데 온종일 내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쪽까지 읽고 나서야 이 책을 내려놓았다. 노래를 듣거나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가능한 일인지 의문을 가졌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심정이 이해가 되겠더라.

읽고 나니까 이 책을 읽은 감상을 쓰고 싶어졌다. 내 글쓰기 인생에 졸음을 참아가면서 글을 쓴 것이 아마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책을 읽을 때 언제 가장 즐겁고 보람을 느끼는가 하면 책 속에서 꼭 나 같은 사람을 만날 때다. 현실 세계에서는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하고 별나다 싶은 나의 독특한 면을 책 속에서 캐릭터나 화자의 이야기 속에서 만나면 그것만큼 재미나고 위안이 되는 경우가 없다.

만선 하지 못하고 항구로 돌아오는 어선에 탄 선원의 근심을 읽어내고, 엄마가 없는 엄마를 위로할 줄 알며, 동네 할머니가 건네준 오래된 수저와 며칠 뒤에 세상을 달리한 그 할머니의 죽음 사이에 있는 개연성을 생각하는 공감이 감동적이었고 위로가 되었다.

남들은 아름답고 늠름하게 여기는 나무를 정작 본인은 '목매달기 딱 좋은 나무'로 보고 빚 독촉에 시달리는 궁핍하고 절박한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담담한 어조로 찬란한 슬픔을 말하는 이은정 작가의 글쓰기가 놀랍고 존경스럽다.
 
쳐다보는 것만도 아까워서 눈물이 났던 그 사람이, 기필코 이생에 이 사랑 하나는 지키겠노라 다짐하게 했던 그 사람이, 이제는 남이 된 채 미안해, 미안해를 반복하며 내 우체통에 꽂혔다. 그 수많은 편지를 쓰며 그가 흘렸을 후회와 자책의 눈물 자국이 편지지에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나는 그저 할 만큼 하라고 내버려 두었다. 할 만큼 하고 미련 없이 당신 인생을 살라는 뜻이었다. 그는 이미 늦은 사람이었다.
 

이은정 작가만큼 책에 대한 진솔한 사랑을 보여준 사람을 보지 못했다. 꿈과 낭만이 담긴 수 백 권의 책을 헌책방에 팔아넘기기로 하고 트럭으로 실려 나갈 때 작가는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책을 판 돈을 들고 내내 울었다. 나는 안다. 이은정 작가는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생명이 없는 물건에도 연민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 어머니가 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났을 때 우리 아버지는 나를 두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쳐다보는 것만도 아까워서." <눈물이 마르는 시간>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이은정 #마음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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